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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송논쟁]]에서 드러나듯이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표면화되자, [[조선 숙종|숙종(肅宗)]]은 강력한 왕권을 추구의 의지를 보였다. [[조선 숙종|숙종]]은 자신의 왕권 안정을 위해 지금까지의 당파연립 방식을 버리고, 붕당을 자주 교체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를 '환국'이라 하는데, 환국정치의 운영은 말하자면 군주가 내각을 자주 교체하여 신하들의 충성심을 경쟁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방법이었다 | + | [[예송논쟁]]에서 드러나듯이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표면화되자, [[조선 숙종|숙종(肅宗)]]은 강력한 왕권을 추구의 의지를 보였다. [[조선 숙종|숙종]]은 자신의 왕권 안정을 위해 지금까지의 당파연립 방식을 버리고, 붕당을 자주 교체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를 '환국'이라 하는데, 환국정치의 운영은 말하자면 군주가 내각을 자주 교체하여 신하들의 충성심을 경쟁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방법이었다.<ref>이정민,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09 기사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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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환국]]의 전주곡, [[경신환국]]과 [[남인]]의 축출=== | ===[[기사환국]]의 전주곡, [[경신환국]]과 [[남인]]의 축출=== | ||
[[경신환국]]은 탁남의 대표인 [[허적]]을 중심으로 한 [[남인]]이 권력을 주도하는 것에 대해 위기감을 느낀 [[서인]]계열이 [[남인]]을 축출하기 위해 역모사건의 주동자로 [[허적]]의 아들인 [[허견|허견(許堅)]]을 지목하였다. 급기야 1680년 (숙종 5) [[김석주|김석주(金錫胄)]]의 밀객인 [[정원로|정원로(鄭元老)]]는 [[허견]]과 [[복선군|복선군(福善君)]]을 역모사건으로 고변하였다.[[복선군]]과 [[허견]]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였고, 이어 사건의 전모가 밝혀졌다. [[조선 숙종|숙종]]은 [[허견]]은 [[군기시|군기시(軍器寺)]] 앞길에서 능지처사(凌遲處死)하고 [[복선군]]은 종실의 예우를 갖추어 교수형(絞首刑)에 처한다고 발표하였다. [[남인]]의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윤휴|윤휴(尹鑴)]] 역시 처형을 당하였으며 이 옥사가 완전히 마무리되는 5월까지 종친 세력과 연결된 100여 명이 넘는 [[남인]]은 갖가지 죄목으로 처벌되었다.<ref>이정민,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09 기사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경신환국]]은 탁남의 대표인 [[허적]]을 중심으로 한 [[남인]]이 권력을 주도하는 것에 대해 위기감을 느낀 [[서인]]계열이 [[남인]]을 축출하기 위해 역모사건의 주동자로 [[허적]]의 아들인 [[허견|허견(許堅)]]을 지목하였다. 급기야 1680년 (숙종 5) [[김석주|김석주(金錫胄)]]의 밀객인 [[정원로|정원로(鄭元老)]]는 [[허견]]과 [[복선군|복선군(福善君)]]을 역모사건으로 고변하였다.[[복선군]]과 [[허견]]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였고, 이어 사건의 전모가 밝혀졌다. [[조선 숙종|숙종]]은 [[허견]]은 [[군기시|군기시(軍器寺)]] 앞길에서 능지처사(凌遲處死)하고 [[복선군]]은 종실의 예우를 갖추어 교수형(絞首刑)에 처한다고 발표하였다. [[남인]]의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윤휴|윤휴(尹鑴)]] 역시 처형을 당하였으며 이 옥사가 완전히 마무리되는 5월까지 종친 세력과 연결된 100여 명이 넘는 [[남인]]은 갖가지 죄목으로 처벌되었다.<ref>이정민,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09 기사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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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숙종|숙종]]은 즉위한 뒤 [[김만기|김만기(金萬基)]]의 딸인 [[인경왕후|인경왕후(仁敬王后)]]를 왕비로 맞았지만, 1680년(숙종 | + | ===[[희빈 장씨]] 숙원에 책봉되다=== |
+ | [[조선 숙종|숙종]]은 즉위한 뒤 [[김만기|김만기(金萬基)]]의 딸인 [[인경왕후|인경왕후(仁敬王后)]]를 왕비로 맞았지만, 1680년(숙종 6) 10월에 사망하자, 1681년 [[민유중|민유중(閔維重)]]의 딸인 [[인현왕후|인현왕후(仁顯王后)]]와 혼례를 치뤘다. 이 해에 대비 [[명성왕후|명성왕후(明聖王后)]]가 [[조선 숙종|숙종]]이 마음에 들어하던 [[희빈 장씨|궁녀 장옥정]]을 궁 밖으로 쫒아냈지만 [[명성왕후]]가 사망한 뒤, 다시 궁중으로 돌아왔다. 1686년에는 [[희빈 장씨|궁녀 장옹정]]이 숙원(淑媛)으로 책봉되었다.<ref>이정민,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09 기사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 | + | ===[[희빈 장씨]]의 출신배경과 [[조선 숙종|숙종]]의 총애=== | |
