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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경종실록』 권7, 경종 2년(1722) 4월 9일(계해), [http://sillok.history.go.kr/id/kta_10204009_002 영의정 조태구가 목호룡에 의해 무함된 왕세제를 안심시키고 효우할 것을 청하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5월 07일</ref> | <ref>『경종실록』 권7, 경종 2년(1722) 4월 9일(계해), [http://sillok.history.go.kr/id/kta_10204009_002 영의정 조태구가 목호룡에 의해 무함된 왕세제를 안심시키고 효우할 것을 청하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5월 07일</ref> | ||
− | ===[[소론]]의 최종 목표였던 [[조선 영조 | 영조]] | + | ===[[소론]]의 최종 목표였던 [[조선 영조 | 영조]]=== |
− | 이에 [[목호룡]]을 포함한 [[소론]]파 사람들은 또다시 '[[소훈이씨]]의 독살은 [[경종]]을 독살하기 위한 예비시험이었고, 본래 본 목적은 궁인을 이용하여 [[경종]]을 독살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 + | 이에 [[목호룡]]을 포함한 [[소론]]파 사람들은 또다시 '[[소훈이씨]]의 독살은 [[경종]]을 독살하기 위한 예비시험이었고, 본래 본 목적은 궁인을 이용하여 [[경종]]을 독살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이를 추적하다보면 다음과 같은 형태로 [[인임옥사]]가 진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목호룡]]이 고변한 내용 바탕으로 [[노론]] 자제들의 역모와 [[소훈이씨]] 독살로 [[조선 영조 | 영조]]가 복수하려 하였다고 [[목호룡]]이 고변한 것과 여기에 거론된 [[노론]] 자제들을 문초하여 역모 사실을 받아내려 한 것이다. 두 번째는 [[경종]]이 [[조선 영조 | 영조]]의 역모에 대해서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소훈이씨]]의 독살은 독약의 성능을 시험하려고 [[노론]]쪽에서 벌인 일이며 최종적 목표는 궁인을 시켜서 [[경종]]을 독살하는 것이었다는 주장하는 단계이다. 거기에 [[조선 영조 | 영조]]의 처조카인 [[서덕수]]가 [[노론]] 자제들과 역모를 품었다고 하였다. 세 번째 단계로는, 본격적으로 [[소훈이씨]]의 독살에 관련된 궁인을 색출하는 일과 환관 [[장세상]]을 역어서 [[노론]]의 자제들과 궁내 사람들이 호응하여 [[경종]]을 암살하려고 했다고 역모의 전말을 밝힌다는 것이었다. |
<ref>『경종실록』 권8, 경종 2년(1722) 5월 12일(병신), [http://sillok.history.go.kr/id/kta_10205012_001 이정식의 공초],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5월 07일</ref> | <ref>『경종실록』 권8, 경종 2년(1722) 5월 12일(병신), [http://sillok.history.go.kr/id/kta_10205012_001 이정식의 공초],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5월 07일</ref> | ||
<ref>『경종실록』 권12, 경종 3년(1723) 4월 25일(갑술), [http://sillok.history.go.kr/id/kta_10304025_002 독약을 쓴 김성의 궁인을 찾아내어 안핵하게 하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5월 07일</ref> | <ref>『경종실록』 권12, 경종 3년(1723) 4월 25일(갑술), [http://sillok.history.go.kr/id/kta_10304025_002 독약을 쓴 김성의 궁인을 찾아내어 안핵하게 하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5월 07일</ref> | ||
