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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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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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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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북한산성|북한산성(北漢山城)]]과 함께 조선의 도성인 한양의 방어를 위하여 쌓은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의 발굴조사 결과, 8세기 중반에 조성된 성벽과 건물터 등이 확인되어, 신라 [[주장성|주장성(晝長城)]]의 옛터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시대 [[남한산성]]은 주봉인 해발 497.9m의 청량산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연주봉(467.6m), 동쪽으로는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도 여러 봉우리를 연결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벽의 바깥쪽은 경사가 급한데 비해 안쪽은 경사가 완만하여, 방어에 유리하면서도 적의 접근은 어려운 편이다. [[봉암성|봉암성(蜂巖城)]], [[한봉성|한봉성(漢峰城)]], [[신남성|신남성(新南城)]] 등 3개의 외성과 5개의 옹성도 함께 연결되어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하였다. [[남한산성]]역사·문화적 가치가 높게 인정되어 2014년 6월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신규 등재되었다.<ref>김길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2258 남한산성]",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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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북한산성|북한산성(北漢山城)]]과 함께 조선의 도성인 한양의 방어를 위하여 쌓은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의 발굴조사 결과, 8세기 중반에 조성된 성벽과 건물터 등이 확인되어, 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주장성(晝長城)]]의 옛터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시대 [[남한산성]]은 주봉인 해발 497.9m의 청량산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연주봉(467.6m), 동쪽으로는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도 여러 봉우리를 연결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벽의 바깥쪽은 경사가 급한 데 비해 안쪽은 경사가 완만하여, 방어에 유리하면서도 적의 접근은 어려운 편이다. [[봉암성|봉암성(蜂巖城)]], [[한봉성|한봉성(漢峰城)]], [[신남성|신남성(新南城)]] 등 3개의 외성과 5개의 옹성도 함께 연결되어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하였다. [[남한산성]]역사·문화적 가치가 높게 인정되어 2014년 6월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신규 등재되었다.<ref>김길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2258 남한산성]",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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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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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 축성된 [[주장성]]으로, 추정되는 바, 군수 물자를 저장하는 특수 창고를 설치한 중요한 거점인 성이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외성과 옹성을 중축하면서 전형적인 산성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산성의 역사적 변화 과정과 기능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ref>김길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2258 남한산성]",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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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의 구조와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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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신라시기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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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시에 국왕이 거처할 행궁(行宮)이 73칸반의 규모이고, 하궐(下闕)은 154칸 정도이다. 궁실에 딸린 건물로는 1688년과 1711년에 건립한 좌덕당(左德堂)과 종묘 건물로 사용하기 위한 좌전(左殿)도 자리하였고, 남문 안에는 사직을 옮길 우실(右室)도 갖추었다. 1798년(정조 22)에는 한남루(漢南樓)가 건립되었고, 1624년에 세운 객관(客館)인 인화관(人和館)은 1829년(순조 29)에 수리되었다. 하궐 왼쪽에는 일장각과 군사를 조련하던 연무관이 있었다. 1638년(인조 16)에는 온조왕묘를 건립하여 배향하였으며, 남단사 오른쪽에는 사직단, 북문 안의 동쪽 언덕에는 성황당, 서장대에는 기우제단을 두어 정기적으로 제의를 행하였다. 동문 안에는 1688년(숙종 14)에 유수 [[이세백]]이 [[병자호란]] 때 청의 침입에 끝까지 저항할 것을 주장한 [[척화파]]의 [[홍익한]], [[윤집]], [[오달제]]의 위패와 좌의정 [[김상헌]], 이조참판 [[정온]]의 위패를 배향한 한절사라는 사당이 있다.<ref>김길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2258 남한산성]",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유사시에 국왕이 거처할 행궁(行宮)이 73칸반의 규모이고, 하궐(下闕)은 154칸 정도이다. 궁실에 딸린 건물로는 1688년과 1711년에 건립한 좌덕당(左德堂)과 종묘 건물로 사용하기 위한 좌전(左殿)도 자리하였고, 남문 안에는 사직을 옮길 우실(右室)도 갖추었다. 1798년(정조 22)에는 한남루(漢南樓)가 건립되었고, 1624년에 세운 객관(客館)인 인화관(人和館)은 1829년(순조 29)에 수리되었다. 하궐 왼쪽에는 일장각과 군사를 조련하던 연무관이 있었다. 1638년(인조 16)에는 온조왕묘를 건립하여 배향하였으며, 남단사 오른쪽에는 사직단, 북문 안의 동쪽 언덕에는 성황당, 서장대에는 기우제단을 두어 정기적으로 제의를 행하였다. 동문 안에는 1688년(숙종 14)에 유수 [[이세백]]이 [[병자호란]] 때 청의 침입에 끝까지 저항할 것을 주장한 [[척화파]]의 [[홍익한]], [[윤집]], [[오달제]]의 위패와 좌의정 [[김상헌]], 이조참판 [[정온]]의 위패를 배향한 한절사라는 사당이 있다.<ref>김길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2258 남한산성]",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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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의 중요성===
 