− | [[조선 숙종|숙종]]의 비인 [[인경왕후]], [[인현왕후]]는 모두 [[서인]] 노론계열 출신이었다. 그에 반해 [[희빈 장씨|장희빈]]의 가계는 [[남인]]과 | + | [[조선 숙종|숙종]]의 비인 [[인경왕후]], [[인현왕후]]는 모두 [[서인]] 노론계열 출신이었다. 그에 반해 [[희빈 장씨|장희빈]]의 가계는 [[남인]]과 연루되어 있었다. [[인현왕후]]에게 후사가 없었는데, 1688년 10월 27일 [[희빈 장씨]]가 [[조선 경종|왕자]]를 낳았다. [[조선 숙종|숙종]]이 [[조선 경종|왕자]]를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신료들은 [[인현왕후]]에게서 별 소식이 없다면 국본이 자연스럽게 정해질 것이니 서두르지 말고 몇 년을 기다릴 것을 청하였지만, [[조선 숙종|숙종]]은 세자가 정해지지 않으면 민심이 안정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대신들의 논의를 일축하였다. 그리고 5일 만에 왕자의 정호를 종묘사직에 고하고 [[희빈 장씨|장씨]]를 '희빈(禧嬪)'으로 승격하였다.<ref>이정민,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09 기사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 + | ===[[송시열]]의 상소와 [[서인]]의 몰락=== | |
− | + | 1688년 [[송시열]]이 후궁에게 왕자의 경사가 생긴 것은 매우 기쁜 일이지만, 원자로 정하는 것이 너무 이르다는 견해도 무시할 수 없다는 뜻을 담아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조선 숙종|숙종]]은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있다면 국본을 일찍이 세우기를 청했어야 하는데, [[송시열]]의 소장은 불만이 가득하다고 분노하였다.[[조선 숙종|숙종]]은 승지 [[이현기|이현기(李玄紀)]] [[윤빈|윤빈(尹彬)]], 교리 [[남치훈|남치훈(南致熏)]], [[이익수|이익수(李益壽)]] 등과 의논하여 [[송시열]]의 관작을 삭탈하여 외지로 출송시켰다. 이어 [[조선 숙종|숙종]]과 [[남인]]들은 영의정 [[김수흥]]을 파직시켰고, [[권대운|권대운(權大運)]] [[목내선|목내선(睦來善)]], [[김덕원|김덕원(金德遠)]] 등 [[남인]]계 인사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ref>이정민,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09 기사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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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환국]]의 정치적 배경=== | ===[[기사환국]]의 정치적 배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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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숙종|숙종]]은 기사환국 이후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였으며, [[남인]]들 역시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집권함은 물론 [[서인]]에게 보복하는 기회로 삼았다. [[조선 숙종|숙종]]은 원자정호 등의 일시적 의도는 실현하였지만 이런 과정에서 한 당파인 [[남인]]의 전권을 독점시켰기 때문에, 이를 조정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조처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5년 뒤 [[갑술환국]]이 일어나 [[남인]]은 몰락하고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된다.<ref>이정민,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09 기사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조선 숙종|숙종]]은 기사환국 이후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였으며, [[남인]]들 역시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집권함은 물론 [[서인]]에게 보복하는 기회로 삼았다. [[조선 숙종|숙종]]은 원자정호 등의 일시적 의도는 실현하였지만 이런 과정에서 한 당파인 [[남인]]의 전권을 독점시켰기 때문에, 이를 조정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조처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5년 뒤 [[갑술환국]]이 일어나 [[남인]]은 몰락하고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된다.<ref>이정민,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09 기사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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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박광용, 「숙종대 기사환국에 대한 검토 - 당론서 기록에 대한 비교 분석을 중심으로」, 『東洋學』17,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1999, 137-158쪽. | |
− | + | *이정민,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09 기사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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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정민,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09 기사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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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5일 (토) 13:39 기준 최신판
