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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인물_류인태 |이름 = 장계향 |한자명 = 張桂香 |호(號) = |성별 = 여성 |생년 = 1598 |몰년 = 1680 |본관 = 안동_장 |시대 = 조선 |이미지 출처 = |i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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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의'''== | ||
+ | 1598년-1680년 최초 한글 요리서 [[음식디미방]] 저술한 조선시대 여성이다. 조선중후기 이름 높은 성리학자였던 [[장흠효|장흥효(張興孝)]]의 딸이며 이름 높은 성리학자였던 [[이현일|이현일(李玄逸)]]의 어머니이다. | ||
+ | =='''내용'''== | ||
+ | ===[[장계향]]의 집안에 대해서=== | ||
+ | 정부인 안동장씨는 [[노량해전]]을 대미로 7년간에 걸친 대전쟁, [[임진왜란]]이 막 끝나가던 1598년 11월, 아버지 경당 [[장흥효|장흥효(1564~1633)]]와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의 외동딸로 안동 검재(금계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학봉 [[김성일]]의 문인으로 당대 학자로 인정받았으며, 많은 제자들이 그의 집을 드나들었다. 그러한 집안 분위기 때문에 [[장계향]]은 어릴때 사랑방을 기웃거리면서 아버지의 가르침을 곁눈으로 배웠다. 아버지는 퇴계 학풍을 이어 받은 학자답게 '몸을 삼가고', '항상 공경하는 자세'를 제자들에게 강조했다. 총기 있던 소녀는 10세 정도 되는 나이에 『[[소학]]』과 『[[십구사략]]』을 깨쳤고, 13세가 되어서는 「[[백발 늙은이]]」, 「[[몸가짐을 조심하다]]」, 「[[소소한 빗소리]]」와 같은 주옥같은 시들을 지었다.글씨도 곧잘 써서 그녀가 쓴 초서체 '[[적벽부]]'는 당대 서예가 [[정윤목]]이 기풍과 필체가 호기로워 우리나라 사람의 글씨와는 다르다"고 평할 정도였다.<ref>"[http://www.janggyehyang.or.kr/bbs/content.php?co_id=jlife1&mcode=20&smcode=2010 정부인 장계향]", 장계향의 생애와 업적, <html><online style="color:purple">『장계향(깨달은 조선 여인)』<sup>online</sup></online></html>, 문화관광부.</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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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질고 현명한 어머니인 [[장계향]]=== | ||
+ | 나이 19세 되던 1617년 영해 나랏골에 살던 [[재령 이씨]] 가문의 [[이시명]]과 결혼했다. 남편은 이미 [[광산김씨]]와 결혼해서 1남 1녀를 둔 27세 청장년이었다. 남편과는 여덟 살 차이, 게다가 계실로 들어간 자리였으니 새색시로서는 만만찮은 환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색시는 전부인 소생 6살배기 상일의 자식 공부를 위해 어린 [[이상일|상일]]을 남쪽으로 5리 남짓 떨어진 [[남경훈]] 선생 집으로 매일 같이 업고 다니는 열의를 보였다. 새 며느리를 지켜보던 시아버지 [[이함]]은 동리 이웃들에게 자랑스럽게 며느리 얘기를 했다."저 어미 잃은 아이는 어미를 잃은 것이 아니고 죽은 어미가 살어온 것이다" 이후 그녀는 6남 2녀를 낳아 모두 훌륭하게 키웠다. 태기가 있는 동안 그녀는 과일, 채소와 같은 하찮은 물건일지라도 모양과 빛깔이 온전하지 않거나 바르지 않은 것은 입도 대지 않았다.이런 정성으로 그녀는 전부인과 자신의 소생 7남 3녀를 모두 한결같이 훌륭한 인물로 키웠다. 그중에서도 둘째 [[이휘일|휘일]], 셋째 [[이현일|현일]], 넷째 [[이승일|승일]]은 경상도를 대표하는 학자로 명성을 날렸으며, 그의 손자 [[이온]], [[이재]], 외손자 [[이상정]] 또한 문명이 높았다.<ref>"[http://www.janggyehyang.or.kr/bbs/content.php?co_id=jlife1&mcode=20&smcode=2010 정부인 장계향]", 장계향의 생애와 업적, <html><online style="color:purple">『장계향(깨달은 조선 여인)』<sup>online</sup></online></html>, 문화관광부.</ref> | ||
+ | ===[[장계향]]의 자식 교육법=== | ||
