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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2년 [[조선 영조|조선 영조]]가 대리청정(代理聽政) 중인 [[사도세자|왕세자]]를 폐위하고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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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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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화변]]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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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경종|경종]] 대 이후 당쟁은 군주 혹은 예비 군주를 선택하는 상황과 결부되어 한층 파급력도 크고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조선 영조|영조]]는 이러한 국면을 타개하기 위하여 [[탕평책]]을 실시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사도세자|세자]]와 갈등을 일으켜 [[임오화변]]이 발생하였다. [[임오화변]]은 [[조선 영조|영조]]와 [[사도세자|장헌세자]]의 성격적 갈등, 신임의리(辛壬義理)를 둘러싼 노·소론 당론의 대결 구도, [[사도세자|세자]]를 둘러싸고 궁중 세력과 연계된 당파 간 갈등 등 다양한 원인을 배경으로 한다.<ref>최성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6535 임오화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11월 7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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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화변]]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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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세자]]가 대리청정을 맡은 이후 [[조선 영조|영조]]의 기대에 충실하게 부응하지 못하는 틈을 타서, [[숙의 문씨|문녀(文女, 숙의 문씨)]]와 그 오빠 [[문성국|문성국(文聖國)]] 등 궁중 세력과 [[김상로|김상로(金尙魯)]]·[[홍계희|홍계희(洪啓禧)]] 등 일부 [[노론]] 세력이 연합하여 [[사도세자|세자]]의 지위를 흔들고자 각종 무함(誣陷)을 주도하였다.<ref>최성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6535 임오화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11월 7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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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7년 [[사도세자|세자]]를 매우 아꼈던 조모 [[인원왕후|인원왕후(仁元王后)]]와 법모(法母) [[정성왕후|정성왕후(貞聖王后)]]가 연이어 사망하자, [[사도세자|세자]]는 이들의 상을 치르느라 건강이 손상되었을 뿐 아니라 왕실의 보호막이 사라짐에 따라 정치적으로도 매우 곤란한 처지에 빠졌다. 이 무렵 우물에 투신자살을 시도한다든가 정신병 증세에 따라 심각한 과실을 저지르는 등 자질 면에서 심각한 결격 사유를 노출하기 시작하였다. 궁중 내 무함 세력의 술책으로 [[사도세자|세자]]가 [[조선 영조|영조]]를 알현하기도 어려워지는 등 부자간은 더욱 소원해졌고, 사태는 점점 악화되었다. <ref>최성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6535 임오화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11월 7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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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1년 [[이천보|이천보(李天輔)]]·[[민백상|민백상(閔百祥)]]·[[이후]] 등 [[사도세자|장헌세자]]을 옹호하던 주요 대신마저 연이어 사망하였다. 그 와중에 [[사도세자|세자]]는 평양까지 미행(微行)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등 파행을 일삼았고, 사태는 총체적 난국으로 치달았다. [[홍계희]]의 겸종(傔從) 출신인 [[나경언|나경언(羅景彦)]]이 [[사도세자|세자]]의 비행을 고발한 일을 계기로 결국에는 [[사도세자|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가 [[사도세자|세자]]의 심각한 병증과 예측 불가능한 변란 위험을 실토하게 되었다. 그러자 [[조선 영조|영조]]는 결국 윤5월에 [[사도세자|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고 폐위하였다. 그 후에 [[조선 영조|영조]]는 [[사도세자|세자]]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그 아들인 [[조선 정조|세손]]에게 동궁(東宮)의 지위를 계승하도록 하였다.