기사환국(己巳換局) | |
대표명칭 | 기사환국 |
---|---|
한자표기 | 己巳換局 |
유형 | 사건 |
시대 | 조선시대 |
날짜 | 1689년 |
관련인물 | 후궁장씨(장희빈) 인현왕후 |
관련단체 | 서인, 남인 |
목차
정의
1689년(숙종 15) 후궁 소의장씨(昭儀張氏) 소생을 원자로 정호(定號)하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장악한 정국(政局)을 말한다
내용
희빈 장씨 숙원에 책봉되다
숙종은 즉위한 뒤 김만기(金萬基)의 딸인 인경왕후(仁敬王后)를 왕비로 맞았지만, 1680년(숙종 6) 10월에 사망하자, 1681년 민유중(閔維重)의 딸인 인현왕후(仁顯王后)와 혼례를 치뤘다. 이 해에 대비 명성왕후(明聖王后)가 숙종이 마음에 들어하던 궁녀 장옥정을 궁 밖으로 쫒아냈지만 명성왕후가 사망한 뒤, 다시 궁중으로 돌아왔다. 1686년에는 궁녀 장옹정이 숙원(淑媛)으로 책봉되었다.[1]
희빈 장씨의 출신배경과 숙종의 총애
숙종의 비인 인경왕후, 인현왕후는 모두 서인 노론계열 출신이었다. 그에 반해 장희빈의 가계는 남인과 연루되어 있었다. 인현왕후에게 후사가 없었는데, 1688년 10월 27일 희빈 장씨가 왕자를 낳았다. 숙종이 왕자를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신료들은 인현왕후에게서 별 소식이 없다면 국본이 자연스럽게 정해질 것이니 서두르지 말고 몇 년을 기다릴 것을 청하였지만, 숙종은 세자가 정해지지 않으면 민심이 안정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대신들의 논의를 일축하였다. 그리고 5일 만에 왕자의 정호를 종묘사직에 고하고 장씨를 '희빈(禧嬪)'으로 승격하였다.[2]
송시열의 상소와 서인의 몰락
1688년 송시열이 후궁에게 왕자의 경사가 생긴 것은 매우 기쁜 일이지만, 원자로 정하는 것이 너무 이르다는 견해도 무시할 수 없다는 뜻을 담아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숙종은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있다면 국본을 일찍이 세우기를 청했어야 하는데, 송시열의 소장은 불만이 가득하다고 분노하였다.숙종은 승지 이현기(李玄紀) 윤빈(尹彬), 교리 남치훈(南致熏), 이익수(李益壽) 등과 의논하여 송시열의 관작을 삭탈하여 외지로 출송시켰다. 이어 숙종과 남인들은 영의정 김수흥을 파직시켰고, 권대운(權大運) 목내선(睦來善), 김덕원(金德遠) 등 남인계 인사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3]
지식 관계망
- 한산이씨 고행록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기사환국 | 경신환국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기사환국 | 갑술환국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예송논쟁 | 기사환국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기사환국 | 숙종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기사환국 | 인현왕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기사환국 | 희빈 장씨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기사환국 | 송시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기사환국 | 서인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기사환국 | 남인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허적 | 허견 | A는 B의 아버지이다 | A ekc:hasSon B |
남인 | 희빈 장씨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남인 | 복선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남인 | 복창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서인 | 인현왕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서인 | 송시열 |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 A foaf:member B |
서인 | 김수흥 |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 A foaf:member B |
서인 | 오두인 |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 A foaf:member B |
서인 | 박태보 |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 A foaf:member B |
서인 | 이세화 |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 A foaf:member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689년 | 기사환국이 일어났다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이정민, "기사환국",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이정민, "기사환국",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이정민, "기사환국",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박광용, 「숙종대 기사환국에 대한 검토 - 당론서 기록에 대한 비교 분석을 중심으로」, 『東洋學』17,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1999, 137-158쪽.
- 이정민, "기사환국",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