===조정을 장악한 [[조선 경종|경종]]=== | ===조정을 장악한 [[조선 경종|경종]]=== | ||
− | 이런 사태 속에서 대부분의 [[노론]]세력들은 유배나 참형 당하여 몰락하는 상황이었다. 이득을 본 당파는 [[소론]]이라 할 수 있으나 이것은 표면적이고, 실제 크게 이득을 본 사람은 바로 [[조선 경종|경종]]이었다. [[경종]]즉위 초부터 이어져온 정치적 싸움은 [[남인]]과 관련된 [[장희빈]] 소생이라는 정당성 문제도 있었고, [[경종]]을 지지하는 [[소론]] 또한 [[조선 영조|영조]]를 지지하는 [[노론]]과 비교하면 그 세력이 매우 약했다. 하지만 현재 재위중인 군주라는 무기와 노론이 찬성했던 대리청정이 부정적인 여론으로 작용하였다는 것을 | + | 이런 사태 속에서 대부분의 [[노론]]세력들은 유배나 참형 당하여 몰락하는 상황이었다. 이득을 본 당파는 [[소론]]이라 할 수 있으나 이것은 표면적이고, 실제 크게 이득을 본 사람은 바로 [[조선 경종|경종]]이었다. [[경종]] 즉위 초부터 이어져온 정치적 싸움은 [[남인]]과 관련된 [[장희빈]] 소생이라는 정당성 문제도 있었고, [[경종]]을 지지하는 [[소론]] 또한 [[조선 영조|영조]]를 지지하는 [[노론]]과 비교하면 그 세력이 매우 약했다. 하지만 [[경종]]은 현재 재위중인 군주라는 무기와 노론이 찬성했던 대리청정이 부정적인 여론으로 작용하였다는 것을 이용하였다. 그 결과 [[노론]] 핵심 세력은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조선 영조 | 영조]]는 명분상 정치적 입지가 좁아져 무늬만 왕세제인 명분상만의 직함을 갖게 된 것이다. |
<ref>『경종실록』 권6, 경종 2년(1722) 3월 29일(갑인), [http://sillok.history.go.kr/id/kta_10203029_002 왕세제가 조신들의 숙배를 받지 않으려 하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5월 07일</ref> | <ref>『경종실록』 권6, 경종 2년(1722) 3월 29일(갑인), [http://sillok.history.go.kr/id/kta_10203029_002 왕세제가 조신들의 숙배를 받지 않으려 하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5월 07일</ref> | ||
===[[경종]]의 실패한 꿈과 [[조선 영조 | 영조]]의 즉위=== | ===[[경종]]의 실패한 꿈과 [[조선 영조 | 영조]]의 즉위=== | ||
− | 다시 1년 후에 이루어진 [[목호룡]]의 고변은 남아있는 [[노론]]세력을 완전히 말살하여 없애는데 큰 이점으로 작용하였다. 만약 [[경종]]이 계속 살아있었으면 최후에는 [[조선 영조 | 영조]]까지도 왕세제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있는 정치적 세력이 완성되고 있었다. 하지만 [[경종]]은 병환으로 끝내 사망하였고, [[조선 영조 | 영조]]가 즉위하면서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위치는 뒤집혀지게 된다. [[조선 영조 | 영조]]는 [[신임사화|임인옥사]]때 유배 갔거나 퇴진한 [[노론]]인사들을 정계로 복귀시켰다. 그때 살아남은 [[노론]] 인물들이 [[신임사화|임인옥사]]에 대한 정당성을 뒤집기 위해 핵심 논점으로 사용한 것이 [[소훈이씨]]의 | + | 다시 1년 후에 이루어진 [[목호룡]]의 고변은 남아있는 [[노론]]세력을 완전히 말살하여 없애는데 큰 이점으로 작용하였다. 만약 [[경종]]이 계속 살아있었으면 최후에는 [[조선 영조 | 영조]]까지도 왕세제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있는 정치적 세력이 완성되고 있었다. 하지만 [[경종]]은 병환으로 끝내 사망하였고, [[조선 영조 | 영조]]가 즉위하면서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위치는 뒤집혀지게 된다. [[조선 영조 | 영조]]는 [[신임사화|임인옥사]]때 유배 갔거나 퇴진한 [[노론]]인사들을 정계로 복귀시켰다. 