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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인물]] | [[분류:인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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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5일 (토) 00:17 기준 최신판
권탁(權倬) | |
대표명칭 | 권탁 |
---|---|
한자표기 | 權倬 |
생몰년 | 1544년-1593년 |
본관 | 안동 권씨 |
자 | 사원(思遠) |
시대 | 조선시대 |
국적 | 조선 |
대표직함 | 김해수성장 |
부 | 권길원 |
목차
정의
임진왜란 시기 활약한 무신이다.
내용
임진왜란 시기 권탁의 활약
권탁은 안동 권씨 권길원의 아들로 자는 사원(思遠)이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의주까지 피란을 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권탁은 무기를 들고 홀로 걸어서 김해까지 왔다. 권탁은 김해수성장이 되어 임진왜란에 참여하였다. [1]
선조의 밀명을 받고 적지로 향하는 권탁
이순신이 해전에서 승리를 거듭하자, 조선 조정은 명나라와 연합하여 왜적을 향해 반격을 시도하였다. 1593년(선조 26) 9월, 선조는 '선조국문교서'(宣祖國文敎書)를 내려 백성들의 마음을 모으려 하였다. 선조는 또한 "누가 이 유서(諭書. 임금이 내리는 명령서)를 갖고, 왜적 속에 들어가 우리 백성들을 불러 데려올 수 있는가?"라며 남쪽 지방의 장수들에게 따로 교시를 내렸다. 그러나 선조의 뜻을 받드는 장수가 없었다. 이에 권탁이 선조의 뜻을 받들어 유서를 가지고 적지로 향하였다. [2]
임무를 완수하고 김해성에서 세상을 떠나다
권탁은 왜적의 진지로 잠입하였다. 포로로 잡혀 왜적에 협조하고 있는 조선 백성을 회유하고 그들을 이용하여 왜군 40명을 유인하였다. 권탁은 기회를 노려 장사 수십 명과 함께 왜군을 섬멸하였다. 권탁은 왜군을 유인한 조선인 백성 100명을 배에 태워서 김해성으로 돌아왔다. 이때 입은 상처가 덧나서 1593년 11월 21일 50세의 나이로 김해성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후 1722년 통정대부 장례원판결사로 추증 받았다[3]
선조 국문 유서가 권탁 후손들에 의해서 전해지다
권탁이 선조에게 받은 선조 국문 유서는 그의 후손이 중요 유품으로 보관해 오다가, 선조어서각이 1836년에 건립되면서 어서각에 봉안하였다. 1975년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고, 1988년에 보물 951호로 승격되었다. 현재는 부산시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다.[4]
연계 자원 보러 가기 |
• 선조 국문 유서 |
지식 관계망
- 선조 국문 유서에 관한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권길원 | 권탁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선조 국문 유서 | 권탁 | A는 B에게 소장되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선조 국문 유서 | 조선 선조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임진왜란 | 사충신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임진왜란 | 권탁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임진왜란 | 조선 선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선조 국문 유서 | 어서각 | A는 B에 소장되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선조 국문 유서 | 부산시립박물관 | A는 B에 소장되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593년 | 권탁은 선조 국문 유서를 소지하였다 |
주석
- ↑ "권탁", 김해역사, 김해인물,
『김해소개』online , 안동시청. - ↑ "권탁", 김해역사, 김해인물,
『김해소개』online , 안동시청. - ↑ "권탁", 김해역사, 김해인물,
『김해소개』online , 안동시청. - ↑ "권탁", 김해역사, 김해인물,
『김해소개』online , 안동시청.
참고문헌
유용한 정보
- 웹사이트 내 특정 페이지
- "권탁", 김해역사, 김해인물,
『김해소개』online , 안동시청.
- "권탁", 김해역사, 김해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