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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사(聖住寺)는 신라 말 [[구산선문|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로, 한때는 2,000여 명의 승려가 머물며 수도하던 전국 최고의 절로 손꼽히던 곳이다.<ref>최정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마로니에북스, 2010.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48110&cid=42865&categoryId=42865 성주사지]",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성주사(聖住寺)는 신라 말 [[구산선문|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로, 한때는 2,000여 명의 승려가 머물며 수도하던 전국 최고의 절로 손꼽히던 곳이다.<ref>최정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마로니에북스, 2010.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48110&cid=42865&categoryId=42865 성주사지]",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통일신라 말기에 유행한 [[선종|선종(禪宗)]]은 어려운 불경을 모르더라도 수양을 잘하기만 하면 마음속에 있는 불성을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불교 종파이다. 그리하여 많은 백성의 지지를 받아 크게 유행하였고, [[선종]] 불교의 큰 중심지 절이 전국에 9개가 세워졌는데, 이를 [[구산선문|구산선문(九山禪門)]]이라고 한다. 이 전국 [[구산선문]] 중의 하나가 [[성주산문|성주산문(聖住山門)]]이며 그 중심지가 성주사이다. 특히 [[성주산문]]은 [[구산선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고 많은 승려를 배출한 최대의 산문이었으며, [[무염|낭혜(朗慧)]]는 당시 최고의 선종 승려였다. 성주사는 조선 시대에 [[임진왜란]]을 겪으며 쇠퇴하다가 17세기 말 폐사되었고, 지금은 그 터와 많은 유물이 남아 있어 옛 성주사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C%84%B1%EC%A3%BC%EC%82%AC%EC%A7%80 성주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위키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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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말기에 유행한 [[선종|선종(禪宗)]]은 어려운 불경을 모르더라도 수양을 잘하기만 하면 마음속에 있는 불성을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불교 종파이다. 그리하여 많은 백성의 지지를 받아 크게 유행하였고, [[선종]] 불교의 큰 중심지 절이 전국에 9개가 세워졌는데, 이를 [[구산선문]]이라고 한다. 이 전국 [[구산선문]] 중의 하나가 [[성주산문|성주산문(聖住山門)]]이며 그 중심지가 성주사이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C%84%B1%EC%A3%BC%EC%82%AC%EC%A7%80 성주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위키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역사===
 
===역사===
성주사(聖住寺)는 백제 때 오합사(烏合寺)로 불리다가 승려 [[무염|낭혜]]가 오합사로 오면서 절이 크게 중창되었고 그에 따라 통일신라 [[신라 문성왕|문선왕]] 때에 '성주사'로 개칭된 것이다. 『숭암산 성주사 사적(崇巖山 聖住寺 事蹟)』에 따르면 오합사는 성주사의 전신인데 [[백제 법왕]]이 599년에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원혼을 위무하려는 뜻에서 세운 절이라고 한다. 따라서 오합사는 백제왕실에서 매우 중히 여긴 절이었던 듯하다.<ref>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6 - 지리산 자락』, 돌베개, 2009.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57795&cid=42840&categoryId=42852 성주사터]", 답사여행의 길잡이: 지리산 자락,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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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사(聖住寺)는 백제 때 오합사(烏合寺)로 불리다가 승려 [[무염|낭혜]]가 오합사로 오면서 절이 크게 중창되었고 그에 따라 [[신라 문성왕|문선왕]] 때에 '성주사'로 개칭된 것이다. 『숭암산 성주사 사적(崇巖山 聖住寺 事蹟)』에 따르면 오합사는 성주사의 전신인데 [[백제 법왕]]이 599년에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원혼을 위무하려는 뜻에서 세운 절이라고 한다. 따라서 오합사는 백제왕실에서 매우 중히 여긴 절이었던 듯하다.<ref>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6 - 지리산 자락』, 돌베개, 2009.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57795&cid=42840&categoryId=42852 성주사터]", 답사여행의 길잡이: 지리산 자락,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삼국사기|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하는 오합사는 백제 멸망과 관련된 불우한 이야기를 간직한 절이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의자왕|의자왕]] 15년 5월에 “흰말이 북악에 있는 오합사에 들어가서 불우(佛宇)를 돌며 울다가 며칠 만에 죽었다”는 기록이 있고 『[[삼국유사]]』에도 [[백제 의자왕|의자왕]] 19년에 “오합사에 큰 붉은말이 있어 밤낮 여섯 시에 사원을 돌았다”고 쓰어 있다.<ref>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6 - 지리산 자락』, 돌베개, 2009.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57795&cid=42840&categoryId=42852 성주사터]", 답사여행의 길잡이: 지리산 자락,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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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7일 (월) 00:48 기준 최신판

보령 성주사
(保寧 聖住寺)
대표명칭 보령 성주사
한자 保寧 聖住寺
건립시기 백제시대
창건자 무염



정의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에 있었던 백제시대의 절.