그때 살아남은 [[노론]] 인물들이 [[신임사화|임인옥사]]에 대한 정당성을 뒤집기 위해 핵심 논점으로 사용한 것이 [[소훈이씨]]의 독살설이었다. 이 이야기의 첫 번째 쟁점은 1720년 겨울에 [[경종]]이 약을 먹고 토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 약을 전달한 사람이 [[이이명]]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이명]]은 청에 사신으로 가서 1721년 봄에 귀국하였으므로 시기가 맞지 않았다. 두 번째 쟁점은 문초를 자백받은 증언에서 [[장세상]]은 [[소훈이씨]]가 11월에 죽었다고 하였고, [[서덕수]]는 6월에 죽었다고 하여 증언의 신빙성이 의심되었다. 이 밖에 [[민진원]]이 여러가지 사실을 뒤집는 증언들을 하여 [[노론]]이 정계로 복귀하는 데 정당성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이 작업은 [[조선 영조|영조]]가 즉위하고 나서 이 사건의 원흉인 [[목호룡]]과 [[김일경]]을 처단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
<ref>오세옥, 『승정원일기』 , 영조 즉위년(1724) 9월 11일(신해), [http://db.itkc.or.kr/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S&jwId=F00&moId=090&daId=110&gaLid=314&gaId=&yoId=&ilId=&leId= 좌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고전종합 DB』<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 최종확인: 2017년 05월 07일</ref> | <ref>오세옥, 『승정원일기』 , 영조 즉위년(1724) 9월 11일(신해), [http://db.itkc.or.kr/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S&jwId=F00&moId=090&daId=110&gaLid=314&gaId=&yoId=&ilId=&leId= 좌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고전종합 DB』<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 최종확인: 2017년 05월 07일</ref> | ||
<ref>『영조실록』 권2, 영조 즉위년(1724) 12월 8일(정축), [http://sillok.history.go.kr/id/kua_10012008_001 김일경과 목호룡을 친국하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5월 07일 | <ref>『영조실록』 권2, 영조 즉위년(1724) 12월 8일(정축), [http://sillok.history.go.kr/id/kua_10012008_001 김일경과 목호룡을 친국하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5월 07일 |
2017년 12월 12일 (화) 21:32 기준 최신판
소훈이씨제문 | |
한자명칭 | 昭訓李氏祭文 |
---|---|
영문명칭 | A Korean translation of funeral oration for Sonhun Yi written by her husband Yeongjo |
작자 | 영조 |
간행시기 | 1721년(경종1) |
소장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청구기호 | 2784(한문), 2786(한글) |
유형 | 고문서 |
크기(세로×가로) | 31.0×170.0cm(한문), 27.9×152.8cm(한글) |
판본 | 목활자본(정리자 한글활자) |
수량 | 1장 |
표기문자 | 한문, 한글 |
목차
정의
1721년(조선 경종 1) 11월 19일에 소훈이씨를 위해 왕세제였던 영조가 직접 지은 제문을 한글로 옮긴 것이다.