+ | 그리고 아버지 살아 계실 때, 아들 [[이상일|상일]], [[이휘일|휘일]], [[이현일|현일]] 삼형제를 외조부에게 보내어 학문을 익히도록 했다. 이러한 어머니의 배려로 슬하의 아들 7형제 모두가 문명으로 현달해, '안릉가 7룡'으로 알려졌다. 특히 셋째 갈암 [[이현일|이현일(1627~1704)]]은 영남을 대표하는 산림으로 천거되어, 1692년(숙종 18) 이조판서를 역임했으며, [[남인]]과 [[서인]]의 정쟁이 한창이었던 현종-숙종 연간(17세기 중후반)에는 남인의 영수로서 크게 활약한 바 있다. [[이현일]] 대에 이르러 [[재령 이씨]]의 명성이 세상에 알려지자, 그녀는 자식들이 자만에 빠져 혹여 행신을 그르치지 않을까 늘 근심했다."너희들이 비록 글 잘 한다는 명성은 있지만, 나는 귀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한가지 선생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나는 문득 기뻐하며 잊지 않고 있을 따름이다"며 늘 자식들의 방만과 나태를 경계했다.<ref>"[http://www.janggyehyang.or.kr/bbs/content.php?co_id=jlife1&mcode=20&smcode=2010 정부인 장계향]", 장계향의 생애와 업적, <html><online style="color:purple">『장계향(깨달은 조선 여인)』<sup>online</sup></online></html>, 문화관광부.</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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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계향]] 최초의 한글 요리서 [[음식디미방]]을 저술하다=== | ||
+ | 나이 일흔 무렵에는 눈이 어두운 가운데서도 자손들을 위해 애써 음식하는 법을 정리하여 남겼다.[[음식디미방]]이라고도 하고 [[음식디미방|규곤시의방]]이라고도 불리는 요리책으로, 오늘날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로 기록된 요리서이자 아시아에서 여성에 의해 쓰여진 가장 오래된 조리책으로 주목받고 있다.<ref>"[http://www.janggyehyang.or.kr/bbs/content.php?co_id=jlife1&mcode=20&smcode=2010 정부인 장계향]", 장계향의 생애와 업적, <html><online style="color:purple">『장계향(깨달은 조선 여인)』<sup>online</sup></online></html>, 문화관광부.</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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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글팀 음식디미방01 음식디미방.jpg |음식디미방 | ||
+ | </gallery> | ||
+ | ===영상=== | ||
+ | *강병규, "[오래된 약속 73편 여중군자 장계향 https://www.youtube.com/watch?v=zGWLEQkDgOs]", ''YOUTUBE'', 작성일:2016년 08월 01일. | ||
+ | <html><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zGWLEQkDgOs"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html>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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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석'''== | ||
+ | <references/> | ||
+ | |||
+ | =='''참고문헌'''== | ||
+ | ===더 읽을 거리=== | ||
+ | *논문 | ||
+ | **배영동, 「<음식디미방> 저자 실명 '장계향(張桂香)'의 고증과 의의」, 『실천민속학연구』, Vol 19, 2012, 163-186쪽. | ||
+ | **이난수, 「고(古)조리서로 본 여성의 살림정신( <음식디미방>과 <규합총서(閨閤叢書)>를 중심으로)」, 『효학연구』, Vol 25, 2017, 25-56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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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용한 정보=== | ||
