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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총이 지은 설화로 그의 유일한 유문(遺文)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에 따르면, 곁에서 아첨하는 미인(美人) 장미(薔薇)에 빠졌던 화왕(花王) | + | 설총이 지은 설화로 그의 유일한 유문(遺文)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에 따르면, 곁에서 아첨하는 미인(美人) 장미(薔薇)에 빠졌던 화왕(花王)이 베옷에 가죽띠를 두른 차림으로 찾아온 백두옹(白頭翁, 할미꽃)의 충직한 모습에 마음의 갈등을 겪게 되며, 결국 백두옹의 간언(諫言)을 듣고 정직한 도리를 숭상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를 들어 설총이 [[신라 신문왕|신문왕]]을 깨우쳤다고 한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64199 화왕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화왕계에 보이는 설총의 생각==== | ====화왕계에 보이는 설총의 생각==== | ||
이 이야기의 핵심은 임금은 마땅히 어질고 실속 있는 신하를 얻어야 하며, 신하는 행여 쓰임 받지 못하여도 크게 낙심하거나 원망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형적인 유교의 인식체계가 보이는 결론이다..<ref>고운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0614&cid=59015&categoryId=59015 설총], 네이버캐스트, 인물한국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이 이야기의 핵심은 임금은 마땅히 어질고 실속 있는 신하를 얻어야 하며, 신하는 행여 쓰임 받지 못하여도 크게 낙심하거나 원망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형적인 유교의 인식체계가 보이는 결론이다..<ref>고운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0614&cid=59015&categoryId=59015 설총], 네이버캐스트, 인물한국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
− | 설총이 지은 다른 글들은 [[김부식|김부식(金富軾)]]이 『[[삼국사기|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하던 무렵에도 이미 거의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글을 잘 지었으나 세상에 전해 온 것이 없고, 다만 지금 남쪽 지방에 총이 지은 비명이 간혹 남았어도, 글자가 망가져서 읽을 수 없다. 아쉽게도 어떠한 내용인지 알지 못한다‘는 대목이 이 같은 사정을 짐작하게 해 준다. 남았다는 것이 아마도 ‘감산사 아미타여래 조상기(甘山寺 阿彌陀如來造像記)’ 같은 비문일 | + | 설총이 지은 다른 글들은 [[김부식|김부식(金富軾)]]이 『[[삼국사기|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하던 무렵에도 이미 거의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글을 잘 지었으나 세상에 전해 온 것이 없고, 다만 지금 남쪽 지방에 총이 지은 비명이 간혹 남았어도, 글자가 망가져서 읽을 수 없다. 아쉽게도 어떠한 내용인지 알지 못한다‘는 대목이 이 같은 사정을 짐작하게 해 준다. 남았다는 것이 아마도 ‘감산사 아미타여래 조상기(甘山寺 阿彌陀如來造像記)’ 같은 비문일 것으로 보인다.<ref>고운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0614&cid=59015&categoryId=59015 설총], 네이버캐스트, 인물한국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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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12일 (금) 01:09 기준 최신판
설총(薛聰) | |
대표명칭 | 설총 |
---|---|
한자표기 | 薛聰 |
생몰년 | ?-? |
자 | 총지(聰智) |
시대 | 신라시대 |
국적 | 신라 |
대표저서 | 화왕계(花王誡) |
대표직함 | 한림(翰林) |
부 | 원효(元曉) |
모 | 요석공주(瑤石公主) |
정의
신라 중대의 대학자이다.
내용
자는 총지(聰智). 할아버지는 나마(奈麻) 담날(談捺)이고, 아버지는 원효(元曉), 어머니는 요석공주(瑤石公主)이다. 육두품 출신으로 추측되며, 관직은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경주설씨(慶州薛氏)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1] 6두품 신분으로 추정되며, 강수(强首)·최치원(崔致遠)과 함께 신라의 3대 문장가로 꼽힌다.[2]
한때 설총이 이두(吏讀)를 창시했다고 알려졌으나, 설총 이전의 금석문(金石文)에서도 이미 이두를 사용한 예가 있으므로, 창시가 아니라 집대성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보통이다. 설총은 한당유학(漢唐儒學)을 중심으로 훈고학(訓古學)적 학풍을 따랐을 것으로 추측한다.[3]
화왕계(花王戒)
설총이 지은 설화로 그의 유일한 유문(遺文)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에 따르면, 곁에서 아첨하는 미인(美人) 장미(薔薇)에 빠졌던 화왕(花王)이 베옷에 가죽띠를 두른 차림으로 찾아온 백두옹(白頭翁, 할미꽃)의 충직한 모습에 마음의 갈등을 겪게 되며, 결국 백두옹의 간언(諫言)을 듣고 정직한 도리를 숭상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를 들어 설총이 신문왕을 깨우쳤다고 한다.[4]
화왕계에 보이는 설총의 생각
이 이야기의 핵심은 임금은 마땅히 어질고 실속 있는 신하를 얻어야 하며, 신하는 행여 쓰임 받지 못하여도 크게 낙심하거나 원망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형적인 유교의 인식체계가 보이는 결론이다..[5] 설총이 지은 다른 글들은 김부식(金富軾)이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하던 무렵에도 이미 거의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글을 잘 지었으나 세상에 전해 온 것이 없고, 다만 지금 남쪽 지방에 총이 지은 비명이 간혹 남았어도, 글자가 망가져서 읽을 수 없다. 아쉽게도 어떠한 내용인지 알지 못한다‘는 대목이 이 같은 사정을 짐작하게 해 준다. 남았다는 것이 아마도 ‘감산사 아미타여래 조상기(甘山寺 阿彌陀如來造像記)’ 같은 비문일 것으로 보인다.[6]
지식 관계망
- 원효와 의천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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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 | 설총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요석공주 | 설총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화왕계 | 설총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주석
- ↑ 박노춘, "설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설총",
『두산백과』online . - ↑ "설총",
『두산백과』online . - ↑ "화왕계",
『두산백과』online . - ↑ 고운기, "설총, 네이버캐스트, 인물한국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고운기, "설총, 네이버캐스트, 인물한국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