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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795년(정조 19) 1월에 [[정조|정조(正祖)]]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는 행사로 ‘휘목(徽穆)’이라는 존호를 올리고 윤 2월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현륭원(顯隆園)]]을 참배하는 행사를 벌였다. 이번 참배는 단순한 참배가 아니라 정조가 은퇴한 후 [[혜경궁 홍씨]]와 함께 거처할 도시로 건설하고 있는 [[화성]]을 시찰하고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를 베풀기 위한 것이었다. 아울러 [[화성]]건설에 힘을 쓴 주민들을 위로하며, 문무과 별시를 치르고, [[화성]]에 설치한 [[장용영|장용영(壯勇營)]] 부대의 전투 능력을 시험하는 등 여러 행사를 복합적으로 기획한 것이어서 지금까지 없었던 최대의 야외행사를 벌였다. 이 행사를 위해 화성으로 가는 신작로(시흥로)와 24개의 다리를 건설하고 한강에 처음으로 배다리[舟橋]를 가설하였다. 이 행차는 수천 명의 백관들과 200리의 길을 떠나는 것으로 1년 전부터 [[정리소|정리소(整理所)]]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치밀하게 준비하였다.<ref>한영우, 『조선왕조 의궤-국가의례와 그 기록』, 일지사, 2005, 410쪽.</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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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차는 윤2월 9일에 출발했는데, 2월로 잡은 이유는 농번기를 피하는 관례를 따른 것이다. 아침 7시경에 [[창덕궁 돈화문]]을 나선 행차는 광통교(廣通橋)를 건너 [[숭례문]]을 지나 용산으로 향했다. 여기서 배다리를 건너 노량에 있는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에 도달했다. 배다리는 400여 척의 배를 연결하여 임시 다리를 놓아 한강을 건너는 것이다. 이 때 동원되는 민간배들의 피해가 커서 [[정조]]는 민간의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여 배다리를 창안하였다. 배다리 만드는 법은 [[주교지남|주교지남(舟橋指南)]]과 [[원행을묘정리의궤]]에 자세히 나와있다. 노량에서 간단히 아침간식을 들고 장승배기로 돌아 대방동을 거쳐 [[시흥행궁]]에 다다랐다. 여기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인 2월 10일에 안양을 거쳐 저녁에 [[수원화성]]의 행궁에 도착하였다. 행차를 직접 따라간 인원은 약 1,600명이었고, 말은 800필이었으나 주변에서 [[왕]]을 호위하는 군사들과 매복 군인, 화성에 미리 내려간 인원을 합치면 약 6천명이 동원되었다.<ref>한영우, 『조선왕조 의궤-국가의례와 그 기록』, 일지사, 2005, 410~411쪽.</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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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성 행궁에서의 일정'''<br/> | ||
+ | [[화성행궁]]에서 하룻밤을 묵은 [[정조]]는 다음 날인 윤2월 11일부터 공식일정에 들어갔다. 아침에는 [[화성향교|화성향교(華城鄕校)]]를 방문하여 [[공자사당]]에 참배하고 [[낙남헌|낙남헌(洛南軒)]]에 나아가 수원 유생들과 화성을 지키는 [[장용영|장용영(壯勇營)]] 병사들을 대상으로 문무과 별시를 거행하였다. 다음날인 윤2월 12일에는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현륭원]]에 가서 참배하였다. 묘소를 옮긴 후 처음으로 와본 남편의 묘소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무덤 앞에서 통곡했다고 한다. [[정조]]는 오후에 새로 건설한 화성 성곽의 방어와 공격을 시험하기 위해 5천 명의 [[장용영]] 장병들을 나누어 실전에 가까운 훈련을 실시하고, 야간에 또 한차례 거행하였다. 다음 날인 윤2월 13일에는 [[봉수당|봉수당(奉壽堂)]]에서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를 열었다. 이 잔치에는 [[혜경궁 홍씨]]의 친척들이 초대되어 일곱 차례 잔을 올리고 그때마다 음악과 춤이 공연되었다. 