내용
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1721년(경종 1) 11월 19일에 소훈이씨)를 위해 왕세제였던 영조가 직접 지은 제문을 한글로 옮긴 것이다. 후일 정빈(靖嬪)으로 추증된 소훈이씨(昭訓李氏)는 영조가 왕세제로 책봉됨에 따라 이보다 한 달 앞선 10월 3일에 소훈의 작위를 받고 후궁이 되었으나, 11월 16일에 세상을 떠났다. 제문은 지난날의 회상과 소훈이씨에 대한 추억, 영조 자신의 비통한 심정 등을 담고 있다. 소훈이씨는 온순한 성품과 법도 있는 행실을 갖고 있었으며, 영조와는 어릴 적부터 얼굴을 익혀왔던 사이로 지기(知己)와도 같은 관계를 유지했다. 이 때문에 영조의 슬픔이 적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제문은 한문본의 독음을 한글로 그대로 옮긴 것이다. 후궁의 제례에는 남성이 참석할 수 없었으므로 상궁 등 여관(女官)이 읽을 수 있도록 한자의 음을 그대로 옮긴 것인데, 한글본에는 끊어 읽어야 할 위치에 검은 먹으로 표점이 찍혀 있다.[1]
소훈이씨의 죽음과 당시 상황
소훈이씨와 영조의 관계는 위 내용처럼 매우 각별하였다. 그러나 당시 형제간인 경종과 영조가 보이지 않게 정치적 견제를 하는 시기였고, 그들을 따르는 소론과 노론도 서로를 비방하느라 정신이 없던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소훈이씨의 죽음은 영조에게는 개인적 비극이었으나 정치싸움에 사활을 걸던 소론에게는 이것만큼 좋은 기회는 없었다. 더군다나 당시 노론은 신축환국으로 명분을 잃고 핵심 세력이 정계에서 축출된 상황이었다. 또한 신축환국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소훈이씨의 죽음은 조선 영조와 엮어 활용하기에 충분한 소재가 되었다.
임인옥사와 소훈이씨의 독살설
신축환국이 일어난지 5개월 후 목호룡이란 사람이 '노론의 어린 자제들인, 정인중, 김용택, 이희지, 심상길, 홍의인, 홍철인, 이기지, 서덕수 등이 경종을 헐뜯고 독살하려 하였으며, 소훈이씨가 노론에게 독살되어, 화가난 영조가 복수를 위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고변을 하였다.[2] 이 여파로 임인옥사가 일어났으며 수많은 노론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여기에 관련된 사람들로 광산김씨 상언에 언급된 이이명, 이익명과 이봉상이 있었다. 당시 소론파 사람들은 소훈이씨의 죽음을 영조의 반란으로 엮으려고 하였으나, 경종은 소론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았다. [3]
소론의 최종 목표였던 영조
이에 목호룡을 포함한 소론파 사람들은 또다시 '소훈이씨의 독살은 경종을 독살하기 위한 예비시험이었고, 본래 본 목적은 궁인을 이용하여 경종을 독살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이를 추적하다보면 다음과 같은 형태로 인임옥사가 진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목호룡이 고변한 내용 바탕으로 노론 자제들의 역모와 소훈이씨 독살로 영조가 복수하려 하였다고 목호룡이 고변한 것과 여기에 거론된 노론 자제들을 문초하여 역모 사실을 받아내려 한 것이다. 두 번째는 경종이 영조의 역모에 대해서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소훈이씨의 독살은 독약의 성능을 시험하려고 노론쪽에서 벌인 일이며 최종적 목표는 궁인을 시켜서 경종을 독살하는 것이었다는 주장하는 단계이다. 거기에 영조의 처조카인 서덕수가 노론 자제들과 역모를 품었다고 하였다. 세 번째 단계로는, 본격적으로 소훈이씨의 독살에 관련된 궁인을 색출하는 일과 환관 장세상을 역어서 노론의 자제들과 궁내 사람들이 호응하여 경종을 암살하려고 했다고 역모의 전말을 밝힌다는 것이었다. [4] [5]
조정을 장악한 경종
이런 사태 속에서 대부분의 노론세력들은 유배나 참형 당하여 몰락하는 상황이었다. 이득을 본 당파는 소론이라 할 수 있으나 이것은 표면적이고, 실제 크게 이득을 본 사람은 바로 경종이었다. 경종 즉위 초부터 이어져온 정치적 싸움은 남인과 관련된 장희빈 소생이라는 정당성 문제도 있었고, 경종을 지지하는 소론 또한 영조를 지지하는 노론과 비교하면 그 세력이 매우 약했다. 하지만 경종은 현재 재위중인 군주라는 무기와 노론이 찬성했던 대리청정이 부정적인 여론으로 작용하였다는 것을 이용하였다. 그 결과 노론 핵심 세력은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영조는 명분상 정치적 입지가 좁아져 무늬만 왕세제인 명분상만의 직함을 갖게 된 것이다. [6]
경종의 실패한 꿈과 영조의 즉위
다시 1년 후에 이루어진 목호룡의 고변은 남아있는 노론세력을 완전히 말살하여 없애는데 큰 이점으로 작용하였다. 만약 경종이 계속 살아있었으면 최후에는 영조까지도 왕세제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있는 정치적 세력이 완성되고 있었다. 하지만 경종은 병환으로 끝내 사망하였고, 영조가 즉위하면서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위치는 뒤집혀지게 된다. 영조는 임인옥사때 유배 갔거나 퇴진한 노론인사들을 정계로 복귀시켰다. 그때 살아남은 노론 인물들이 임인옥사에 대한 정당성을 뒤집기 위해 핵심 논점으로 사용한 것이 소훈이씨의 독살설이었다. 이 이야기의 첫 번째 쟁점은 1720년 겨울에 경종이 약을 먹고 토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 약을 전달한 사람이 이이명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이명은 청에 사신으로 가서 1721년 봄에 귀국하였으므로 시기가 맞지 않았다. 두 번째 쟁점은 문초를 자백받은 증언에서 장세상은 소훈이씨가 11월에 죽었다고 하였고, 서덕수는 6월에 죽었다고 하여 증언의 신빙성이 의심되었다. 이 밖에 민진원이 여러가지 사실을 뒤집는 증언들을 하여 노론이 정계로 복귀하는 데 정당성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이 작업은 영조가 즉위하고 나서 이 사건의 원흉인 목호룡과 김일경을 처단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7] [8]
소훈이씨의 죽음과 당쟁
소훈이씨가 죽은 1721년부터 영조의 즉위년인 1725년까지, 그녀의 죽음에 관한 독살설은 항상 소론이 노론을 잡는 무기로 쓰였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죽음에 대한 사실은 묻히고 오로지 정치적 쟁점으로 비화되었다. 이는 조선시대 비빈의 삶의 비참함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소훈이씨가 낳은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효장세자이다. 하지만 효장세자는 10세의 나이로 1728년 (영조 4)에 요절하였다. 훗날 사도세자가 죽고 적장자인 정조가 남았는데, 효장세자에게 정조를 양자로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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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훈이씨제문 (해독) |
