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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Blockquote|족두리는 ‘족’과 ‘두리’로 나눌 수 있다. 족두리는 머리에 쓰는 것이다. 따라서 머리에서 기원한 말일 것이다 ‘두리’는 머리의 본뜻을 지닌다고 하겠다. 어린이를 어를 때 ‘도리도리’ 하는데, 어근 ‘돌’이 머리(頭)의 뜻을 지닌다. tologai(頭), 어근 ‘tol’이 ‘돌(頭)’과 동원어가 된다고 하겠다. ‘족’은 졷>졸>즑>족 변화로서 ‘돋’에서 소급된다. “쪽을 지다, 쪽을 틀다”의 ‘쪽’도 동원어(同源語)일 것이다. | |
+ | |출처= 서정범, 『국어어원사전』, 보고사, 2000.}} | ||
+ | [[족두리]]의 형태는 조선 전기(14~16세기)에 앞이 낮고 뒤가 높으며, 옆면이 6~7쪽으로 나뉘고 정수리는 원형의 천 조각을 넓게 대어 편평한 형태이다. 17세기 문헌에 ‘족두리’ 명칭이 처음 등장하며 둥근 정수리가 앞으로 기울어져 위에서 아래로 좁아지는 모양으로 역대 시기별 형태 중 가장 크다. 18세기 이후에는 둘레는 줄어들었지만, 우뚝 솟은 형태로 중심이 뒤쪽으로 이동하였고, 크기도 작아졌다.<ref>金知娟, 「朝鮮時代 女性 禮冠에 관한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102~111쪽.</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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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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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오주연문장전산고『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 | * [[ | + | * [[거가잡복고|『거가잡복고(居家雜服攷)』]] |
− | * [[『거가잡복고 | + | * 고미연, 「한국여성의 두식에 관한 연구-조선시대를 중심으로」, 숙명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3. |
− | * 고미연 | + | * 김문식, 「18세기 서울 여성의 머리장식」, 『문헌과 해석』 42, 문헌과 해석사, 2006. |
− | * 金知娟 | + | * 金知娟, 「족두리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8. |
− | * 이연화 | + | * 이연화, 「족두리(簇頭里)의 형태 및 제작과정에 관한 연구」, 석사학위논문 세종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9. |
− | * 정영숙 | + | * 정영숙, 「조선시대 부인용 머리장신구 문양에 관한 고찰」, 석사학위논문 한양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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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궁중기록화]] [[분류: | + | [[분류:궁중기록화]] |
+ | [[분류:복식]] |
2017년 12월 17일 (일) 21:40 기준 최신판
족두리 (簇頭里) |
|
대표명칭 | 족두리 |
---|---|
한자표기 | 簇頭里 |
이칭별칭 | 簇頭伊, 족두(足頭), 족관(簇冠), 죡도리 |
구분 | 수식 |
착용신분 | 왕실, 궁중, 평민 |
착용성별 | 여성 |
정의
조선후기의 가체를 대신하는 의례용 수식으로 제도화된 이후 왕실과 민간에 착용되었으며, 오늘날 전통 혼례에서도 착용하는 여성 예관(禮冠)이다. [1]
내용
왕실과 궁중에서는 당의를 입을 때 착용하였고, 사대부와 일반 백성들은 혼례에 착용한 관이다. 조선시대 학자 이규경(李圭景)은 "원나라에서 왕비에게 하사한 ‘고고리’가 와전되어 ‘족두리’가 변했다."고 하였고,[2] 박규수(朴珪壽)는 "원나라 사람들이 말이 죽으면 불쌍하게 여겨 그 말굽 모양을 취해 머리에 쓰던 족두(足兜)의 남겨진 형상에서 유래했다."고 하였다.[3] 국문학계에서는 알타이어 계통의 순수 우리말인 족+두리의 합성어라고 밝히고 있다.