다음 날인 윤2월 14일에는 [[화성]] 주민을 위한 행사가 이어졌다. 새벽에 [[정조]]는 행궁의 정문인 [[신풍루|신풍루(新豊樓)]]에 나아가 홀아비, 과부, 고아, 독자 등과 가난한 주민들에게 쌀과 소금을 나눠주었다. 다음으로 61세 일반 노인과 70세 이상의 관리, 80세 이상의 사서인(士庶人) 384명을 초대해 [[연향례]]를 베풀었다. 이들에게는 술과 음식과 비단, 노란 손수건을 매단 지팡이가 제공되었다. 양로연(養老宴)을 끝으로 화성에서의 공식일정이 끝났다.<ref>한영우, 『조선왕조 의궤-국가의례와 그 기록』, 일지사, 2005, 411~431쪽.</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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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성 완공 경축 행사'''<br/> | ||
+ | 일정을 마친 [[정조]]는 완공되어가는 [[화성]]을 둘러보았다. 그날 저녁 [[득중정|득중정(得中亭)]]에서 대신들과 함께 야간 활쏘기를 하고 땅에 화약을 묻어두었다가 터뜨리는 매화포(埋火砲)를 터뜨려 이 행사를 축복하였다. [[화성]]은 중국의 벽돌성곽과 우리나라의 돌성곽 제도의 장점을 합쳐 건설했는데, [[정약용]]이 설계한 [[거중기]] 등의 도구들이 투입되어 공사 기간을 단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다음날인 윤2월 18일 귀경길에 올라, 갈 때 구간 그대로 돌아와 시흥행궁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날 서울로 돌아옴으로써 8일간의 행차가 비로소 막을 내렸다. 한강에 놓았던 배다리는 다음날 해체되고 배는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8일간의 행차를 마치고 [[정리소]]에서 과정을 정리한 의궤를 편찬하였다. 이 [[의궤]]는 [[정리소]]에서 새로 주조한 금속활자인 [[정리자|정리자(整理字)]]로 인쇄했는데, [[의궤]]를 활자로 찍은 경우는 이 때가 처음이다. [[정조]]는 이 [[의궤]]를 대량으로 제작하여 행사에 참여한 [[백관]]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 [[의궤]]는 분량면에서도 방대해 모두 8책으로 내용이 상세하고 체제가 잘 정비되어 있다. 또한 수백 쪽에 달하는 도설이 실려 있으며, [[김홍도|김홍도(金弘道)]]를 비롯한 당대의 최고 화원들이 그린 63쪽의 행행[[반차도]]를 비롯하여 [[화성]]에서 행한 여러 행사를 그린 그림들이 실려 있다. 다만 활자본이기 때문에 의궤에서는 흑백으로 처리되었으나, 당대의 최고 화원들을 동원하여 색상이 있는 [[화성능행도병]]을 별도로 제작하였다.<ref>한영우, 『조선왕조 의궤-국가의례와 그 기록』, 일지사, 2005, 431~433쪽.</ref> | ||
− | + | ===목록=== | |
− | + | 제1책: 택일(擇日), 좌목(座目), 도식(圖式)<br/> | |
− | + | 제2책: 전교(傳敎), 연설(筵說), 악장(樂章), 치사(致詞), 어제(御製), 어사(御射), 전령(傳令), 군령(軍令)<br/> | |
− | + | 제3책: 의주(儀註, 附操式), 절목(節目), 계사(啓辭)<br/> | |
− | + | 제4책: 계목(啓目), 장계(狀啓), 이문(移文), 내관(來關), 수본(手本), 감결(甘結)<br/> | |
− | + | 제5책: 찬품(饌品), 채화(綵花), 기용(器用), 배설(排設), 의장(儀仗), 반전(盤纏), 장표(掌標), 가교(駕轎), 주교(舟橋), 사복정례(司僕定例)<br/> | |
− | + | 제6책: 내외빈(內外賓), 참연로인(參宴老人), 배종(陪從), 유도(留都, 附守宮留陣留營留駐), 공령(工伶), 당마(塘馬, 附斥候伏兵), 방목(榜目), 상전(賞典), 재용(財用)<br/> | |
− | + | 제7책: 탄진경하(誕辰慶賀)<br/> | |
− | + | 제8책: 영흥본궁제향(永興本宮躋享), 온궁기적(溫宮紀蹟)<br/> | |
− | + | ===해제=== | |
− | + | 김선경, [http://kyujanggak.snu.ac.kr/center/inspection/ins_viewDetail.jsp?setid=131053&pos=0&total_df=1&uci=GK14532_00&c1=&c2=&c3=&sType=&sWord=%EC%9B%90%ED%96%89%EC%9D%84%EB%AC%98%EC%A0%95%EB%A6%AC%EC%9D%98%EA%B6%A4&chung=%E5%A5%8E+14532&writedata=1796 원행을묘정리의궤]", 의궤 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의궤 종합정보』<sup>online</sup></online></html>,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