지식 관계망
- 소훈이씨제문에 대한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소훈이씨제문 | 소훈이씨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소훈이씨제문 | 조선 영조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조선 영조 | 소훈이씨 | A는 B의 남편이다 | A ekc:hasWife B |
소훈이씨 | 효장세자 | A는 B의 어머니이다 | A ekc:hasSon B |
정조 | 효장세자 | A는 B의 양자이다 | A ekc:hasAdoptedHeir B |
소훈이씨 | 소훈이씨 독살 사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소훈이씨 독살 사건 | 신축환국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소훈이씨 독살 사건 | 임인옥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장세상 | 소훈이씨 독살 사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서덕수 | 소훈이씨 독살 사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노론 | 신축환국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소론 | 신축환국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노론 | 임인옥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소론 | 임인옥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목호룡 | 임인옥사 | A는 B를 주도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김일경 | 임인옥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소론 | 목호룡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소론 | 김일경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조선 경종 | 신축환국 | A는 B를 주도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조선 경종 | 임인옥사 | A는 B를 주도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조선 영조 | 신축환국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조선 영조 | 임인옥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이희지 | 임인옥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정인종 | 임인옥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김용택 | 임인옥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홍철인 | 임인옥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홍의인 | 임인옥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심상길 | 임인옥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이기지 | 임인옥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이희지 | 노론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정인종 | 노론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김용택 | 노론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홍철인 | 노론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홍의인 | 노론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심상길 | 노론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이기지 | 노론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이희지 | 노론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조선 영조 | 정순왕후 | A는 B의 남편이다 | A ekc:hasWife B |
서명백 | 정순왕후 | A는 B와 형제이다 | A ekc:hasBrother B |
서덕수 | 서명백 | A는 B의 아들이다 | A ekc:hasFather B |
이익명 | 광산김씨 상언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이이명 | 광산김씨 상언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이봉상 | 광산김씨 상언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이기지 | 광산김씨 상언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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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지 | 이이명 | A는 B의 아들이다 | A ekc:hasFather B |
이익명 | 이이명 | A는 B의 형제이다 | A ekc:hasBrother B |
노론 | 이봉상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노론 | 이기지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노론 | 이익명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노론 | 이이명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장희빈 | 조선 경종 | A는 B의 어머니이다 | A ekc:hasSon B |
장희빈 | 남인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721년 | 조선 영조가 소훈이씨제문을 저술하였다 |
1721년 | 신축환국이 일어났다 |
1722년 | 임인옥사가 일어났다 |
1727년 | 광산김씨가 광산김씨 상언을 올렸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7.391976 | 127.054351 | 소훈이씨제문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보관되어 있다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228쪽.
