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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체는 부녀자의 머리숱을 많아 보이게 하려고 덧넣는 머리로 ‘다리’라고도 한다. | 가체는 부녀자의 머리숱을 많아 보이게 하려고 덧넣는 머리로 ‘다리’라고도 한다. | ||
가체[다리]로 머리를 높게 만드는 것은 조선 전기부터 사치스러운 풍속으로 인식되었다. | 가체[다리]로 머리를 높게 만드는 것은 조선 전기부터 사치스러운 풍속으로 인식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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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체는 신라시대에도 있었던 것으로 | + | 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 성덕왕조에 당나라에 인삼과 함께 미체를 보냈다는 내용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가체는 신라시대에도 이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몽고의 영향으로 고려 말기부터 더욱 성행하였다고 한다. [[가체]] 사치 풍조가 날로 심각해지자 [[영조]]는 1749년 궁중 혼례 규범서 『[[국혼정례|국혼정례(國婚定例)]]』를 만들어 왕실에서부터 모범을 보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민간에서 여전히 가체가 유행하자 1756년 가체를 금하고 [[족두리]]로 대체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럼에도 가체는 날로 더 사치스러워졌다. 이후 다시 금체령을 내리기도 하는 등 논의가 끊이지 않았다. |
[[정조]] 대의 가체금지 논의는 1779년 [[송덕상|송덕상(宋德相)]]이 민간에서 가체를 금하고 중국의 제도인 화관을 쓰게 하자고 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정조]]는 가체를 대체할 대안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바로 금지령을 내리지는 않았다. | [[정조]] 대의 가체금지 논의는 1779년 [[송덕상|송덕상(宋德相)]]이 민간에서 가체를 금하고 중국의 제도인 화관을 쓰게 하자고 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정조]]는 가체를 대체할 대안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바로 금지령을 내리지는 않았다. | ||
한동안 논의가 없다가 1788년 [[비변사]] 우통례 [[우정규]]의 상소로 가체 사치 문제가 다시 부상하였다. 특히 [[채제공]]이 가체의 대안 마련 못지않게 가체금지령을 내리는 것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결국 [[정조]]는 1788년 10월 폐지되었던 [[영조]] 대의 가체금지령을 회복하라는 명을 내렸다. ([[정조]]는 가체금지령 결단에 있어 앞서 말한 [[우정규]]와 [[채제공]]의 발언에 큰 영향을 받았음을 『가체신금사목』에서 밝히고 있다. [[영조]] 대의 가체금지령이 구체적이지 않아 실패했음을 고려하여 , [[의정부]]에서 법령을 구체화하여 금지하는 제도와 대안의 형식을 정하여 『가체신금사목』을 작성하게 했다.<ref>이윤미, 「조선후기 가체의 유행과 금지령 시행」,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1, 27-37쪽.</ref> | 한동안 논의가 없다가 1788년 [[비변사]] 우통례 [[우정규]]의 상소로 가체 사치 문제가 다시 부상하였다. 특히 [[채제공]]이 가체의 대안 마련 못지않게 가체금지령을 내리는 것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결국 [[정조]]는 1788년 10월 폐지되었던 [[영조]] 대의 가체금지령을 회복하라는 명을 내렸다. ([[정조]]는 가체금지령 결단에 있어 앞서 말한 [[우정규]]와 [[채제공]]의 발언에 큰 영향을 받았음을 『가체신금사목』에서 밝히고 있다. [[영조]] 대의 가체금지령이 구체적이지 않아 실패했음을 고려하여 , [[의정부]]에서 법령을 구체화하여 금지하는 제도와 대안의 형식을 정하여 『가체신금사목』을 작성하게 했다.<ref>이윤미, 「조선후기 가체의 유행과 금지령 시행」,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1, 27-37쪽.</ref> |
2017년 12월 8일 (금) 22:29 기준 최신판
가체신금사목 | |
한자명칭 | 加髢申禁事目 |
---|---|
영문명칭 | Rules that ban the wig from women |
작자 | 정조, 우정규 |
작성시기 | 1788년 |
간행시기 | 조선후기 |
소장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청구기호 | 2-1819 |
유형 | 고서 |
크기(세로×가로) | 36.5×22.5㎝ |
판본 | 금속활자본(정유자) |
수량 | 1冊 |
표기문자 | 한글, 한자 |
목차
정의
1788년(조선 정조12) 펴낸 책으로 부녀자들의 가체를 금지하는 규정을 기록하였다.
