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소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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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651년(조선 효종2)에 필사한 자료이다. [[황여일]](黃汝一, 1556-1622)의 처 숙부인 [[황여읠 처 완산 이씨|완산 이씨]]가 그의 서손(庶孫)인 [[황석우]]에 대해서 적조모(嫡祖母)에 대한 능욕죄, 노주(奴主) 배반죄, 명문도매죄(明文盜賣罪) 등을 물어달라고 청하는 민원 문서이다. 『[[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유서]]』와 내용이 연결된다. [[황여일 처 의성 김씨|의성 김씨]]의 아들 [[황중윤]](黃中允, 1577~?)은 자기 소유의 여자 종 [[황중윤 첩 분개|분개]]를 첩으로 맞이하여 자식 둘을 낳았는데 [[황석우|석우]](石友)와 [[황석심|석심]](石心)이었다. [[황여일 처 완산 이씨|완산 이씨]] 입장에서는 이들은 서손(庶孫), 더 정확히 얼손(孽孫)이었다. [[황석우|석우]]는 문중에서 예조 입안(立案)까지 해 둔 계후자 [[황석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자(孽子)이지만 아버지 피를 물려받은 자신이 아버지의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비슷한 처지인 [[황중민|중민]](中敏)과 함께 종통을 빼앗고자 도모한다. 즉 [[황중민|중민]]이 [[황여일 처 완산 이씨|완산 이씨]] 소생의 맏아들이니 [[황여일]]의 적통이자 대종손이 되어야 하며 본인은 아버지 [[황중윤|중윤]]의 봉사권과 재산상속권을 가져와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그의 주장이 옳았지만 관행적으로는 서자가 양반의 가계(家系)를 잇는다는 것은 좀처럼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제동이 걸린 [[황석우|석우]]는 '관행'의 파괴에 도전한다. | |
− | 그의 어머니는 [[황중윤 첩 분개|분개]]라는 이름의 여종 | + | 그의 어머니는 [[황중윤 첩 분개|분개]]라는 이름의 여종[婢]이었으며 원래 주인은 이 문서의 주인공 [[황여일 처 완산 이씨|완산 이씨]]였다. [[황중윤]]은 아버지의 후취인 [[황여일 처 완산 이씨|이씨]]에게 [[황중윤 첩 분개|분개]]를 상속해달라고 간절히 요청하여 [[완산이씨|이씨]]가 그에게 여종을 상속하였다. 따라서 [[황여일 처 완산 이씨|완산 이씨]], [[황중윤]]과 [[황석우]]는 조손(祖孫) 혹은 부자 관계인 동시에 함께 상전과 노비라는 관계에 있었다. 가족과 신분관계가 묘하게 얽혔지만 조선시대에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황석우|석우]]는 아버지 봉사권을 주장하다 [[황여일 처 완산 이씨|완산 이씨]]와 다툼을 벌여 3년이나 [[백령도]]에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또 그는 자신이 종의 신분이라는 사실을 적은 노비문서를 남에게 팔아버리고 인연이 없는 [[서울]]로 도피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황석래]]의 양자를 파기해달라는 [[상언|상언(上言)]]을 올려 [[황여일 처 완산 이씨|완산 이씨]]를 비롯한 문중인사들을 큰 충격에 빠트린다. 문서에 적조모 이씨에 대한 능욕죄(凌辱罪), 노비로서 주인을 배반한 반주죄(反主罪)를 가장 큰 죄목으로 다루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
[[황여일 처 완산 이씨|완산 이씨]]의 소지(所志)는 그녀의 도서(圖書)가 찍혀 있어 원본임이 분명하지만 경상 감사의 결재, 즉 제사(題辭)가 없다. 이 문서는 실제로 시행은 되지 않았다. 다만 유서와 함께 후손들에게 보존하게 하여 재발 방지 및 종통의 정당성 확보를 목적으로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162쪽.</REF> | [[황여일 처 완산 이씨|완산 이씨]]의 소지(所志)는 그녀의 도서(圖書)가 찍혀 있어 원본임이 분명하지만 경상 감사의 결재, 즉 제사(題辭)가 없다. 이 문서는 실제로 시행은 되지 않았다. 다만 유서와 함께 후손들에게 보존하게 하여 재발 방지 및 종통의 정당성 확보를 목적으로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162쪽.</REF> | ||
− | ===계속된 재산분쟁 | + | ===계속된 재산분쟁=== |