<ref>최성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6535 임오화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11월 7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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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화변]]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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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화변]]은 대리청정 중인 [[사도세자]]를 비상식적 방식으로 폐위한 사건이어서 당대에는 물론 오늘날까지 관심이 집중되었다. 더구나 [[조선 정조|정조]]는 [[임오화변]]에 대한 재평가를 탕평 정치의 핵심 과제로 삼기도 하였다. [[임오화변]]은 [[조선 영조|영조]]대 후반부터 [[조선 순조|순조]]대에 이르기까지 주요 정치적 쟁점을 이해하는데 핵심이 되는 사건이었다.<ref>최성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6535 임오화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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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화변]]이 일어난 원인과 현재 학계의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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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화변]] 일어나게된 복합적인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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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경종|경종]]대 이후 당쟁은 군주 혹은 예비 군주를 선택하는 상황과 결부되어 한층 파급력도 크고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조선 영조|영조]]는 이러한 국면을 타개하기 위하여 [[탕평책]]을 실시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사도세자|세자]]와 갈등을 일으켜 [[임오화변]]이 발생하였다. [[임오화변]]은 [[조선 영조|영조]]와 [[사도세자]]의 성격적 갈등, 신임의리(辛壬義理)를 둘러싼 노·소론 당론의 대결 구도, [[사도세자|세자]]를 둘러싸고 궁중 세력과 연계된 당파 간 갈등 등 다양한 원인을 배경으로 한다.<ref>최성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6535 임오화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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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화변]]에 대한 다양한 분석 중 [[조선 정조|정조]]가 지은 [[지문]]을 근거로한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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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화변]]이 발생한 원인에 대해서는 [[노론|노]]·[[소론]] 당쟁설과 [[조선 영조|영조]]와 [[사도세자]]의 성격 갈등설이 대립하는 가운데 뚜렷한 설명이 제시되지 못하는 상태이다. [[혜경궁 홍씨|혜경궁(惠慶宮)]]의 『[[한중록|한중록(閑中錄)]]』 역시 양 극단의 설명을 오가고 있기 때문에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조선 정조|정조]]는 현륭원(顯隆園) 「[[지문|지문(誌文)]]」을 지어 [[임오화변]]을 종합적으로 설명하였지만, 이는 [[사도세자]]를 위한 사정(私情)에 치우쳐 서술되었다는 선입견 때문에 객관적 설명으로 인정받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지문]]」은 그전까지 대립하고 있던 이설들을 궁중의 비사까지 두루 탐문하여 알고 있던 국왕 [[조선 정조|정조]]의 시각에서 종합한 것이므로, 결코 어느 일방에 치우친 저작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지문]]」의 시각에 따라 [[임오화변]]을 정리한다.<ref>최성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6535 임오화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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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가 어린 시절에 총명하고 [[조선 영조|영조]]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사도세자|세자]]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정으로 인해 [[조선 영조|영조]]와 생모 [[영빈 이씨|영빈 이씨(暎嬪李氏)]]의 친절한 훈육을 받지 못하여 부자간의 정이 도탑지 못하였던 것은 여러 문제를 낳았다. 게다가 대리청정을 맡은 이후 [[사도세자|세자]]가 신임의리의 완전한 실현 문제와 관련하여 [[조선 영조|영조]]의 기대에 충실하게 부응하지 못하는 틈을 타서, [[문녀|문녀(文女, 숙의 문씨)]]와 그 오빠 [[문성국|문성국(文聖國)]] 등 궁중 세력과 [[김상로|김상로(金尙魯)]]·[[홍계희|홍계희(洪啓禧)]] 등 일부 [[노론]] 세력이 연합하여 [[사도세자|세자]]의 지위를 흔들고자 각종 무함을 주도하였고, 여기에 일부 [[소론 탕평당]]도 호응하여 갈등 국면을 조성하는 등 [[사도세자|세자]]의 지위가 점차 흔들리게 되었다.