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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탄압을 위한 수용시설=== | ===독립운동 탄압을 위한 수용시설=== | ||
1905년 [[을사조약|을사늑약]]과 1906년 조선통감부 설치로 인해 정부의 법집행의 자율성이 일제에 의해 크게 침해되었다. 조선통감부는 의병 등 반일세력을 탄압·수용할 목적으로 새로운 감옥을 만들었다. 1908년(순종 2) 10월 21일 일본인 건축가 시텐노 가즈마(天王要馬)가 설계한 경성감옥(京城監獄)이 건립된 것이다. 이 감옥은 본래 1907년 8월에 완성되었으나 군대 해산 이후 해산 군인의 의병 가담과 [[조선 순종|순종황제]] 등극 이후 시국의 불안정 등으로 인해 바로 개소되지 못했다가 1908년 10월에 개소하게 되었다.<ref>서동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6513 서대문형무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1905년 [[을사조약|을사늑약]]과 1906년 조선통감부 설치로 인해 정부의 법집행의 자율성이 일제에 의해 크게 침해되었다. 조선통감부는 의병 등 반일세력을 탄압·수용할 목적으로 새로운 감옥을 만들었다. 1908년(순종 2) 10월 21일 일본인 건축가 시텐노 가즈마(天王要馬)가 설계한 경성감옥(京城監獄)이 건립된 것이다. 이 감옥은 본래 1907년 8월에 완성되었으나 군대 해산 이후 해산 군인의 의병 가담과 [[조선 순종|순종황제]] 등극 이후 시국의 불안정 등으로 인해 바로 개소되지 못했다가 1908년 10월에 개소하게 되었다.<ref>서동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6513 서대문형무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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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이 설립된 이후 초기에는 [[허위|허위(許蔿, 1854∼1908)]], [[이강년|이강년(李康秊, 1858∼1908)]], [[이인영|이인영(李麟榮, 1867∼1909)]] 등 후기의병의 주도자들이 많이 투옥되었다. 허위 등은 모두 경성감옥에서 사형되어 순국하였다. 1908년 10월 현재 수감자 2,019명 중 내란죄는 192명, 폭동죄 44명, 강도죄 710명, 절도죄 314명, 준강도가 134명 등이었다. 일제는 1908년 경성감옥 이외에도 공주, 함흥, 평양, 해주, 대구, 진주, 광주 등 전국 7개 주요 지역에 본감옥(本監獄)을 세웠다. | 감옥이 설립된 이후 초기에는 [[허위|허위(許蔿, 1854∼1908)]], [[이강년|이강년(李康秊, 1858∼1908)]], [[이인영|이인영(李麟榮, 1867∼1909)]] 등 후기의병의 주도자들이 많이 투옥되었다. 허위 등은 모두 경성감옥에서 사형되어 순국하였다. 1908년 10월 현재 수감자 2,019명 중 내란죄는 192명, 폭동죄 44명, 강도죄 710명, 절도죄 314명, 준강도가 134명 등이었다. 일제는 1908년 경성감옥 이외에도 공주, 함흥, 평양, 해주, 대구, 진주, 광주 등 전국 7개 주요 지역에 본감옥(本監獄)을 세웠다. | ||
1919년에는 [[3.1운동]]으로 인해 수감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당시 시위관련자 1,600여 명을 포함해 3,000여 명이 투옥되었다. 특히 [[한용운|한용운(韓龍雲, 1879∼1944)]], [[유관순|유관순(柳寬順, 1902∼1920)]] 등이 독립선언과 독립만세운동으로 인해 이곳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밖에도 일제강점기에 [[양한묵]]·[[강우규]]·[[안창호]]·[[여운형]]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던 곳이다.<ref>서동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6513 서대문형무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1919년에는 [[3.1운동]]으로 인해 수감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당시 시위관련자 1,600여 명을 포함해 3,000여 명이 투옥되었다. 특히 [[한용운|한용운(韓龍雲, 1879∼1944)]], [[유관순|유관순(柳寬順, 1902∼1920)]] 등이 독립선언과 독립만세운동으로 인해 이곳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밖에도 일제강점기에 [[양한묵]]·[[강우규]]·[[안창호]]·[[여운형]]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던 곳이다.<ref>서동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6513 서대문형무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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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대에 따라 바뀐 이름=== | ||
+ | 1908년 7월 경성감옥으로 문을 연 이래, 1912년 서대문감옥, 1923년 서대문형무소로 불렸다. 해방 후에도 1946년 경성형무소, 1950년 서울형무소, 1961년 서울교도소, 1967년 서울구치소로 그 이름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ref>서동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6513 서대문형무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지식관계망'''== | =='''지식관계망'''== |
2018년 1월 12일 (금) 00:57 기준 최신판
서울 구 서대문형무소 (서울 舊 西大門刑務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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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서울 구 서대문형무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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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서울 舊 西大門刑務所 |
이칭 | 서대문형무소 |
유형 | 유적건조물 |
시대 | 근대 |
지정번호 | 사적 제324호 |
지정일 | 1988년 02월 27일 |
소장처 |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
관련인물 | 유관순,손병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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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대한제국기에 조선통감부가 서울 현저동에 설치한 감옥이다.