[[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소지]]에 관한 내용은, 앞의 [[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유서]]에서 이어진 내용이다. [[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유서|유서]] 내용의 경우 [[황석우]]가 봉사와 재산 상속에 관하여 모의와 분란을 일으킨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그러나 5년 후 『[[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소지]]』에서는 [[황석우]]가 상언(上言)까지 하여 공개적으로 집안의 분쟁이 외부로 알려졌고, 법적 분쟁인 송사까지 확대된 것이다. 이 때문에 [[황여일 처 완산 이씨|완산 이씨]]는 직접 [[황석우]]를 고발하는 소지(소장을 적는 종이)를 작성하여 경상감사에게 주어 [[황석우]]를 고발하려고 한 것이다. | [[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소지]]에 관한 내용은, 앞의 [[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유서]]에서 이어진 내용이다. [[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유서|유서]] 내용의 경우 [[황석우]]가 봉사와 재산 상속에 관하여 모의와 분란을 일으킨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그러나 5년 후 『[[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소지]]』에서는 [[황석우]]가 상언(上言)까지 하여 공개적으로 집안의 분쟁이 외부로 알려졌고, 법적 분쟁인 송사까지 확대된 것이다. 이 때문에 [[황여일 처 완산 이씨|완산 이씨]]는 직접 [[황석우]]를 고발하는 소지(소장을 적는 종이)를 작성하여 경상감사에게 주어 [[황석우]]를 고발하려고 한 것이다. | ||
<ref>안승준, 「嫡庶 사이 名分과 利害의 分岐와 아우성」, 『장서각소리 금요강독회』,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16, 5쪽. </ref> | <ref>안승준, 「嫡庶 사이 名分과 利害의 分岐와 아우성」, 『장서각소리 금요강독회』,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16, 5쪽. </ref> |
2017년 12월 10일 (일) 13:05 기준 최신판
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소지 | |
영문명칭 | Yi of Wansan, a wife of Hwang Yeoil, her petition submitted to the authorities |
---|---|
작자 | 황여일 처 완산 이씨 |
간행시기 | 1651년 |
기탁처 | 평해황씨 해월종택 |
소장처 | 한국국학진흥원 |
유형 | 고서 |
크기(세로×가로) | 58.5×78.3㎝ |
판본 | 필사본 |
수량 | 1장 |
표기문자 | 한글 |
목차
정의
참의 황여일의 처 숙부인 완산이씨가 경상감사에게 올린 민원 문서이다.
내용
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1651년(조선 효종2)에 필사한 자료이다. 황여일(黃汝一, 1556-1622)의 처 숙부인 완산 이씨가 그의 서손(庶孫)인 황석우에 대해서 적조모(嫡祖母)에 대한 능욕죄, 노주(奴主) 배반죄, 명문도매죄(明文盜賣罪) 등을 물어달라고 청하는 민원 문서이다. 『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유서』와 내용이 연결된다. 의성 김씨의 아들 황중윤(黃中允, 1577~?)은 자기 소유의 여자 종 분개를 첩으로 맞이하여 자식 둘을 낳았는데 석우(石友)와 석심(石心)이었다. 완산 이씨 입장에서는 이들은 서손(庶孫), 더 정확히 얼손(孽孫)이었다. 석우는 문중에서 예조 입안(立案)까지 해 둔 계후자 황석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자(孽子)이지만 아버지 피를 물려받은 자신이 아버지의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비슷한 처지인 중민(中敏)과 함께 종통을 빼앗고자 도모한다. 즉 중민이 완산 이씨 소생의 맏아들이니 황여일의 적통이자 대종손이 되어야 하며 본인은 아버지 중윤의 봉사권과 재산상속권을 가져와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그의 주장이 옳았지만 관행적으로는 서자가 양반의 가계(家系)를 잇는다는 것은 좀처럼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제동이 걸린 석우는 '관행'의 파괴에 도전한다. 그의 어머니는 분개라는 이름의 여종[婢]이었으며 원래 주인은 이 문서의 주인공 완산 이씨였다. 황중윤은 아버지의 후취인 이씨에게 분개를 상속해달라고 간절히 요청하여 이씨가 그에게 여종을 상속하였다. 따라서 완산 이씨, 황중윤과 황석우는 조손(祖孫) 혹은 부자 관계인 동시에 함께 상전과 노비라는 관계에 있었다. 