<ref>최성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6535 임오화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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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757년(영조 33)에 왕실 내에서 [[사도세자|세자]]를 매우 아꼈던 조모 [[인원왕후|인원왕후(仁元王后)]]와 법모(法母) [[정성왕후|정성왕후(貞聖王后)]]가 연이어 사망하자, [[사도세자|세자]]는 이들의 상을 치르느라 건강이 손상되었을 뿐 아니라 왕실의 보호막이 사라짐에 따라 정치적으로도 매우 곤란에 빠졌다. 이 무렵 우물에 투신자살하는 소동을 벌인다든가 정신병 증세에 따라 심각한 과실을 저지르는 등 [[사도세자|세자]]는 자질 면에서 심각한 결격 사유를 노출하기 시작하였다. 이후로는 궁중 내 무함 세력의 술책으로 인하여 [[사도세자|세자]]가 [[조선 영조|영조]]를 알현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는 등 부자간은 더욱 소원해졌고, 그 틈을 타 각종 무함이 난무하는 등 사태는 점점 악화되었다. [[사도세자|세자]]도 이제는 난국을 타개하기에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너무 많았고, [[노론|노]]·[[소론]] 일부 대신들의 보호 노력만으로는 사태를 미봉하는 데에도 벅찬 상황이었다.<ref>최성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6535 임오화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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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1년(영조 37)에는 [[이천보|이천보(李天輔)]]·[[민백상|민백상(閔百祥)]]·[[이후|이후(李 玉+厚)]] 등 보호론계 주요 대신마저 연이어 사망하였고, [[사도세자|세자]]는 평양까지 미행(微行)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중대 과실을 범하는 등 사태는 총체적 난국으로 치달았다. [[조선 영조|영조]]는 이 모든 상황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결단의 방식을 궁리하였던 듯하다. 게다가 이제는 [[사도세자|세자]]의 아들인 [[조선 정조|세손]]이 장성해 있었고, 1762년(영조 38)에는 혼례까지 무사히 마친 상태였다. 이해 5월에 [[홍계희]]의 겸종(傔從) 출신인 [[나경언|나경언(羅景彦)]]이 [[사도세자|세자]]의 비행을 고발한 일을 계기로 하여, 결국에는 [[사도세자|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가 [[사도세자|세자]]의 심각한 병증과 예측 불가능한 변란 위험을 실토하게 되었다. 그러자 [[조선 영조|영조]]는 결국 윤5월에 [[사도세자|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화변(禍變)의 방식으로 [[사도세자|세자]]를 폐위하였다. 그 후에 [[조선 영조|영조]]는 [[사도세자|세자]]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장례를 직접 주관한 후, 그 아들인 [[조선 정조|세손]]에게 동궁(東宮)의 지위를 계승하도록 하였다.<ref>최성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6535 임오화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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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화변]]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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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화변]]은 대리청정 중인 [[사도세자|왕세자]]를 비상식적 방식으로 폐위한 사건이어서 당대에는 물론 오늘날까지 관심이 집중되었고, 이 사건을 해석하는 관점에 따라 새롭게 정파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더구나 [[조선 정조|정조]]는 [[임오화변]]에 대한 재평가를 탕평 정치의 핵심 과제로 삼기도 하였다. [[임오화변]]은 [[조선 영조|영조]]대 후반부터 [[조선 순조|순조]]대에 이르기까지 주요 정치적 쟁점을 이해하는데 핵심이 되는 사건이었다.<ref>최성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6535 임오화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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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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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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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식, 「사도세자의 대리청정」, 『문헌과 해석』, Vol.45, No.-, 태학사, 2008, 49-63쪽.
 +
**김영민, 「정조대 "임오화변" 논의의 전개와 사회적 반향」, 『朝鮮時代史學報』, Vol.40, No.-, 조선시대사학회, 2007, 281-319쪽.
 +
**김성윤, 「영조대 중반의 정국과 '임오화변' (임오화변(사도세자 폐사사건)의 발생원인에 대한 재검토를 중심으로)」, 『역사와 경계』, Vol.43, No.-, 부산경남사학회, 2002, 57-94쪽.
 +
 
