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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명길]] | + | ===[[최명길]]의 가계=== |
본관은 전주이며 자는 자겸(子謙), 호는 지천(遲川) 또는 창랑(滄浪)이다. [[최업|최업(崔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수준|최수준(崔秀俊)]]이고, 아버지는 영흥부사 [[최기남|최기남(崔起南)]]이다. 어머니는 참판 [[유영립|유영립(柳永立)]]의 딸이다. | 본관은 전주이며 자는 자겸(子謙), 호는 지천(遲川) 또는 창랑(滄浪)이다. [[최업|최업(崔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수준|최수준(崔秀俊)]]이고, 아버지는 영흥부사 [[최기남|최기남(崔起南)]]이다. 어머니는 참판 [[유영립|유영립(柳永立)]]의 딸이다. | ||
<ref>이겸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7284 최명길]",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ref>이겸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7284 최명길]",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 | === | + | === 전화위복=== |
− | [[이항복|이항복(李恒福)]] 문하에서 [[이시백|이시백(李時白)]] | + | [[이항복|이항복(李恒福)]] 문하에서 [[이시백|이시백(李時白)]], [[장유|장유(張維)]] 등과 같이 학문을 배웠다. 1605년(선조 38)에 생원시에서 장원하고 그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na_13802014_004 대제학 유근 등에게 생원 최명길 등 2백 명을 시취하게 하다]", 『선조실록』 184권, 선조 38년(1605) 2월 14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1613년(광해 5)에는 병조 좌랑 자리에 올랐으나 <ref>"[http://sillok.history.go.kr/id/koa_10510001_005 정온을 필선, 박재를 사서로, 조정립을 정언, 최명길을 병조 좌랑으로 삼다]", 『광해군일기(정초본)』 71권, 광해 5년(1613) 10월 1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불과 1년 만에 국내 정치 문제와 아울러 명나라 사신 접촉 금지 문제가 생겨 관직을 삭탈 당한다. <ref>"[http://sillok.history.go.kr/id/koa_10601014_005 병조 좌랑 최명길·선전관 윤우가 잡혀와 하옥되다]", 『광해군일기(중초본)』 74권, 광해 6년(1614) 1월 14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관직에서 쫓겨난 이후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수년간 복상(服喪)하여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는데, 당시 [[인목대비]]의 유폐 등 [[광해군]]의 치세가 매우 혼란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
− | === | + | ===인조반정의 공=== |
− |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김자점]], [[심기원]] 등 유생들과 함께 홍제원(弘濟院) 터에서 모여 반정에 참여하였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oa_11503012_005 반정이 일어나자 도망하여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87권, 광해 15년(1623) 3월 12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김자점]], [[심기원]] 등 유생들과 함께 홍제원(弘濟院) 터에서 모여 반정에 참여하였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oa_11503012_005 반정이 일어나자 도망하여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87권, 광해 15년(1623) 3월 12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반정이 성공한 이틀 후에 이조좌랑에 임명되었으며, 10월에는 녹훈을 받아 1등 정사공신이 되어 완성부원군에 봉해졌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pa_10110118_003 정사훈(靖社勳)을 감정토록 명하여 1·2·3등 53명을 녹훈하다]", 『인조실록』 3권, 인조 1년(1623) 윤10월 18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그 후에는 이조 참판까지 벼슬이 올라갔으며, 비변사 유사당상을 겸입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이 녹훈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키자 [[최명길]]은 총독부사(摠督副使)가 되어 관군과 합류하여 [[이괄]]과 맞선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pa_10202012_002 체찰 부사 이시발과 총독 부사 최명길 등이 이괄이 도주했다고 보고하다]", 『인조실록』 4권, 인조 2년(1624) 2월 12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이후 반란이 막을 진압되자, [[조선 인조|인조]]의 큰 신임을 얻게 되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pa_10202018_002 전의현에 머물다. 총독 부사 최명길이 길에서 맞이하다]", 『인조실록』 4권, 인조 2년(1624) 2월 18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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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묘호란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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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병자호란 때=== | ||
