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동화 무효에 관한 고시"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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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항 이후 급진적으로 변천하는 근대화의 물결은 화폐제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당오전]](當五錢) 발행으로 인한 환란을 계기로 화폐제도 개혁의 움직임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1894년(고종 31) [[은본위제]]가 도입되었으나 본위 화폐의 주조는 미미하고 보조화폐인 2전 5푼의 [[백동화]]가 남발되었다. 2전 5푼의 [[백동화]]는 [[전환국]]에서 주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민간인도 면허세를 납부하면 주조할 수 있도록 했으며 황실의 수입을 위해 일부 특정인에게도 주조를 허용하였다. 또한 일본인들에 의한 불법 주조와 밀수입도 성행하였다. 이와 같이 남발된 [[백동화]]로 인해 1900년부터 1905년까지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여 국민 생활은 도탄에 빠지고 상거래는 마비 상태에 이르렀다. 이로써 시중에서는 [[백동화]]로는 거래가 되지 않았고 임금도 [[백동화]]로는 받지 않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 1898년 6월 [[독립협회]]는 보조화폐의 유통을 중단하도록 항의했고 1902년 3월에는 각국 공사들이 결의하여 ‘백동화 주조의 중지’를 건의하기도 하였다. 결국 1902년 [[백동화]]의 주조를 일단 정지했으나 일본으로부터 불법적인 밀수입이 지속되어 일본 정부가 [[백동화]] 위조를 금지하는 칙령까지 공포하였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97쪽.</REF> | ||
− | == | + | ===[[백동화]]의 출현과 쇠락의 과정=== |
− | + |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근대 개혁이 진행되는 가운데, [[백동화]]는 [[조선 조정]]에서 손쉽게 확보할 수 있는 재정 세원이었다. [[전환국]]이 발행한 [[백동화]]의 수량을 보면, 1897년에는 1만 7천원 수준이었는데, 1898년에는 34만 8천원, 1899년에는 128만원이었다. 그 양은 해마다 늘어나 1904년에는 무려 350만원에 이르렀다.<ref>이승렬, 「光武政權의 貨幣ㆍ金融政策과 大韓天一銀行의 영업」, 『한국사연구』, Vol123, 2003, 99쪽.</ref> 그러자 1905년부터 [[일본통감부]]에서 [[백동화]]를 정리하기 시작했는데, 정리가 끝나는 4년 | |
+ | 동안 환수한 [[백동화]] 수량이 약 3억 8천 500만개였다.<ref>이왕무, 「일본 외교사료관 소장 고종대 白銅貨 관련 문서」, 『조선시대 사학회』, 권 68, 2014, 271쪽.</ref> 약 10년 동안 주조된 어마어마한 양의 화폐로 인해, [[조선 조정]]은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겪게 되었고, 백성들이나 상인들도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물론 [[조선 조정]]에서도 손을 놓고 인플레이션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만 보지 않았다. 그들이 생각한 방법은 조세 제도 자체를 전면적으로 [[백동화]] 중심의 유통 체제로 바꾸는 것이었다. 즉 조세를 징수할 때 [[백동화]]로 납부하게 하고 황해도와 평안도 등 전국 각지로 확대하며, 상권과 관료의 봉급까지 [[백동화]]로 지급하게 한 것이다. 그 결과 초기에는 유통량에 비해서 신뢰성이 높아져 [[백동화]] 가격은 안정되는 듯 보였다.<ref>都冕會, 「갑오개혁 이후 화폐제도의 문란과 그 영향(1894~1905)」, 『韓國史論』, Vol 21, 1989, 406-425쪽.</ref> | ||
− | == | + | ===[[백동화]]의 쇠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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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석== | + | =='''주석'''== |
<references/> | <references/> | ||