− | + | ===판본=== | |
− | +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奎 14518), (奎 14519), (奎 14520), (奎 14521), (奎 14522), (奎 14524), (奎 14525), (奎 14526), (奎 14527), (奎 14528-1), (奎 14528-2), (奎 14529), (奎 14530), (奎 14531-1), (奎 14531-2), (奎 14533), (奎 14534)<br/> | |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K2-2897), (K2-2898)<br/> | ||
+ | 일본 [[궁내청]]: (306-4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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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용 및 참조=== | ||
+ | * 김문식, 신병주 저, 『조선 왕실기록문화의 꽃 의궤』, 돌베개, 2005. | ||
+ | * 김준,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 여유당, 2008. | ||
+ | * 서울대학교 규장각, 『규장각소장 분류별의궤해설집』,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5. | ||
+ | * 서울대학교 규장각, 『규장각소장 의궤 해제집(3)』,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5. | ||
+ | * 신명호, 『조선 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문화』, 돌베개, 2002. | ||
+ | * 한영우, 『정조대왕 화성능행 반차도』, 효형출판, 2000. | ||
+ | * 한영우,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 효형출판, 1998. | ||
+ | * 한영우, 『정조의 화성행차』, 효형출판, 2007. | ||
+ | * 한영우, 『조선왕조 의궤-국가의례와 그 기록』, 일지사, 2005. | ||
− | [[분류:궁중기록화]] [[분류:의궤]] | + | [[분류:궁중기록화]] |
+ | [[분류:의궤]] |
2017년 12월 15일 (금) 22:36 기준 최신판
원행을묘정리의궤 (園幸乙卯整理儀軌) |
|
대표명칭 | 원행을묘정리의궤 |
---|---|
한자표기 | 園幸乙卯整理儀軌 |
주제 | 가례(嘉禮) |
작성주체 | 정리소(整理所) |
의례담당자 | 채제공(蔡濟恭) |
작성지역 | 한성부 |
작성시기 | 1796년(정조 20) |
소장처(원소장처) | 규장각한국학연구원(규장각) |
판본 | 필사본 |
표기문자 | 한자, 이두 |
수량 | 총 8책 634장(제1책 62장, 제2책 77장, 제3책 92장, 제4책 76장, 제5책 82장, 제6책 81장, 제7책 89장, 제8책 75장) |
크기 | 35.1×22.5 |
도설 | 49면(제1책) |
반차도 | 63면(제1책) 총 길이: 약 1,449㎝ |
목차
정의
1795년(정조 9)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을 참배하고, 화성행궁에 행차해 어머니의 회갑연을 치른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1]
내용
1년 전부터 준비한 화성 행차
1795년(정조 19) 1월에 정조(正祖)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는 행사로 ‘휘목(徽穆)’이라는 존호를 올리고 윤 2월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顯隆園)을 참배하는 행사를 벌였다. 이번 참배는 단순한 참배가 아니라 정조가 은퇴한 후 혜경궁 홍씨와 함께 거처할 도시로 건설하고 있는 화성을 시찰하고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를 베풀기 위한 것이었다. 아울러 화성건설에 힘을 쓴 주민들을 위로하며, 문무과 별시를 치르고, 화성에 설치한 장용영(壯勇營) 부대의 전투 능력을 시험하는 등 여러 행사를 복합적으로 기획한 것이어서 지금까지 없었던 최대의 야외행사를 벌였다. 이 행사를 위해 화성으로 가는 신작로(시흥로)와 24개의 다리를 건설하고 한강에 처음으로 배다리[舟橋]를 가설하였다. 이 행차는 수천 명의 백관들과 200리의 길을 떠나는 것으로 1년 전부터 정리소(整理所)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치밀하게 준비하였다.[2]