+ | 1636년(인조 14) 다시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청나라 군대는 단시일에 한양까지 진격하였고, 이에 [[조선 인조|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최명길]]은 추격하는 청나라 군대의 속도를 낮추기 위해 일부러 청 진영으로 가서 강화 협상을 하였다. 이 지연작전으로 [[조선 인조|인조]]는 무사히 [[남한산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pa_11412014_003 최명길에게 강화를 청하게 하고 상은 남한 산성에 도착, 강도로 가기로 결정하다]",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1636) 12월 14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정묘호란]] 때처럼 상당수의 신하들이 화친을 거부하였다. 이 때도 [최명길]]은 척화론을 주장하는 대신들 자체가 현실성이 없고 대책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여 결국 청나라와 강화를 맺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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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란 이후=== | ||
+ | [[병자호란]] 이후 [[최명길]]은 우의정 좌의정을 걸쳐 영의정 자리에 오른다. 전란 이후 국토가 황폐해졌고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져 이것을 해결하는 데 많은 노력을 하였다.<ref>이겸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7284 최명길]",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청나라와 외교를 통하여 포로로 잡힌 조선인을 데려왔으며 복잡한 외교 문제 및 세폐 수량을 줄여서 조선에 피해가 덜하도록 하였다. 1642년(인조 20) 임경업이 중국으로 망명한 후 명나라와 결탁하여 청나라를 공격하려 했던 사실이 드러나면서 [[최명길]]도 심양으로 끌려가 감옥에 갇혔다. 1645년(인조 23) 약 3년간의 옥살이 끝에 고국으로 돌아와서 다시 다시 [[조선 인조|인조]]를 보필하다가 1647년(인조 25)에 죽었다.<ref>이겸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7284 최명길]",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성리학과 문장 실력이 뛰어나며 글씨를 잘 썼으며 양명학을 독학으로 공부하였다. 대표 저서로는 [[지천집]], [[지천주차|지천주차(遲川奏箚)]]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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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겸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7284 최명길]",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겸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7284 최명길]",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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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5일 (토) 00:07 기준 최신판
최명길(崔鳴吉) | |
대표명칭 | 최명길 |
---|---|
한자표기 | 崔鳴吉 |
생몰년 | 1586년-1647년 |
본관 | 전주 |
시대 | 조선시대 |
국적 | 조선 |
대표저서 | 지천집, 지천주차 |
대표직함 | 우의정 |
부 | 최기남 |
모 | 최명길 처 전주 유씨 |
상훈 | 정사공신 |
성격 | 문인 |
유형 | 인물 |
목차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내용
최명길의 가계
본관은 전주이며 자는 자겸(子謙), 호는 지천(遲川) 또는 창랑(滄浪)이다. 최업(崔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수준(崔秀俊)이고, 아버지는 영흥부사 최기남(崔起南)이다. 어머니는 참판 유영립(柳永立)의 딸이다. [1]
전화위복
이항복(李恒福) 문하에서 이시백(李時白), 장유(張維) 등과 같이 학문을 배웠다. 1605년(선조 38)에 생원시에서 장원하고 그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2] 1613년(광해 5)에는 병조 좌랑 자리에 올랐으나 [3]불과 1년 만에 국내 정치 문제와 아울러 명나라 사신 접촉 금지 문제가 생겨 관직을 삭탈 당한다. [4] 관직에서 쫓겨난 이후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수년간 복상(服喪)하여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는데, 당시 인목대비의 유폐 등 광해군의 치세가 매우 혼란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인조반정의 공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김자점, 심기원 등 유생들과 함께 홍제원(弘濟院) 터에서 모여 반정에 참여하였다.[5] 반정이 성공한 이틀 후에 이조좌랑에 임명되었으며, 10월에는 녹훈을 받아 1등 정사공신이 되어 완성부원군에 봉해졌다.[6] 그 후에는 이조 참판까지 벼슬이 올라갔으며, 비변사 유사당상을 겸입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이 녹훈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키자 최명길은 총독부사(摠督副使)가 되어 관군과 합류하여 이괄과 맞선다.[7] 이후 반란이 막을 진압되자, 인조의 큰 신임을 얻게 되었다.[8]
정묘호란 때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따라 강화도에 들어갔다. 많은 대신들이 강화(講和)를 원하지 않았으나 최명길은 현실적으로 전쟁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인조를 설득하여 후금과 강화를 맺었다.[9] 그리고 후금 진영에 들어가 전쟁에서 진 조선의 불리한 상황을 최대한 유리하게 외교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병자호란 때
1636년(인조 14) 다시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청나라 군대는 단시일에 한양까지 진격하였고, 이에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최명길은 추격하는 청나라 군대의 속도를 낮추기 위해 일부러 청 진영으로 가서 강화 협상을 하였다. 이 지연작전으로 인조는 무사히 남한산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10] 정묘호란 때처럼 상당수의 신하들이 화친을 거부하였다. 이 때도 [최명길]]은 척화론을 주장하는 대신들 자체가 현실성이 없고 대책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여 결국 청나라와 강화를 맺게 된다.