내용
간략한 역사
1908년 조선통감부가 의병 등 반일세력을 탄압·수용할 목적으로 만든 감옥이다. [1] 준공 당시는 감방 480평, 청사 80평의 규모였으나, 1916년 7, 8옥사 및 여사(女舍), 1923년 13옥사와 사형장, 1925년에 중앙사 및 10, 11, 12 옥사, 1934년에 1~6옥사 및 부속 옥사를 증축하여 확장하였다. 청사는 전동(典洞)에 있던 흥사단 건물을 이축(移築)한 것으로, 6·25전쟁 휴전 직후 현재의 자리로 다시 옮겨 관사(官舍)로 사용하였다.[2]
독립운동 탄압을 위한 수용시설
1905년 을사늑약과 1906년 조선통감부 설치로 인해 정부의 법집행의 자율성이 일제에 의해 크게 침해되었다. 조선통감부는 의병 등 반일세력을 탄압·수용할 목적으로 새로운 감옥을 만들었다. 1908년(순종 2) 10월 21일 일본인 건축가 시텐노 가즈마(天王要馬)가 설계한 경성감옥(京城監獄)이 건립된 것이다. 이 감옥은 본래 1907년 8월에 완성되었으나 군대 해산 이후 해산 군인의 의병 가담과 순종황제 등극 이후 시국의 불안정 등으로 인해 바로 개소되지 못했다가 1908년 10월에 개소하게 되었다.[3]
3.1운동 이후 수감자 급증
감옥이 설립된 이후 초기에는 허위(許蔿, 1854∼1908), 이강년(李康秊, 1858∼1908), 이인영(李麟榮, 1867∼1909) 등 후기의병의 주도자들이 많이 투옥되었다. 허위 등은 모두 경성감옥에서 사형되어 순국하였다. 1908년 10월 현재 수감자 2,019명 중 내란죄는 192명, 폭동죄 44명, 강도죄 710명, 절도죄 314명, 준강도가 134명 등이었다. 일제는 1908년 경성감옥 이외에도 공주, 함흥, 평양, 해주, 대구, 진주, 광주 등 전국 7개 주요 지역에 본감옥(本監獄)을 세웠다. 1919년에는 3.1운동으로 인해 수감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당시 시위관련자 1,600여 명을 포함해 3,000여 명이 투옥되었다. 특히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유관순(柳寬順, 1902∼1920) 등이 독립선언과 독립만세운동으로 인해 이곳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밖에도 일제강점기에 양한묵·강우규·안창호·여운형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던 곳이다.[4]
시대에 따라 바뀐 이름
1908년 7월 경성감옥으로 문을 연 이래, 1912년 서대문감옥, 1923년 서대문형무소로 불렸다. 해방 후에도 1946년 경성형무소, 1950년 서울형무소, 1961년 서울교도소, 1967년 서울구치소로 그 이름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5]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서울 구 서대문형무소 | 유관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dcterms:isPartOf B |
서울 구 서대문형무소 | 손병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dcterms:isPartOf B |
서울 구 서대문형무소 | 한용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dcterms:isPartOf B |
서울 구 서대문형무소 | 여운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dcterms:isPartOf B |
공간정보
-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식 전자지도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 ↑ 서동일, "서대문형무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서울 구 서대문형무소",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서동일, "서대문형무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서동일, "서대문형무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서동일, "서대문형무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서울 구 서대문형무소",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서동일, "서대문형무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더 읽을 거리
- "서울 구 서대문형무소",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 박성수, "서울구서대문형무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