가족과 신분관계가 묘하게 얽혔지만 조선시대에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석우는 아버지 봉사권을 주장하다 완산 이씨와 다툼을 벌여 3년이나 백령도에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또 그는 자신이 종의 신분이라는 사실을 적은 노비문서를 남에게 팔아버리고 인연이 없는 서울로 도피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황석래의 양자를 파기해달라는 상언(上言)을 올려 완산 이씨를 비롯한 문중인사들을 큰 충격에 빠트린다. 문서에 적조모 이씨에 대한 능욕죄(凌辱罪), 노비로서 주인을 배반한 반주죄(反主罪)를 가장 큰 죄목으로 다루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완산 이씨의 소지(所志)는 그녀의 도서(圖書)가 찍혀 있어 원본임이 분명하지만 경상 감사의 결재, 즉 제사(題辭)가 없다. 이 문서는 실제로 시행은 되지 않았다. 다만 유서와 함께 후손들에게 보존하게 하여 재발 방지 및 종통의 정당성 확보를 목적으로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1]
계속된 재산분쟁
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소지에 관한 내용은, 앞의 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유서에서 이어진 내용이다. 유서 내용의 경우 황석우가 봉사와 재산 상속에 관하여 모의와 분란을 일으킨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그러나 5년 후 『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소지』에서는 황석우가 상언(上言)까지 하여 공개적으로 집안의 분쟁이 외부로 알려졌고, 법적 분쟁인 송사까지 확대된 것이다. 이 때문에 완산 이씨는 직접 황석우를 고발하는 소지(소장을 적는 종이)를 작성하여 경상감사에게 주어 황석우를 고발하려고 한 것이다. [2]
연계 자원 보러 가기 |
• 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소지 (해독) |
지식 관계망
- 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유서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소지 | 황여일 처 완산 이씨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황여일 | 황여일 처 의성 김씨 | A는 B의 남편이다 | A ekc:hasWife B |
황여일 | 황여일 처 완산 이씨 | A는 B의 남편이다 | A ekc:hasWife B |
황여일 처 의성 김씨 | 황중윤 | A는 B의 어머니이다 | A ekc:hasSon B |
황여일 처 완산 이씨 | 황중민 | A는 B의 어머니이다 | A ekc:hasSon B |
황여일 처 완산 이씨 | 황중헌 | A는 B의 어머니이다 | A ekc:hasSon B |
황여일 처 완산 이씨 | 황중순 | A는 B의 어머니이다 | A ekc:hasSon B |
황여일 처 완산 이씨 | 황중원 | A는 B의 어머니이다 | A ekc:hasSon B |
황여일 | 분개 | A는 B의 남편이다 | A ekc:hasWife B |
황중헌 | 황석래 | A는 B의 아버지이다 | A ekc:hasSon B |
황중윤 | 밀양박씨 | A는 B의 남편이다 | A ekc:hasWife B |
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소지 | 평해황씨 해월종택 | A는 B에 소장되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소지 | 한국국학진흥원 | A는 B에 소장되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657년 | 완산이씨가 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소지를 저술하였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6.829987 | 129.439673 | 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소지는 평해황씨 해월종택에 보관되었다 |
36.70183 | 128.810925 | 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소지는 한국국학진흥원에 현재 소장되어 있다 |
주석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162쪽.
- ↑ 안승준, 「嫡庶 사이 名分과 利害의 分岐와 아우성」, 『장서각소리 금요강독회』,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16, 5쪽.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한상권, 「조선시대 訴寃制度의 발달과정」, 『韓國學報』, Vol-19, 일지사, 1993, 65-10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