내용
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1책 18장으로 되어 있으며, 한문 원문이 8장, 언해가 10장이고 적상산 사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가체는 부녀자의 머리숱을 많아 보이게 하려고 덧넣는 머리로 ‘다리’라고도 한다. 가체[다리]로 머리를 높게 만드는 것은 조선 전기부터 사치스러운 풍속으로 인식되었다. 1756년 (조선 영조32)가 처음으로 가체 사용을 금하였고,정조는 한 단계 더 나아가 1788년에 가체를 금지하는 세칙을 만들었다. 정조가 가체를 금하는 규정을 정하게 된 계기는 우통례 우정규(禹禎圭, 1718~?)가 올린 『경제야언(經濟野言)』 때문이었다. 조선 정조는 우정규의 주장을 받아들여 가체를 금하는 규정인 「가체신금사목」을 만들어 전국에 배포하였다. 「가체신금사목」은 가체를 금하는 규정을 만들게 된 경위, 가체에 대해 조선 정조에게 올린 대신들의 의견을 나열한 거조(擧條), 가체 금지 규정에 대한 서문과 9개의 시행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체신금사목」은 한자본과 한글본이 함께 실려 있다. 책 앞부분의 한자본에도 일부 조항은 한글 번역이 있다. 이처럼 한자본과 한글본을 동시에 수록한 것은 양반 뿐만 아니라 부녀자와 평민들도 금지조항을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1]
가체신금사목 편찬배경
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 성덕왕조에 당나라에 인삼과 함께 미체를 보냈다는 내용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가체는 신라시대에도 이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몽고의 영향으로 고려 말기부터 더욱 성행하였다고 한다. 가체 사치 풍조가 날로 심각해지자 영조는 1749년 궁중 혼례 규범서 『국혼정례(國婚定例)』를 만들어 왕실에서부터 모범을 보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민간에서 여전히 가체가 유행하자 1756년 가체를 금하고 족두리로 대체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럼에도 가체는 날로 더 사치스러워졌다. 이후 다시 금체령을 내리기도 하는 등 논의가 끊이지 않았다. 정조 대의 가체금지 논의는 1779년 송덕상(宋德相)이 민간에서 가체를 금하고 중국의 제도인 화관을 쓰게 하자고 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정조는 가체를 대체할 대안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바로 금지령을 내리지는 않았다. 한동안 논의가 없다가 1788년 비변사 우통례 우정규의 상소로 가체 사치 문제가 다시 부상하였다. 특히 채제공이 가체의 대안 마련 못지않게 가체금지령을 내리는 것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결국 정조는 1788년 10월 폐지되었던 영조 대의 가체금지령을 회복하라는 명을 내렸다. (정조는 가체금지령 결단에 있어 앞서 말한 우정규와 채제공의 발언에 큰 영향을 받았음을 『가체신금사목』에서 밝히고 있다. 영조 대의 가체금지령이 구체적이지 않아 실패했음을 고려하여 , 의정부에서 법령을 구체화하여 금지하는 제도와 대안의 형식을 정하여 『가체신금사목』을 작성하게 했다.[2]
가체신금사목의 내용과 특징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금지령의 적용 대상을 사대부와 여염집 부인들로 하고 있다. 가체 대용품으로는 쪽머리와 족두리를 사용하게 하였으며 족두리는 검은 천을 이용하여 싸게 했다. 또한 보석과 같이 화려한 머리장식을 금하였다. 법령의 시행 날짜도 정했다. 서울은 동지를 기준으로 법을 시행했고, 지방은 공문이 도착한 후 20일 후부터 법을 시행했다. 법을 어겼을 경우 가장이 처벌받도록 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실제로 처벌한 사례는 찾기 힘들다. 이는 정조가 엄격한 법적 제제보다는 대신들이 스스로 단속하고 백성들이 따르는 '교화'의 방법을 권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3] 또한 『가체신금사목』은 국어사 뿐만 아니라 복식사, 생활사 부분에서도 중요한 자료이다. 이 책에 보이는 언어 양식이 왕의 한글 훈유서인 윤음류와 크게 다르지는 않으나 여인들의 머리장식과 관련된 어휘들이 많다는 점, 사목이기 때문에 이두문이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 하다. 아울러 한문 원문 중에 한글을 이용해 나란히 주석으로 달아 놓은 것도 전달되는 대상이 시행을 담당할 지방 하급관리들이라는 점을 감안한 조치로 생각된다.[4]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가체신금사목 반포 | 가체신금사목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조선 정조 | 가체신금사목 반포 | A는 B를 명령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경제야언 | 우정규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경제야언 | 가체신금사목 반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가체신금사목 | 우정규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비변사 | 우정규 |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 A foaf:member B |
의정부 | 가체신금사목 반포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가체신금사목 | 의정부 | A는 B에 의해 간행되었다 | A dcterms:publisher B |
가체신금사목 | 채제공 | A는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채제공 | 가체신금사목 반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가체신금사목 | 가체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가체신금사목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A는 B에 소장되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788년 | 우정규가 경제야언을 저술하였다 |
1788년 | 정조가 가체신금사목 반포를 명령하였다 |
1788년 | 의정부가 가체신금사목을 간행하였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7.39197 | 127.054387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가체신금사목이 보관되어 있다.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76-77쪽.
- ↑ 이윤미, 「조선후기 가체의 유행과 금지령 시행」,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1, 27-37쪽.
- ↑ 이윤미, 「조선후기 가체의 유행과 금지령 시행」,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1, 39-42쪽.
- ↑ "가체신금사목",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online .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단행본
- 옥영정·이종묵·김문식·이광렬, 『규장각과 책의 문화사』, 2009.
- 논문
- 정해은, 「18세기 조선 여성의 머리치장과 '작은' 저항 : 가체(加髢)를 중심으로」, 『페미니즘 연구』11, 한국여성연구소, 2011.
- 강대민·권승주, 「英·正祖代의 加髢禁止令에 關한 考察」, 『문화전통논집』12,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4.
- 웹자원
- 김동욱, "가체신금사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김동욱, "가체신금사목",
유용한 정보
- 이민주, "목이 부러질지언정…가체, 벗지 못할 욕망", 「런웨이 조선」, 『서울신문』, 작성일: 2017년 4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