+ | *"[http://www.janggyehyang.or.kr/bbs/content.php?co_id=jlife1&mcode=20&smcode=2010 정부인 장계향]", 장계향의 생애와 업적, <html><online style="color:purple">『장계향(깨달은 조선 여인)』<sup>online</sup></online></html>, 문화관광부. | ||
+ | *장진영, "[http://www.k-heritage.tv/brd/board/275/L/CATEGORY/328/menu/254?brdCodeField=CATEGORY&brdCodeValue=328&bbIdx=3471&brdType=R 학발첩]", 기획기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채널』<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문화재재단, 작성일: 2012년 11월 29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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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중군자(女中君子)'라는 호칭으로 불려지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신사임당]]과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현모양처]]의 표본으로 여겨진다. | '여중군자(女中君子)'라는 호칭으로 불려지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신사임당]]과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현모양처]]의 표본으로 여겨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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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구, “「선택」의 장씨부인 실제는 성인 꿈꿔,” 「중앙선데이」(2007.5.13). | *이순구, “「선택」의 장씨부인 실제는 성인 꿈꿔,” 「중앙선데이」(2007.5.13). | ||
*정라곤, “후세에 빛나는 여중군자, 장계향,” 「울진타임즈」(2009.3.25). | *정라곤, “후세에 빛나는 여중군자, 장계향,” 「울진타임즈」(2009.3.2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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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초상화]] [[분류:한글고문서_인물기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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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7일 (월) 23:05 기준 최신판
장계향(張桂香) | |
대표명칭 | 장계향 |
---|---|
한자표기 | 張桂香 |
생몰년 | 1598년-1680년 |
본관 | 안동 장씨 |
출생지 | 안동 검재 |
시대 | 조선시대 |
국적 | 조선 |
대표저서 | 음식디미방 |
부 | 장흥효(張興孝) |
자녀 | 이현일(李玄逸) |
목차
정의
1598년-1680년 최초 한글 요리서 음식디미방 저술한 조선시대 여성이다. 조선중후기 이름 높은 성리학자였던 장흥효(張興孝)의 딸이며 이름 높은 성리학자였던 이현일(李玄逸)의 어머니이다.
내용
장계향의 집안에 대해서
정부인 안동장씨는 노량해전을 대미로 7년간에 걸친 대전쟁, 임진왜란이 막 끝나가던 1598년 11월, 아버지 경당 장흥효(1564~1633)와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의 외동딸로 안동 검재(금계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학봉 김성일의 문인으로 당대 학자로 인정받았으며, 많은 제자들이 그의 집을 드나들었다. 그러한 집안 분위기 때문에 장계향은 어릴때 사랑방을 기웃거리면서 아버지의 가르침을 곁눈으로 배웠다. 아버지는 퇴계 학풍을 이어 받은 학자답게 '몸을 삼가고', '항상 공경하는 자세'를 제자들에게 강조했다. 총기 있던 소녀는 10세 정도 되는 나이에 『소학』과 『십구사략』을 깨쳤고, 13세가 되어서는 「백발 늙은이」, 「몸가짐을 조심하다」, 「소소한 빗소리」와 같은 주옥같은 시들을 지었다.글씨도 곧잘 써서 그녀가 쓴 초서체 '적벽부'는 당대 서예가 정윤목이 기풍과 필체가 호기로워 우리나라 사람의 글씨와는 다르다"고 평할 정도였다.[1]
어질고 현명한 어머니인 장계향