+ | =='''참고문헌'''== | ||
+ | ===더 읽을 거리=== | ||
+ | *논문 | ||
+ | **이왕무, 「일본 외교사료관 소장 고종대 白銅貨 관련 문서」, 『조선시대 사학회』, 권 68, 2014, 267~278쪽. | ||
+ | **이승렬, 「光武政權의 貨幣ㆍ金融政策과 大韓天一銀行의 영업」, 『한국사연구』, Vol 123, 2003, 95-137쪽. | ||
+ | **都冕會, 「갑오개혁 이후 화폐제도의 문란과 그 영향(1894~1905)」, 『韓國史論』, Vol 21, 1989, 371-458쪽. | ||
− | [[분류: | + | [[분류:한글고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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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 |
2017년 12월 8일 (금) 22:57 기준 최신판
백동화 무효에 관한 고시 | |
영문명칭 | Notification about invalidation of Baekdonghwa |
---|---|
작자 | 미상 |
작성시기 | 1909년 |
간행시기 | 개항기 |
간행처 | 탁지부 |
소장처 | 국립고궁박물관 |
유형 | 고문서 |
크기(세로×가로) | 27×39㎝ |
판본 | 석인본 |
수량 | 1章 |
표기문자 | 한글, 한자 |
목차
정의
1909년 1월 1일부터 대한제국의 법화인 백동화 통용을 금지한다는 내용의 탁지부 고시문이다.
내용
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개항 이후 급진적으로 변천하는 근대화의 물결은 화폐제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당오전(當五錢) 발행으로 인한 환란을 계기로 화폐제도 개혁의 움직임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1894년(고종 31) 은본위제가 도입되었으나 본위 화폐의 주조는 미미하고 보조화폐인 2전 5푼의 백동화가 남발되었다. 2전 5푼의 백동화는 전환국에서 주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민간인도 면허세를 납부하면 주조할 수 있도록 했으며 황실의 수입을 위해 일부 특정인에게도 주조를 허용하였다. 또한 일본인들에 의한 불법 주조와 밀수입도 성행하였다. 이와 같이 남발된 백동화로 인해 1900년부터 1905년까지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여 국민 생활은 도탄에 빠지고 상거래는 마비 상태에 이르렀다. 이로써 시중에서는 백동화로는 거래가 되지 않았고 임금도 백동화로는 받지 않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 1898년 6월 독립협회는 보조화폐의 유통을 중단하도록 항의했고 1902년 3월에는 각국 공사들이 결의하여 ‘백동화 주조의 중지’를 건의하기도 하였다. 결국 1902년 백동화의 주조를 일단 정지했으나 일본으로부터 불법적인 밀수입이 지속되어 일본 정부가 백동화 위조를 금지하는 칙령까지 공포하였다.[1]
백동화의 출현과 쇠락의 과정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근대 개혁이 진행되는 가운데, 백동화는 조선 조정에서 손쉽게 확보할 수 있는 재정 세원이었다. 전환국이 발행한 백동화의 수량을 보면, 1897년에는 1만 7천원 수준이었는데, 1898년에는 34만 8천원, 1899년에는 128만원이었다. 그 양은 해마다 늘어나 1904년에는 무려 350만원에 이르렀다.[2] 그러자 1905년부터 일본통감부에서 백동화를 정리하기 시작했는데, 정리가 끝나는 4년 동안 환수한 백동화 수량이 약 3억 8천 500만개였다.[3] 약 10년 동안 주조된 어마어마한 양의 화폐로 인해, 조선 조정은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겪게 되었고, 백성들이나 상인들도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물론 조선 조정에서도 손을 놓고 인플레이션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만 보지 않았다. 그들이 생각한 방법은 조세 제도 자체를 전면적으로 백동화 중심의 유통 체제로 바꾸는 것이었다. 즉 조세를 징수할 때 백동화로 납부하게 하고 황해도와 평안도 등 전국 각지로 확대하며, 상권과 관료의 봉급까지 백동화로 지급하게 한 것이다. 그 결과 초기에는 유통량에 비해서 신뢰성이 높아져 백동화 가격은 안정되는 듯 보였다.[4]
백동화의 쇠락
