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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에 뛰어나 1744년([[조선 영조|영조]] 20) [[영조 어진|영조어진(英祖御眞)]] 도사(圖寫)에 참여하였으며, 1748년에는 [[숙종 어진]] 모사의 주관화사(主管畫師)로 활약하였다.  특히 초상화에 뛰어났다. [[이규상|이규상(李圭象)]]의 『일몽고(一夢稿)』에 따르면, [[조선 영조|영조]] 연간의 문관·무관·종친 등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들의 초상화는 대부분 그의 손에 의해 그려졌다고 한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85709 장경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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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에 뛰어나 1744년([[조선 영조|영조]] 20) [[영조 어진|영조어진(英祖御眞)]] 도사(圖寫)에 참여하였으며, 1748년에는 [[숙종 어진]] 도사의 주관화사(主管畫師)로 활약하였다.  특히 초상화에 뛰어났다. [[이규상|이규상(李圭象)]]의 『일몽고(一夢稿)』에 따르면, [[조선 영조|영조]] 연간의 문관·무관·종친 등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들의 초상화는 대부분 그의 손에 의해 그려졌다고 한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85709 장경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유작으로 1745년 아버지 득만을 비롯하여 정홍래(鄭弘來)·조창희(趙昌禧)와 더불어 1744년 기로소에 들어간 영조와 8인의 대신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제작한 「[[기사경회첩|기사경회첩(耆社慶會帖)]]」이 있는데, 훈염법(暈染法) 위주로 다루어지던 조선 후기 초상화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8260 장경주]",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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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작으로 1745년 아버지 득만을 비롯하여 [[정홍래|정홍래(鄭弘來)]]·[[조창희|조창희(趙昌禧)]]와 더불어 1744년 기로소에 들어간 [[조선 영조|영조]]와 8인의 대신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제작한 「[[기사경회첩|기사경회첩(耆社慶會帖)]]」이 있는데, 훈염법(暈染法) 위주로 다루어지던 조선 후기 초상화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8260 장경주]",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또 초상화를 모사한 최초본은 모두 하나의 책으로 묶어 그의 집안에 두었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벼슬은 사천현감(泗川縣監)을 거쳐 지사(知事)에까지 이르렀다고 하는데, 이 역시 고증할 길이 없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85709 장경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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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초상화를 모사한 최초본은 모두 하나의 책으로 묶어 그의 집안에 두었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벼슬은 사천현감(泗川縣監)을 거쳐 지사(知事)에까지 이르렀다고 하는데, 이 역시 고증할 길이 없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85709 장경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지식 관계망'''==
 
=='''지식 관계망'''==

2018년 1월 14일 (일) 15:00 기준 최신판

장경주(張景周)
대표명칭 장경주
한자표기 張景周
생몰년 1710년-
본관 인동(仁同)
예보(禮甫)
시대 조선
득만(得萬)



정의

조선 후기의 화가이다.

내용

가계

본관은 인동(仁同)이고 자는 예보(禮甫)이다. 인동장씨 화원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동추(同樞)를 지낸 득만(得萬)의 둘째아들이다.[1]

작품 활동

초상에 뛰어나 1744년(영조 20) 영조어진(英祖御眞) 도사(圖寫)에 참여하였으며, 1748년에는 숙종 어진 도사의 주관화사(主管畫師)로 활약하였다. 특히 초상화에 뛰어났다. 이규상(李圭象)의 『일몽고(一夢稿)』에 따르면, 영조 연간의 문관·무관·종친 등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들의 초상화는 대부분 그의 손에 의해 그려졌다고 한다.[2]

유작으로 1745년 아버지 득만을 비롯하여 정홍래(鄭弘來)·조창희(趙昌禧)와 더불어 1744년 기로소에 들어간 영조와 8인의 대신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제작한 「기사경회첩(耆社慶會帖)」이 있는데, 훈염법(暈染法) 위주로 다루어지던 조선 후기 초상화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3]

또 초상화를 모사한 최초본은 모두 하나의 책으로 묶어 그의 집안에 두었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벼슬은 사천현감(泗川縣監)을 거쳐 지사(知事)에까지 이르렀다고 하는데, 이 역시 고증할 길이 없다.[4]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윤증 초상(전신상) 장경주 A는 B가 그렸다 A dcterms:creator B
윤증 초상(반신상) 장경주 A는 B가 그렸다 A dcterms:creator B
영당기적 장경주 A는 B를 언급한다 A mentions B

시각자료

주석

  1. "장경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장경주", 『두산백과』online.
  3. "장경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장경주", 『두산백과』online.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웹 자원
    • "장경주", 『두산백과』online.
    • "장경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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