내용

성주사(聖住寺)는 신라 말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로, 한때는 2,000여 명의 승려가 머물며 수도하던 전국 최고의 절로 손꼽히던 곳이다.[1]

통일신라 말기에 유행한 선종(禪宗)은 어려운 불경을 모르더라도 수양을 잘하기만 하면 마음속에 있는 불성을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불교 종파이다. 그리하여 많은 백성의 지지를 받아 크게 유행하였고, 선종 불교의 큰 중심지 절이 전국에 9개가 세워졌는데, 이를 구산선문이라고 한다. 이 전국 구산선문 중의 하나가 성주산문(聖住山門)이며 그 중심지가 성주사이다.[2]

역사

성주사(聖住寺)는 백제 때 오합사(烏合寺)로 불리다가 승려 낭혜가 오합사로 오면서 절이 크게 중창되었고 그에 따라 문선왕 때에 '성주사'로 개칭된 것이다. 『숭암산 성주사 사적(崇巖山 聖住寺 事蹟)』에 따르면 오합사는 성주사의 전신인데 백제 법왕이 599년에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원혼을 위무하려는 뜻에서 세운 절이라고 한다. 따라서 오합사는 백제왕실에서 매우 중히 여긴 절이었던 듯하다.[3]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하는 오합사는 백제 멸망과 관련된 불우한 이야기를 간직한 절이다. 『삼국사기』에는 의자왕 15년 5월에 “흰말이 북악에 있는 오합사에 들어가서 불우(佛宇)를 돌며 울다가 며칠 만에 죽었다”는 기록이 있고 『삼국유사』에도 의자왕 19년에 “오합사에 큰 붉은말이 있어 밤낮 여섯 시에 사원을 돌았다”고 쓰여 있다.[4]

Quote-left.png 현경(顯慶) 4년 기미(己未)에 백제의 오회사(烏會寺, 오합사(烏合寺)라고도 한다)에 커다란 붉은 말이 나타나 밤낮으로 여섯 시간을 절에서 거닐다가 길을 따라 가버렸고, 2월에는 많은 여우들이 의자궁(義慈宮)에 들어왔는데 그 중 흰 여우 한 마리가 좌평의 책상 위에 앉았다. Quote-right.png
출처: 『삼국유사』 권 제1, 제 1기이,「태종춘추공」.[5]


신라 말의 학자인 최치원(崔致遠)낭혜를 기념하며 쓴 비가 바로 낭혜화상부도비(郞慧和尙浮屠碑)이다. 신라시대 부도비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 알려진 이 부도비에는 최치원이 지은 5,000여 자의 글씨가 몸체에 새겨져 있다.[6]

명칭유래

무염국사(無染國師)가 이 절에 있었기에 그를 성인(聖人)으로 보고, 성인이 주석한 절이니 ‘성주사(聖住寺)’라 이름을 붙였으며 산도 마을도 그에 따라 이름이 바뀌었다.[7]

지식관계망

  • 성주산문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보령 성주사지 보령 성주사 A는 B의 터이다 A edm:isRelatedTo B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보령 성주사 A는 B에 있었다 A edm:formerLocation B
보령 성주사지 오층석탑 보령 성주사 A는 B에 있었다 A edm:formerLocation B
보령 성주사지 중앙삼층석탑 보령 성주사 A는 B에 있었다 A edm:formerLocation B
보령 성주사지 동 삼층석탑 보령 성주사 A는 B에 있었다 A edm:formerLocation B
보령 성주사지 서 삼층석탑 보령 성주사 A는 B에 있었다 A edm:formerLocation B
보령 성주사지 석등 보령 성주사 A는 B에 있었다 A edm:formerLocation B
보령 성주사지 석계단 보령 성주사 A는 B에 있었다 A edm:formerLocation B
보령 성주사지 석불입상 보령 성주사 A는 B에 있었다 A edm:formerLocation B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무염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최치원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A ekc:writer B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최인연 A는 B가 비문을 썼다 A ekc:calligrapher B
무염 보령 성주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보령 성주사 성주산문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구산산문 성주선문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선종 구산선문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599년 백제 법왕에 의해 오합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845년 무염이 오합사의 주지가 되어 크게 중창하였다.
신라 문성왕 때 오합사에서 성주사로 개명되었다.
888년 무염성주사에서 입적하였다.

주석

  1. 최정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마로니에북스, 2010. 온라인 참조: "성주사지",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2. "성주사지", 『위키백과』online.
  3.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6 - 지리산 자락』, 돌베개, 2009. 온라인 참조: "성주사터", 답사여행의 길잡이: 지리산 자락,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4.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6 - 지리산 자락』, 돌베개, 2009. 온라인 참조: "성주사터", 답사여행의 길잡이: 지리산 자락,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5. "의자왕 말기 백제 멸망을 암시하는 흉조가 이어진다", 『삼국유사』 권 제1, 제 1기이, 「태종춘추공」,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국사편찬위원회.
  6. 최정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마로니에북스, 2010. 온라인 참조: "성주사지",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7.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6 - 지리산 자락』, 돌베개, 2009. 온라인 참조: "성주사터", 답사여행의 길잡이: 지리산 자락,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참고문헌

  • 조유전, "보령성주사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최정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마로니에북스, 2010. 온라인 참조: "성주사지",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6 - 지리산 자락』, 돌베개, 2009. 온라인 참조: "성주사터", 답사여행의 길잡이: 지리산 자락,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성주사지", 『위키백과』online.
  • "의자왕 말기 백제 멸망을 암시하는 흉조가 이어진다", 『삼국유사』 권 제1, 제 1기이, 「태종춘추공」,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