 +
*웹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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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6535 임오화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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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한글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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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사건]]

2018년 3월 8일 (목) 16:11 기준 최신판

임오화변(壬午禍變)
대표명칭 임오화변
한자표기 壬午禍變
이칭 사도세자 사건
유형 사건
시대 조선시대
날짜 1762년 윤5월 13일-윤5월 21일
관련인물 조선 영조, 사도세자
관련유물유적 혜경궁 읍혈록


정의

1762년 조선 영조가 대리청정(代理聽政) 중인 왕세자를 폐위하고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건이다.

내용

임오화변의 배경

경종 대 이후 당쟁은 군주 혹은 예비 군주를 선택하는 상황과 결부되어 한층 파급력도 크고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영조는 이러한 국면을 타개하기 위하여 탕평책을 실시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세자와 갈등을 일으켜 임오화변이 발생하였다. 임오화변영조장헌세자의 성격적 갈등, 신임의리(辛壬義理)를 둘러싼 노·소론 당론의 대결 구도, 세자를 둘러싸고 궁중 세력과 연계된 당파 간 갈등 등 다양한 원인을 배경으로 한다.[1]

임오화변의 배경

세자가 대리청정을 맡은 이후 영조의 기대에 충실하게 부응하지 못하는 틈을 타서, 문녀(文女, 숙의 문씨)와 그 오빠 문성국(文聖國) 등 궁중 세력과 김상로(金尙魯)·홍계희(洪啓禧) 등 일부 노론 세력이 연합하여 세자의 지위를 흔들고자 각종 무함(誣陷)을 주도하였다.[2]

1757년 세자를 매우 아꼈던 조모 인원왕후(仁元王后)와 법모(法母)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연이어 사망하자, 세자는 이들의 상을 치르느라 건강이 손상되었을 뿐 아니라 왕실의 보호막이 사라짐에 따라 정치적으로도 매우 곤란한 처지에 빠졌다. 이 무렵 우물에 투신자살을 시도한다든가 정신병 증세에 따라 심각한 과실을 저지르는 등 자질 면에서 심각한 결격 사유를 노출하기 시작하였다. 궁중 내 무함 세력의 술책으로 세자영조를 알현하기도 어려워지는 등 부자간은 더욱 소원해졌고, 사태는 점점 악화되었다. [3]

1761년 이천보(李天輔)·민백상(閔百祥)·이후장헌세자을 옹호하던 주요 대신마저 연이어 사망하였다. 그 와중에 세자는 평양까지 미행(微行)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등 파행을 일삼았고, 사태는 총체적 난국으로 치달았다. 홍계희의 겸종(傔從) 출신인 나경언(羅景彦)세자의 비행을 고발한 일을 계기로 결국에는 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세자의 심각한 병증과 예측 불가능한 변란 위험을 실토하게 되었다. 그러자 영조는 결국 윤5월에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고 폐위하였다. 그 후에 영조세자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그 아들인 세손에게 동궁(東宮)의 지위를 계승하도록 하였다.[4]

지식 관계망

  • 혜경궁 읍혈록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임오화변 사도세자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임오화변 조선 영조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임오화변 노론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임오화변 서론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임오화변 문녀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임오화변 문성국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임오화변 김상로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임오화변 홍계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임오화변 나경언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사도세자 이천보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사도세자 민백상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사도세자 이후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조선 영조 영빈 이씨 A는 B의 남편이다 A ekc:hasWife B
조선 영조 사도세자 A는 B의 아버지이다 A ekc:hasSon B
영빈 이씨 사도세자 A는 B의 어머니이다 A ekc:hasSon B
사도세자 혜경궁 홍씨 A는 B의 남편이다 A ekc:hasWife B
사도세자 조선 정조 A는 B의 아버지이다 A ekc:hasSon B
혜경궁 홍씨 조선 정조 A는 B의 어머니이다 A ekc:hasSon B
지문 조선 정조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한중록 혜경궁 홍씨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지문 임오화변 A는 B를 언급하였다 A ekc:mentions B
한중록 임오화변 A는 B를 언급하였다 A ekc:mentions B
혜경궁 읍혈록 임오화변 A는 B를 언급하였다 A ekc:mentions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762년 윤5월 13일-윤5월 21일 임오화변이 일어났다

주석

  1. 최성환, "임오화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11월 7일.
  2. 최성환, "임오화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11월 7일.
  3. 최성환, "임오화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11월 7일.
  4. 최성환, "임오화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11월 7일.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김문식, 「사도세자의 대리청정」, 『문헌과 해석』, Vol.45, No.-, 태학사, 2008, 49-63쪽.
    • 김영민, 「정조대 "임오화변" 논의의 전개와 사회적 반향」, 『朝鮮時代史學報』, Vol.40, No.-, 조선시대사학회, 2007, 281-319쪽.
    • 김성윤, 「영조대 중반의 정국과 '임오화변' (임오화변(사도세자 폐사사건)의 발생원인에 대한 재검토를 중심으로)」, 『역사와 경계』, Vol.43, No.-, 부산경남사학회, 2002, 57-94쪽.
  • 웹자원
    • 최성환, "임오화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