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길 신도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내용) |
(→내용) |
||
24번째 줄: | 24번째 줄: | ||
=='''내용'''== | =='''내용'''== | ||
− | 1702년(조선 숙종 28) 건립된 비문으로 [[최명길]]의 생애와 주요 활동이 적혀 있다. 비신 높이는 4.2m 로 현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59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신(碑身) 위에 팔작지붕 모양의 덮개돌을 얹은 일반 형식인데, 1980년 비의 보호를 위해 비각(碑閣)을 세웠으나 | + | 1702년(조선 숙종 28) 건립된 비문으로 [[최명길]]의 생애와 주요 활동이 적혀 있다. 비신 높이는 4.2m 로 현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59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신(碑身) 위에 팔작지붕 모양의 덮개돌을 얹은 일반 형식인데, 1980년 비의 보호를 위해 비각(碑閣)을 세웠으나, 이미 오랜 시간을 거치며 풍화되어 판독은 거의 불가능하다. 비문은 [[박세당|박세당(朴世堂)]]이 짓고 글씨는 [[최창대|최창대(崔昌大)]]가 썼다.<ref>이완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7286 청주최명길신도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비문에는 1605년(선조 38)에 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典籍)을 지냈고, 그러다가 1614년(광해군 6) 폐모(廢母)사건에 연루되어 파면되었으며, 그 뒤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다시 관계에 나아갔던 [[최명길]]의 생애와 주요 활동이 적혀있다. 특히 [[정묘호란]] 때 국왕 인조를 강화도로 호종(扈從)하는 한편 청과의 강화(講和)를 주장했다거나 [[병자호란]] 때 청과의 평화 관계를 모색할 수밖에 없음을 직시하고 홀로 청나라 진영에 들어가 화의(和議) 교섭을 성사시키는 등 현실적 외교정책을 주장한 면모가 잘 기술되어 있다.<ref>이완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7286 청주최명길신도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비문에는 1605년(선조 38)에 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典籍)을 지냈고, 그러다가 1614년(광해군 6) 폐모(廢母)사건에 연루되어 파면되었으며, 그 뒤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다시 관계에 나아갔던 [[최명길]]의 생애와 주요 활동이 적혀있다. 특히 [[정묘호란]] 때 국왕 인조를 강화도로 호종(扈從)하는 한편 청과의 강화(講和)를 주장했다거나 [[병자호란]] 때 청과의 평화 관계를 모색할 수밖에 없음을 직시하고 홀로 청나라 진영에 들어가 화의(和議) 교섭을 성사시키는 등 현실적 외교정책을 주장한 면모가 잘 기술되어 있다.<ref>이완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7286 청주최명길신도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2018년 1월 4일 (목) 17:33 기준 최신판
최명길 신도비 (崔鳴吉神道碑) |
|
대표명칭 | 최명길 신도비 |
---|---|
한자표기 | 崔鳴吉神道碑 |
이칭 | 청주 최명길 신도비 |
유형 | 유적 |
시대 | 조선시대 |
지정번호 | 충청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59호 |
지정일 | 1980년 1월 9일 |
소장처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대율리 253-3 |
관련인물 | 최명길 |
|
정의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대율리에 위치한 조선 중기의 비이다.
내용
1702년(조선 숙종 28) 건립된 비문으로 최명길의 생애와 주요 활동이 적혀 있다. 비신 높이는 4.2m 로 현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59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신(碑身) 위에 팔작지붕 모양의 덮개돌을 얹은 일반 형식인데, 1980년 비의 보호를 위해 비각(碑閣)을 세웠으나, 이미 오랜 시간을 거치며 풍화되어 판독은 거의 불가능하다. 비문은 박세당(朴世堂)이 짓고 글씨는 최창대(崔昌大)가 썼다.[1]
비문에는 1605년(선조 38)에 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典籍)을 지냈고, 그러다가 1614년(광해군 6) 폐모(廢母)사건에 연루되어 파면되었으며, 그 뒤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다시 관계에 나아갔던 최명길의 생애와 주요 활동이 적혀있다. 특히 정묘호란 때 국왕 인조를 강화도로 호종(扈從)하는 한편 청과의 강화(講和)를 주장했다거나 병자호란 때 청과의 평화 관계를 모색할 수밖에 없음을 직시하고 홀로 청나라 진영에 들어가 화의(和議) 교섭을 성사시키는 등 현실적 외교정책을 주장한 면모가 잘 기술되어 있다.[2]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최명길 신도비 | 최명길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최명길 신도비 | 박세당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최명길 신도비 | 최창대 | A는 B에 의해 필사되었다 | A dcterms:publisher B |
최명길 신도비 | 광해군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최명길 신도비 | 인조반정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최명길 신도비 | 정묘호란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최명길 신도비 | 병자호란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702년 | 최명길 신도비가 건립되었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6.743978 | 127.519729 | 최명길 신도비가 위치한다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웹자원
- 이완우, "청주최명길신도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완우, "청주최명길신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