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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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1=최연식, 「무위사 선각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20-34쪽. 온라인 참조: "[http://www.krpia.co.kr/product/main;jsessionid=070BD0FC5971490CF6C77951DAB5B271?plctId=PLCT00006039#none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누리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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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1일 (목) 23:10 기준 최신판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BHST Muwisa Seongak stele.jpg
대표명칭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영문명칭 Stele for Buddhist Monk Seongak at Muwisa Temple, Gangjin
한자 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이칭 무위사선각대사편광탑비(無爲寺先覺大師遍光塔碑)
주소 전남 강진군 성전면 무위사로 308
문화재 지정번호 보물 제507호
문화재 지정일 1969년 6월 16일
찬자 최언위(崔彦撝)
서자 유훈율(柳勳律)
각자 김문윤(金文允), 최환규(崔奐規)
서체 해서(楷書)
승려 형미(逈微)
건립연대 946년



정의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무위사(無爲寺)에 있는 신라시대의 승려 선각대사 형미(先覺大師 逈微, 864-917)탑비.

내용

개요

이 비는 선각대사 형미(先覺大師 逈微)탑비로 비제(碑題)[1]는 '고려국고무위갑사선각대사편광령탑비(高麗國故無爲岬寺先覺大師遍光靈塔碑)'라고 되어있다.[2] 높이 약 2.35m, 너비 1.12m로 [3] 귀부(龜趺), 비신(碑身), 이수(螭首)로 이루어진 고려 초의 전형적인 비석 형태를 하고 있으며 귀부이수 등의 사실적인 조각은 당대 최고 수준을 보여준다.[4]

고려 초의 대표적 문장가인 최언위(崔彦撝)가 비문을 지었으며, 유훈율(柳勳律)이 당시에 유행하던 구양순체(歐陽詢體)해서(楷書)로 글씨를 썼다. 비석의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하여 현재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비석 하단의 일부는 마멸(磨滅)[5]되어 판독되지 않고 있다.[6]

1969년 보물 제507호로 지정되었다.[7]

비문

비문에 따르면 선각대사(先覺大師)는 지금의 광주 지방인 무주(武州)에서 출생하였으며, 가지산문(迦智山門)보조선사 체징(普照禪師 體澄)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8] 체징이 입적한 후에는 891년 당(唐)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905년에 귀국하였고, 912년까지 8년간 월출산 무위사(無爲寺)에 주석[9]하였다.[10] 이 시기에 선각대사는 전라도 남부지역을 공략하러 온 궁예(弓裔)왕건(王建)을 만나게 되고, 이들을 따라 태봉의 수도인 철원으로 옮겨 머무르다가 궁예의 의심을 받아 처형되었다. 비문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궁예가 실각한 후 왕건이 즉위하여 형미를 위해 탑과 사찰을 건립해주고 '선각대사(先覺大師)'라는 시호를 내려준 일을 이야기하고 있다.[11]


비문 보러가기
최연식, 「무위사 선각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20-34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금석문, 『국가유산 지식이음』online, 국립문화재연구원.



선각대사비에 나타난 궁예의 행적

선각대사비는 다른 자료에서는 언급되지 않는 궁예(弓裔)의 행적을 전하는 자료로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12]

Quote-left.png 이때에 대왕께서는 일찍이 대사가 근래에 오월(吳越)에서 우리나라로 들어오셔서 마니보주(摩尼寶珠)[13]를 바닷가에 감추고, 미옥(美玉)을 하늘 바깥에 감추고 계시다는 것을 들어 알고 계셨다. 그래서 먼저 글[丹詔]을 보내어 스님의 도간(道竿)에 공경을 표시하니, 대사는 왕명[制]을 받들어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거친 파도를 헤치고 달려왔다. ...(중략)... 그 후 군대를 돌이킬 때에 특별히 (스님에게) 함께 돌아갈 것을 청하였고, 2~3일 사이에 북쪽 해안에 이르렀다. Quote-right.png
출처: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08쪽.


기존의 해석에서는 위에 인용된 비문의 "대왕(大王)"을 왕건으로 해석하여 선각대사(先覺大師)를 태봉(泰封)[14]으로 초빙한 주체를 왕건(王建)으로 이해하였지만, 비문 전체의 내용으로 볼 때 "대왕"은 궁예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15]궁예는 912년 8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주와 광주 등 현재의 전라도 남부지역을 공략하였으며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현재 『삼국사기(三國史記)』와 『고려사(高麗史)』 등에서 왕건의 업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태봉의 전라도 남부지역 경략은 실제로는 궁예의 직접 지휘 하에 행해졌던 작전이었으며, 후대에 왕건의 업적을 선양하고 고려 왕조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궁예의 역할이 지워졌던 것이다.[16]

지식관계망

  •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와 선각대사 형미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형미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강진 무위사 A는 B에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최언위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A ekc:writer B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유훈율 A는 B가 비문을 썼다 A ekc:calligrapher B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김문윤 A는 B가 비문을 새겼다 A ekc:inscriber B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최환규 A는 B가 비문을 새겼다 A ekc:inscriber B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고려 태조 A는 B가 이름을 지었다 A dc:contributor B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탑비 A의 유형은 B이다 A dcterms:type B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궁예 A는 B를 기록하였다 A ekc:mentions B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고려 태조 A는 B를 기록하였다 A ekc:mentions B
형미 궁예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형미 고려 태조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형미 강진 무위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946년 형미의 탑비인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강진 무위사에 건립됨.
1969년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가 보물로 지정됨.

시각자료

가상현실


가상 현실 - 전체 화면 보기

주석

  1. 비석의 제목
  2.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무위사 선각대사편광탑비",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4. 최연식, 「무위사 선각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20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5. 갈리어서 닳아 없어짐
  6. 최연식, 「무위사 선각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20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7.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문화재청.
  8.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22-324쪽.
  9. 선종에서, 승려가 입산하여 안주함. 승려가 포교하기 위하여 어떤 지역에 한동안 머무름.
  10.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25-327쪽.
  11.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10쪽.
  12.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04쪽.
  13. '보주'(寶珠)를 일상적으로 이르는 말. 불행과 재난을 없애 주고 더러운 물을 깨끗하게 하며, 물을 변하게 하는 따위의 덕이 있다.
  14. 궁예가 건설한 나라의 이름
  15.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10쪽.
  16.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18쪽.

참고문헌

  •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10-333쪽.
  •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03-222쪽.
  • 최연식, 「무위사 선각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20-34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 "무위사선각대사편광탑비", 금석문, 『국가유산 지식이음』online, 국립문화재연구원.
  •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