하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결과일 뿐 이미 조선에서 1894-1895년 벌어진 청일전쟁 이후로, 엄청난 양의 일본 화폐가 통용되고 있었다. 일본 화폐가 조선 상권, 은행 등 여러 곳에서 스며들었기 때문에 백동화의 유통은 큰 제제를 받았다. 그 뿐만 아니라 전환국에서 만드는 근대적 화폐 제조 기술 또한 외국에서 습득되기도 전에 교체되는 일도 있었고, 한성과 인천 등에서 나누어져 주조되는 과정에서 백동화 사주전(白銅貨 私鑄錢), 백동화 도주전(白銅貨 盜鑄錢) 등이 성행하게 되었다. 그 결과 본래 전환국에서 만들어진 백동화 수량 보다 몇 배나 유통량이 몇 배나 되는 상황이 발생하였고, 이것은 조선 경제에 엄청난 악영향을 주었다. 이런 과정 끝에 백동화 무효에 관한 고시가 발표되게 된 것이다.[5]
연계 자원 보러 가기 |
• 백동화 무효에 관한 고시 (해독) |
지식 관계망
- 백동화 무효에 관한 고시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백동화 무효에 관한 고시 | 백동화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백동화 무효에 관한 고시 | 탁지부 | A는 B에 의해 간행되었다 | A dcterms:publisher B |
전환국 | 백동화 | A는 B를 주조하였다 | A ekc:create B |
전환국 | 한성 | A는 B에 있었다 | A ekc:formerLocation B |
전환국 | 인천 | A는 B에 있었다 | A ekc:formerLocation B |
일본화폐 | 백동화 무효에 관한 고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백동화 사주전 | 백동화 무효에 관한 고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백동화 도주전 | 백동화 무효에 관한 고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탁지부 | 조선 정부 | A는 B에 포함된다 | A dcterms:isPartOf B |
대한제국 | 조선 정부 | A는 B에 포함된다 | A dcterms:isPartOf B |
청일전쟁 | 조선 정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은본위제 | 조선 정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호조 | 탁지부 | A는 B와 유사하다 | A owl:sames B |
호조 | 조선 조정 | A는 B에 포함된다 | A dcterms:isPartOf B |
당오전 | 조선 조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조선 | 조선 조정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392년-1894년 | 호조는 존재하였다 |
1392년-1897년 | 조선은 존재하였다 |
1894년 | 은본위제가 도입되었다 |
1894-1895년 |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
1909년 | 백동화 무효에 관한 고시가 간행되었다 |
1894년-1910년 | 조선 정부가 존재하였다 |
1897년-1910년 | 대한제국이 존재하였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7.576821 | 126.974884 | 백동화 무효에 관한 고시는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97쪽.
- ↑ 이승렬, 「光武政權의 貨幣ㆍ金融政策과 大韓天一銀行의 영업」, 『한국사연구』, Vol123, 2003, 99쪽.
- ↑ 이왕무, 「일본 외교사료관 소장 고종대 白銅貨 관련 문서」, 『조선시대 사학회』, 권 68, 2014, 271쪽.
- ↑ 都冕會, 「갑오개혁 이후 화폐제도의 문란과 그 영향(1894~1905)」, 『韓國史論』, Vol 21, 1989, 406-425쪽.
- ↑ 都冕會, 「갑오개혁 이후 화폐제도의 문란과 그 영향(1894~1905)」, 『韓國史論』, Vol 21, 1989, 406-425쪽.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이왕무, 「일본 외교사료관 소장 고종대 白銅貨 관련 문서」, 『조선시대 사학회』, 권 68, 2014, 267~278쪽.
- 이승렬, 「光武政權의 貨幣ㆍ金融政策과 大韓天一銀行의 영업」, 『한국사연구』, Vol 123, 2003, 95-137쪽.
- 都冕會, 「갑오개혁 이후 화폐제도의 문란과 그 영향(1894~1905)」, 『韓國史論』, Vol 21, 1989, 371-45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