나이 19세 되던 1617년 영해 나랏골에 살던 재령 이씨 가문의 이시명과 결혼했다. 남편은 이미 광산김씨와 결혼해서 1남 1녀를 둔 27세 청장년이었다. 남편과는 여덟 살 차이, 게다가 계실로 들어간 자리였으니 새색시로서는 만만찮은 환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색시는 전부인 소생 6살배기 상일의 자식 공부를 위해 어린 상일을 남쪽으로 5리 남짓 떨어진 남경훈 선생 집으로 매일 같이 업고 다니는 열의를 보였다. 새 며느리를 지켜보던 시아버지 이함은 동리 이웃들에게 자랑스럽게 며느리 얘기를 했다."저 어미 잃은 아이는 어미를 잃은 것이 아니고 죽은 어미가 살어온 것이다" 이후 그녀는 6남 2녀를 낳아 모두 훌륭하게 키웠다. 태기가 있는 동안 그녀는 과일, 채소와 같은 하찮은 물건일지라도 모양과 빛깔이 온전하지 않거나 바르지 않은 것은 입도 대지 않았다.이런 정성으로 그녀는 전부인과 자신의 소생 7남 3녀를 모두 한결같이 훌륭한 인물로 키웠다. 그중에서도 둘째 휘일, 셋째 현일, 넷째 승일은 경상도를 대표하는 학자로 명성을 날렸으며, 그의 손자 이온, 이재, 외손자 이상정 또한 문명이 높았다.[2]
장계향의 자식 교육법
그리고 아버지 살아 계실 때, 아들 상일, 휘일, 현일 삼형제를 외조부에게 보내어 학문을 익히도록 했다. 이러한 어머니의 배려로 슬하의 아들 7형제 모두가 문명으로 현달해, '안릉가 7룡'으로 알려졌다. 특히 셋째 갈암 이현일(1627~1704)은 영남을 대표하는 산림으로 천거되어, 1692년(숙종 18) 이조판서를 역임했으며, 남인과 서인의 정쟁이 한창이었던 현종-숙종 연간(17세기 중후반)에는 남인의 영수로서 크게 활약한 바 있다. 이현일 대에 이르러 재령 이씨의 명성이 세상에 알려지자, 그녀는 자식들이 자만에 빠져 혹여 행신을 그르치지 않을까 늘 근심했다."너희들이 비록 글 잘 한다는 명성은 있지만, 나는 귀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한가지 선생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나는 문득 기뻐하며 잊지 않고 있을 따름이다"며 늘 자식들의 방만과 나태를 경계했다.[3]
장계향 최초의 한글 요리서 음식디미방을 저술하다
나이 일흔 무렵에는 눈이 어두운 가운데서도 자손들을 위해 애써 음식하는 법을 정리하여 남겼다.음식디미방이라고도 하고 규곤시의방이라고도 불리는 요리책으로, 오늘날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로 기록된 요리서이자 아시아에서 여성에 의해 쓰여진 가장 오래된 조리책으로 주목받고 있다.[4]
지식 관계망
- 장계향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장흠효 | 장계향 | A는 B의 아버지다 | |
이시명 | 장계향 | A는 B의 남편이다 | |
광산김씨 | 이시명 | A는 B의 부인이다 | |
장계향 | 이시명 | A는 B의 부인이다 | |
이함 | 이시명 | A는 B의 아버지다 | |
광산김씨 | 이상일 | A는 B의 어머니다 | |
장계향 | 이휘일 | A는 B의 어머니다 | |
장계향 | 이현일 | A는 B의 어머니다 | |
장계향 | 이승일 | A는 B의 어머니다 | |
이온 | 장계향 | A는 B의 손자이다 | |
이재 | 장계향 | A는 B의 손자이다 | |
이상정 | 장계향 | A는 B의 손자이다 | |
장계향 | 음식다미망 | A는 B를 저술하였다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670년 | 음식디미방이 간행되었다 |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 강병규, "[오래된 약속 73편 여중군자 장계향 https://www.youtube.com/watch?v=zGWLEQkDgOs]", YOUTUBE, 작성일:2016년 08월 01일.
주석
- ↑ "정부인 장계향", 장계향의 생애와 업적,
『장계향(깨달은 조선 여인)』online , 문화관광부. - ↑ "정부인 장계향", 장계향의 생애와 업적,
『장계향(깨달은 조선 여인)』online , 문화관광부. - ↑ "정부인 장계향", 장계향의 생애와 업적,
『장계향(깨달은 조선 여인)』online , 문화관광부. - ↑ "정부인 장계향", 장계향의 생애와 업적,
『장계향(깨달은 조선 여인)』online , 문화관광부.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배영동, 「<음식디미방> 저자 실명 '장계향(張桂香)'의 고증과 의의」, 『실천민속학연구』, Vol 19, 2012, 163-186쪽.
- 이난수, 「고(古)조리서로 본 여성의 살림정신( <음식디미방>과 <규합총서(閨閤叢書)>를 중심으로)」, 『효학연구』, Vol 25, 2017, 25-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