족두리의 형태는 조선 전기(14~16세기)에 앞이 낮고 뒤가 높으며, 옆면이 6~7쪽으로 나뉘고 정수리는 원형의 천 조각을 넓게 대어 편평한 형태이다. 17세기 문헌에 ‘족두리’ 명칭이 처음 등장하며 둥근 정수리가 앞으로 기울어져 위에서 아래로 좁아지는 모양으로 역대 시기별 형태 중 가장 크다. 18세기 이후에는 둘레는 줄어들었지만, 우뚝 솟은 형태로 중심이 뒤쪽으로 이동하였고, 크기도 작아졌다.[4]
조선 후기 다리나 가체 등으로 부녀들의 머리 장식에 소용되는 비용이 커지고, 사치스러워지자 영조는 1756년(영조 32)에 처음으로 사족 부녀가 다리[髢]를 사용하는 것을 금하고 족두리를 쓰게 하였다. 그 후 1758년(영조 34)에도 영조는 다시 다리[髢髻]의 사용을 금지하고 궁중의 양식[宮樣]인 족두리를 사용하라고 명했지만 영조의 다리 금지령은 1763년(영조 39)에 철회되었다. 다리 대신 족두리를 사용하게 했지만, 족두리는 궁중의 양식인데다 족두리를 보석으로 장식함으로써 소요되는 비용이 다리와 맞먹었기 때문이었다. 정조는 1788년(정조 12)에 또 다시 가체금지령을 내려고, 쪽진 머리와 머리에 쓰는 관으로는 족두리를 권장하였다. 이 금지령은 『가체신금사목(加髢申禁事目)』이라는 책자로 인쇄되어 전국에 배포되었다. 조선시대에 가체금지령으로 인해 족두리가 권장된 이후, 현재까지도 전통 혼례에 족두리가 사용되고 있다.[5]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왕비 | 족두리 | A는 B를 착용한다 | A ekc:wears B |
왕세자빈 | 족두리 | A는 B를 착용한다 | A ekc:wears B |
내명부 | 족두리 | A는 B를 착용한다 | A ekc:wears B |
외명부 | 족두리 | A는 B를 착용한다 | A ekc:wears B |
일반 백성 | 족두리 | A는 B를 착용한다 | A ekc:wears B |
시간정보
공간정보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주석
- ↑ 金知娟, 「朝鮮時代 女性 禮冠에 관한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94쪽.
- ↑ 李圭景, 『五洲衍文長箋散稿』, 「人事篇, 服食類」, ‘東國婦女首飾辨證說’, “『高麗史』元賜王妃古古里, 卽冠名傳於世, 則今簇頭里, 無乃古古里之音近而訛者歟.”
- ↑ 朴珪壽, 『居家雜服攷』, 「內服」, “按, 所謂娘子頭者, 旣在腦後, 則頂上空處, 乃有小戴, 非冠非帽, 正如脫取馬蹄而仰置之形, 俗名足兜, 未知創自何時, 或云, 亦是元俗也. 胡人本以鞍馬爲家馳逐爲生, 故馬死則憐之, 取其制而戴之, 足兜之形, 卽其遺象, 故因名足兜也.”
- ↑ 金知娟, 「朝鮮時代 女性 禮冠에 관한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102~111쪽.
- ↑ 김문식,「18세기 서울 여성의 머리장식」, 『문헌과 해석』42, 문헌과 해석사, 2006, 38쪽.
- ↑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名選 下』, 단국대학교 출판부, 2005, 33쪽.
- ↑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名選 下』, 단국대학교 출판부, 2005, 32쪽.
- ↑ 국립민속박물관(http://www.nfm.go.kr/) 소장.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오주연문장전산고『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거가잡복고(居家雜服攷)』
- 고미연, 「한국여성의 두식에 관한 연구-조선시대를 중심으로」, 숙명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3.
- 김문식, 「18세기 서울 여성의 머리장식」, 『문헌과 해석』 42, 문헌과 해석사, 2006.
- 金知娟, 「족두리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8.
- 이연화, 「족두리(簇頭里)의 형태 및 제작과정에 관한 연구」, 석사학위논문 세종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9.
- 정영숙, 「조선시대 부인용 머리장신구 문양에 관한 고찰」, 석사학위논문 한양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