- ↑ 『경종실록』 권6, 경종 2년(1722) 3월 27일(임자), 목호룡이 상변하여 정인중·김용택 등의 역모를 고하다,
『조선왕조실록』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5월 07일 - ↑ 『경종실록』 권7, 경종 2년(1722) 4월 9일(계해), 영의정 조태구가 목호룡에 의해 무함된 왕세제를 안심시키고 효우할 것을 청하다,
『조선왕조실록』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5월 07일 - ↑ 『경종실록』 권8, 경종 2년(1722) 5월 12일(병신), 이정식의 공초,
『조선왕조실록』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5월 07일 - ↑ 『경종실록』 권12, 경종 3년(1723) 4월 25일(갑술), 독약을 쓴 김성의 궁인을 찾아내어 안핵하게 하다,
『조선왕조실록』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5월 07일 - ↑ 『경종실록』 권6, 경종 2년(1722) 3월 29일(갑인), 왕세제가 조신들의 숙배를 받지 않으려 하다,
『조선왕조실록』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5월 07일 - ↑ 오세옥, 『승정원일기』 , 영조 즉위년(1724) 9월 11일(신해), 좌목,
『한국고전종합 DB』online , 한국고전번역원. 최종확인: 2017년 05월 07일 - ↑ 『영조실록』 권2, 영조 즉위년(1724) 12월 8일(정축), 김일경과 목호룡을 친국하다,
『조선왕조실록』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5월 07일
참고문헌
유용한 정보
- 우인수, 정빈이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05월 07일
더 읽을 거리
- 사료
- 『경종실록』 권9, 경종 2년(1722) 8월 16일(기사), 이헌의 결안,
『조선왕조실록』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5월 07일 - 『경종실록』 권9, 경종 2년(1722) 8월 18일(신미), 영의정 조태구 등이 독약을 쓴 김성의 궁인을 조사해 낼 것을 청하다,
『조선왕조실록』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5월 07일 - 『경종실록』 권9, 경종 2년(1722) 9월 17일(기해), 오서종의 공초,
『조선왕조실록』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5월 07일 - 『경종실록』 권14, 경종 4년(1724) 윤4월 1일(갑술), 양사에서 독약을 쓴 김성의 궁인을 조사하여 내어 벌할 것을 청하다,
『조선왕조실록』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5월 07일 - 『경종실록』 권14, 경종 4년(1724) 5월 18일(경신), 김성 궁인 처벌 요구의 전말,
『조선왕조실록』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5월 07일 - 『영조실록』 권4, 영조 1년(1725) 3월 25일(계해), 민진원이 삼수(대급수·소급수·평지수)에 대하여 자세히 아뢰다,
『조선왕조실록』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5월 07일
- 『경종실록』 권9, 경종 2년(1722) 8월 16일(기사), 이헌의 결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