호란 이후=
병자호란 이후 최명길은 우의정 좌의정을 걸쳐 영의정 자리에 오른다. 전란 이후 국토가 황폐해졌고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져 이것을 해결하는 데 많은 노력을 하였다.[11] 청나라와 외교를 통하여 포로로 잡힌 조선인을 데려왔으며 복잡한 외교 문제 및 세폐 수량을 줄여서 조선에 피해가 덜하도록 하였다. 1642년(인조 20) 임경업이 중국으로 망명한 후 명나라와 결탁하여 청나라를 공격하려 했던 사실이 드러나면서 최명길도 심양으로 끌려가 감옥에 갇혔다. 1645년(인조 23) 약 3년간의 옥살이 끝에 고국으로 돌아와서 다시 다시 인조를 보필하다가 1647년(인조 25)에 죽었다.[12] 성리학과 문장 실력이 뛰어나며 글씨를 잘 썼으며 양명학을 독학으로 공부하였다. 대표 저서로는 지천집, 지천주차(遲川奏箚)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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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포식언해 |
• 마경초집언해 |
지식 관계망
- 화포식언해에 관한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최기남 | 최명길 | A는 B의 아버지이다 | A ekc:hasSon B |
최명길 처 전주 유씨 | 최명길 | A는 B의 어머니이다 | A ekc:hasSon B |
유영립 | 최명길 처 전주 유씨 | A는 B의 아버지이다 | A ekc:hasSon B |
이항복 | 최명길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이항복 | 이시백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인조반정 | 김자점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인조반정 | 심기원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인조반정 | 이괄의 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인조반정 | 최명길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인조반정 | 이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이괄의 난 | 최명길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이괄의 난 | 이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이괄의 난 | 이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인조반정 | 조선 인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정묘호란 | 최명길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병자호란 | 최명길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지천집 | 최명길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지천주차 | 최명길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화포식언해 | 이서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화포식언해 | 화포식언해 최명길 발문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화포식언해 최명길 발문 | 최명길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마경초집언해 | 이서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지천집 | 마경발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마경 | 이서 | A는 B에 의해 간행되었다 | A dcterms:publisher B |
마경발 | 마경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마경발 | 이서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623년 | 최명길은 인조반정에 참여하였다 |
1624년 | 최명길은 이괄의 난때 조선 인조의 인정을 받았다 |
1627년 | 최명길은 정묘호란시기 청나라와 화친을 하였다 |
1636년 | 최명길은 병자호란때 청나라와 화의를 맺었다 |
주석
- ↑ 이겸주, "최명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대제학 유근 등에게 생원 최명길 등 2백 명을 시취하게 하다", 『선조실록』 184권, 선조 38년(1605) 2월 14일,
『조선왕조실록』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정온을 필선, 박재를 사서로, 조정립을 정언, 최명길을 병조 좌랑으로 삼다", 『광해군일기(정초본)』 71권, 광해 5년(1613) 10월 1일,
『조선왕조실록』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병조 좌랑 최명길·선전관 윤우가 잡혀와 하옥되다", 『광해군일기(중초본)』 74권, 광해 6년(1614) 1월 14일,
『조선왕조실록』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반정이 일어나자 도망하여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87권, 광해 15년(1623) 3월 12일,
『조선왕조실록』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정사훈(靖社勳)을 감정토록 명하여 1·2·3등 53명을 녹훈하다", 『인조실록』 3권, 인조 1년(1623) 윤10월 18일,
『조선왕조실록』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체찰 부사 이시발과 총독 부사 최명길 등이 이괄이 도주했다고 보고하다", 『인조실록』 4권, 인조 2년(1624) 2월 12일,
『조선왕조실록』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전의현에 머물다. 총독 부사 최명길이 길에서 맞이하다", 『인조실록』 4권, 인조 2년(1624) 2월 18일,
『조선왕조실록』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강을 건너 행궁에 도착하고, 청 사신이 화친의 뜻을 보이다", 『인조실록』 15권, 인조 5년(1627) 1월 29일,
『조선왕조실록』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최명길에게 강화를 청하게 하고 상은 남한 산성에 도착, 강도로 가기로 결정하다",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1636) 12월 14일,
『조선왕조실록』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이겸주, "최명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겸주, "최명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사료
- 『선조실록』 184권, 온라인 참조:
『조선왕조실록』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광해군일기(정초본)』 71권, 온라인 참조:
『조선왕조실록』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광해군일기(중초본)』 74권, 온라인 참조:
『조선왕조실록』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광해군일기(중초본)』 187권, 온라인 참조:
『조선왕조실록』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인조실록』 3권, 온라인 참조:
『조선왕조실록』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인조실록』 4권, 온라인 참조:
『조선왕조실록』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인조실록』 4권, 온라인 참조:
『조선왕조실록』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인조실록』 15권, 온라인 참조:
『조선왕조실록』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인조실록』 33권, 온라인 참조:
『조선왕조실록』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선조실록』 184권, 온라인 참조:
- 웹사이트 내 특정 페이지
- 이겸주, "최명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겸주, "최명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