화성 행궁에 도착하기까지
행차는 윤2월 9일에 출발했는데, 2월로 잡은 이유는 농번기를 피하는 관례를 따른 것이다. 아침 7시경에 창덕궁 돈화문을 나선 행차는 광통교(廣通橋)를 건너 숭례문을 지나 용산으로 향했다. 여기서 배다리를 건너 노량에 있는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에 도달했다. 배다리는 400여 척의 배를 연결하여 임시 다리를 놓아 한강을 건너는 것이다. 이 때 동원되는 민간배들의 피해가 커서 정조는 민간의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여 배다리를 창안하였다. 배다리 만드는 법은 주교지남(舟橋指南)과 원행을묘정리의궤에 자세히 나와있다. 노량에서 간단히 아침간식을 들고 장승배기로 돌아 대방동을 거쳐 시흥행궁에 다다랐다. 여기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인 2월 10일에 안양을 거쳐 저녁에 수원화성의 행궁에 도착하였다. 행차를 직접 따라간 인원은 약 1,600명이었고, 말은 800필이었으나 주변에서 왕을 호위하는 군사들과 매복 군인, 화성에 미리 내려간 인원을 합치면 약 6천명이 동원되었다.[3]
화성 행궁에서의 일정
화성행궁에서 하룻밤을 묵은 정조는 다음 날인 윤2월 11일부터 공식일정에 들어갔다. 아침에는 화성향교(華城鄕校)를 방문하여 공자사당에 참배하고 낙남헌(洛南軒)에 나아가 수원 유생들과 화성을 지키는 장용영(壯勇營) 병사들을 대상으로 문무과 별시를 거행하였다. 다음날인 윤2월 12일에는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현륭원에 가서 참배하였다. 묘소를 옮긴 후 처음으로 와본 남편의 묘소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무덤 앞에서 통곡했다고 한다. 정조는 오후에 새로 건설한 화성 성곽의 방어와 공격을 시험하기 위해 5천 명의 장용영 장병들을 나누어 실전에 가까운 훈련을 실시하고, 야간에 또 한차례 거행하였다. 다음 날인 윤2월 13일에는 봉수당(奉壽堂)에서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를 열었다. 이 잔치에는 혜경궁 홍씨의 친척들이 초대되어 일곱 차례 잔을 올리고 그때마다 음악과 춤이 공연되었다. 다음 날인 윤2월 14일에는 화성 주민을 위한 행사가 이어졌다. 새벽에 정조는 행궁의 정문인 신풍루(新豊樓)에 나아가 홀아비, 과부, 고아, 독자 등과 가난한 주민들에게 쌀과 소금을 나눠주었다. 다음으로 61세 일반 노인과 70세 이상의 관리, 80세 이상의 사서인(士庶人) 384명을 초대해 연향례를 베풀었다. 이들에게는 술과 음식과 비단, 노란 손수건을 매단 지팡이가 제공되었다. 양로연(養老宴)을 끝으로 화성에서의 공식일정이 끝났다.[4]
화성 완공 경축 행사
일정을 마친 정조는 완공되어가는 화성을 둘러보았다. 그날 저녁 득중정(得中亭)에서 대신들과 함께 야간 활쏘기를 하고 땅에 화약을 묻어두었다가 터뜨리는 매화포(埋火砲)를 터뜨려 이 행사를 축복하였다. 화성은 중국의 벽돌성곽과 우리나라의 돌성곽 제도의 장점을 합쳐 건설했는데, 정약용이 설계한 거중기 등의 도구들이 투입되어 공사 기간을 단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다음날인 윤2월 18일 귀경길에 올라, 갈 때 구간 그대로 돌아와 시흥행궁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날 서울로 돌아옴으로써 8일간의 행차가 비로소 막을 내렸다. 한강에 놓았던 배다리는 다음날 해체되고 배는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8일간의 행차를 마치고 정리소에서 과정을 정리한 의궤를 편찬하였다. 이 의궤는 정리소에서 새로 주조한 금속활자인 정리자(整理字)로 인쇄했는데, 의궤를 활자로 찍은 경우는 이 때가 처음이다. 정조는 이 의궤를 대량으로 제작하여 행사에 참여한 백관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 의궤는 분량면에서도 방대해 모두 8책으로 내용이 상세하고 체제가 잘 정비되어 있다. 또한 수백 쪽에 달하는 도설이 실려 있으며, 김홍도(金弘道)를 비롯한 당대의 최고 화원들이 그린 63쪽의 행행반차도를 비롯하여 화성에서 행한 여러 행사를 그린 그림들이 실려 있다. 다만 활자본이기 때문에 의궤에서는 흑백으로 처리되었으나, 당대의 최고 화원들을 동원하여 색상이 있는 화성능행도병을 별도로 제작하였다.[5]
목록
제1책: 택일(擇日), 좌목(座目), 도식(圖式)
제2책: 전교(傳敎), 연설(筵說), 악장(樂章), 치사(致詞), 어제(御製), 어사(御射), 전령(傳令), 군령(軍令)
제3책: 의주(儀註, 附操式), 절목(節目), 계사(啓辭)