[[남한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 축성된 [[주장성]]으로, 군수 물자를 저장하는 특수 창고를 설치한 중요한 거점성이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외성과 옹성을 갖춘 전형적인 산성이면서, 산성의 변화 과정과 기능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ref>김길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2258 남한산성]",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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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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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 축성된 [[주장성]]으로, 군수 물자를 저장하는 특수 창고를 설치한 중요한 거점성이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외성과 옹성을 갖춘 전형적인 산성이면서, 산성의 변화 과정과 기능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ref>김길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2258 남한산성]",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남한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 축성된 [[주장성]]으로, 군수 물자를 저장하는 특수 창고를 설치한 중요한 거점성이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외성과 옹성을 갖춘 전형적인 산성이면서, 산성의 변화 과정과 기능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ref>김길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2258 남한산성]",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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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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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현균, 「남한산성 통일신라 건물지 평면복원 일고찰」, 『건축역사연구』, Vol 17, 2008, 120-1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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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현균, 「남한산성 통일신라 건물지 평면복원 일고찰」, 『건축역사연구』 Vol 17,  한국건축역사학회, 2008, 120-130쪽.  
**李炫熙, 「南漢山城의 築城」, 『동국사학회』, Vol 33, 1999, 69-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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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炫熙, 「南漢山城의 築城」, 『동국사학회』 Vol 33, 동국사학회, 1999, 69-82쪽.  
**김문식, 「조선후기 국왕의 남한산성(南漢山城) 행차」, 『朝鮮時代史學報』, Vol 60, 2012, 105-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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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식, 「조선후기 국왕의 남한산성(南漢山城) 행차」, 『朝鮮時代史學報』 Vol 60,  조선시대사학회, 2012, 105-138쪽.
  
 
===유용한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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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한글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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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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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이창섭]]
 

2017년 11월 25일 (토) 02:31 기준 최신판

남한산성
(南漢山城)
김길식, "남한산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표명칭 남한산성
한자표기 南漢山城
유형 유적
시대 조선시대
지정번호 사적 제57호
지정일 1963년 1월 21일(사적지정), 2014년 6월 22일(세계문화유산 지정)
소장처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일원
관련인물 조선 인조
관련유물유적 산성일기



정의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시기 건설된 산성이다.

내용

남한산성에 대해서

흔히 북한산성(北漢山城)과 함께 조선의 도성인 한양의 방어를 위하여 쌓은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의 발굴조사 결과, 8세기 중반에 조성된 성벽과 건물터 등이 확인되어, 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晝長城)의 옛터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시대 남한산성은 주봉인 해발 497.9m의 청량산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연주봉(467.6m), 동쪽으로는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도 여러 봉우리를 연결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벽의 바깥쪽은 경사가 급한 데 비해 안쪽은 경사가 완만하여, 방어에 유리하면서도 적의 접근은 어려운 편이다. 봉암성(蜂巖城), 한봉성(漢峰城), 신남성(新南城) 등 3개의 외성과 5개의 옹성도 함께 연결되어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하였다. 남한산성은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게 인정되어 2014년 6월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신규 등재되었다.[1]

남한산성의 중요성

남한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 축성된 주장성으로, 추정되는 바, 군수 물자를 저장하는 특수 창고를 설치한 중요한 거점인 성이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외성과 옹성을 중축하면서 전형적인 산성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산성의 역사적 변화 과정과 기능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2]

지식 관계망

  • 산성일기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남한산성 봉암성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남한산성 한봉섬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남한산성 신남성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남한산성 주장성 A는 B와 유사하다 A owl:sames B
삼국사기 주장성 A는 B를 언급하였다 A ekc:mentions B
이세화묘지명 광주성 A는 B를 언급하였다 A ekc:mentions B
고려사 광주성 A는 B를 언급하였다 A ekc:mentions B
세종실록지리지 일장산성 A는 B를 언급하였다 A ekc:mentions B
광주성 남한산성 A는 B와 유사하다 A owl:sames B
주장성 일장성 A는 B와 유사하다 A owl:sames B
일장성 일장산성 A는 B와 유사하다 A owl:sames B
이괄의 난 남한산성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병자호란 남한산성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병자호란 조선 인조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병자호란 산성일기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남한산성 이서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673년 남한산성으로 추정되는 주장성이 건설되었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481567 127.184799 남한산성이 위치한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김길식, "남한산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김길식, "남한산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노현균, 「남한산성 통일신라 건물지 평면복원 일고찰」, 『건축역사연구』 Vol 17, 한국건축역사학회, 2008, 120-130쪽.
    • 李炫熙, 「南漢山城의 築城」, 『동국사학회』 Vol 33, 동국사학회, 1999, 69-82쪽.
    • 김문식, 「조선후기 국왕의 남한산성(南漢山城) 행차」, 『朝鮮時代史學報』 Vol 60, 조선시대사학회, 2012, 105-138쪽.

유용한 정보

  • 김길식, "남한산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