제4책: 계목(啓目), 장계(狀啓), 이문(移文), 내관(來關), 수본(手本), 감결(甘結)
제5책: 찬품(饌品), 채화(綵花), 기용(器用), 배설(排設), 의장(儀仗), 반전(盤纏), 장표(掌標), 가교(駕轎), 주교(舟橋), 사복정례(司僕定例)
제6책: 내외빈(內外賓), 참연로인(參宴老人), 배종(陪從), 유도(留都, 附守宮留陣留營留駐), 공령(工伶), 당마(塘馬, 附斥候伏兵), 방목(榜目), 상전(賞典), 재용(財用)
제7책: 탄진경하(誕辰慶賀)
제8책: 영흥본궁제향(永興本宮躋享), 온궁기적(溫宮紀蹟)
해제
김선경, 원행을묘정리의궤", 의궤 검색,
판본
규장각한국학연구원: (奎 14518), (奎 14519), (奎 14520), (奎 14521), (奎 14522), (奎 14524), (奎 14525), (奎 14526), (奎 14527), (奎 14528-1), (奎 14528-2), (奎 14529), (奎 14530), (奎 14531-1), (奎 14531-2), (奎 14533), (奎 14534)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K2-2897), (K2-2898)
일본 궁내청: (306-41)
연계 자원 보러 가기 |
• 회화 화성능행도병(華城陵幸圖屛) |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원행을묘정리의궤 | 정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원행을묘정리의궤 | 혜경궁 홍씨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원행을묘정리의궤 | 사도세자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원행을묘정리의궤 | 화성능행도병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원행을묘정리의궤 | 행행례 | A는 B를 기록하였다 | A ekc:documents B |
원행을묘정리의궤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원행을묘정리의궤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시간정보
시간 | 내용 |
---|---|
1795년 윤2월 11일 | 정조가 화성향교를 방문했다 |
1795년 윤2월 12일 | 정조가 문무과 별시를 거행하였다 |
1795년 윤2월 12일 | 정조와 혜경궁 홍씨가 헌륭원에 참배하였다 |
1795년 윤2월 13일 |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치러졌다 |
1795년 윤2월 14일 | 정조가 양로연을 베풀었다 |
1743년 | 『원행을묘정리의궤』가 편찬되었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7.281947 | 127.013019 | 사적 제478호인 봉수당(奉壽堂)에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치러졌다 |
시각자료
가상현실
주석
- ↑ 김문식, 「조선 최대의 축제, 을묘년 정조의 수원행차」, 『정조의 8일간의 수원행차』, 수원화성박물관, 2015, 9쪽.
- ↑ 한영우, 『조선왕조 의궤-국가의례와 그 기록』, 일지사, 2005, 410쪽.
- ↑ 한영우, 『조선왕조 의궤-국가의례와 그 기록』, 일지사, 2005, 410~411쪽.
- ↑ 한영우, 『조선왕조 의궤-국가의례와 그 기록』, 일지사, 2005, 411~431쪽.
- ↑ 한영우, 『조선왕조 의궤-국가의례와 그 기록』, 일지사, 2005, 431~433쪽.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김문식, 신병주 저, 『조선 왕실기록문화의 꽃 의궤』, 돌베개, 2005.
- 김준,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 여유당, 2008.
- 서울대학교 규장각, 『규장각소장 분류별의궤해설집』,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5.
- 서울대학교 규장각, 『규장각소장 의궤 해제집(3)』,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5.
- 신명호, 『조선 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문화』, 돌베개, 2002.
- 한영우, 『정조대왕 화성능행 반차도』, 효형출판, 2000.
- 한영우,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 효형출판, 1998.
- 한영우, 『정조의 화성행차』, 효형출판, 2007.
- 한영우, 『조선왕조 의궤-국가의례와 그 기록』, 일지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