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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 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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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유물유적= [[백동화 무효에 관한 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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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의'''==
1894~1895년 조선의 지배를 둘러싸고 중국(청)과 일본 간에 벌어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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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조선의 지배를 둘러싸고 중국(청)과 일본 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내용'''==
 
=='''내용'''==
===[[청일전쟁]]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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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군차용(淸軍借用) 요청===
*1894년 봄 전라도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조선 정부는 6월 2일 전주가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정부는 자력으로는 농민군을 진압할 수 없다고 판단, [[임오군란]] 진압시의 전례에 따라 청국의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 [[위안스카이|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다. [[위안스카이]]를 통해 파병 요청을 받은 청국의 직례총독 겸 북양대신(直隷總督兼北洋大臣) [[이홍장|이홍장(李鴻章)]]은 6월 6일, [[톈진조약|톈진조약(天津條約)]]에 의거하여 일본에 파병 사실을 통고하는 한편, 직례제독 [[예즈차오|예즈차오(葉志超)]]와 [[딩루창|딩루창(丁汝昌)]] 휘하의 군사 2,800명을 충청도 [[아산]]에 급파하였다.<ref>유영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6610 [[청일전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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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봄 전라도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조선 정부는 자력으로는 농민군을 진압할 수 없다고 판단, [[임오군란]] 진압시의 전례에 따라 청국의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 [[위안스카이|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다. [[위안스카이]]를 통해 파병 요청을 받은 청국의 직례총독 겸 북양대신(直隷總督兼北洋大臣) [[이홍장|이홍장(李鴻章)]]은 6월 6일, [[톈진조약|톈진조약(天津條約)]]에 의거하여 일본에 파병 사실을 통고하는 한편, 직례제독 [[예즈차오|예즈차오(葉志超)]]와 [[딩루창|딩루창(丁汝昌)]] 휘하의 군사 2,800명을 충청도 [[아산]]에 급파하였다.<ref>유영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6610 [[청일전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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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단으로 들어온 일본군===
*일본 정부는 6월 2일 서울주재 임시대리공사 [[스기무라|스기무라(杉村濬)]]로부터 조선이 청국에 파병을 요청하였다는 보고를 받았다. 때마침 중의원(衆議院)에서 내각탄핵상주안이 가결되어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던 내각총리대신 [[이토|이토(伊藤博文)]]는 이 보고를 받은 즉시 각의를 열어 중의원을 해산하였다. 그리고 ‘일본공사관 및 거류민을 보호한다.’라는 구실로 제5사단 [[오시마|오시마(大島義昌)]] 소장 휘하의 혼성여단을 조선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6월 5일 참모본부 내에 대본영(大本營)이 설치되고, 동시에 [[오시마]]가 거느린 혼성여단 선발대가 요코스카(橫須賀) 항을 출발, 9일인천에 상륙하여 곧바로 서울로 진군하였다. 그 뒤 6월 하순까지 8,000여 명의 일본군이 경인(京仁)간에 집결하였다.<ref>유영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6610 [[청일전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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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는 서울주재 임시대리공사 [[스기무라|스기무라(杉村濬)]]로부터 조선이 청국에 파병을 요청하였다는 보고를 받았다. 내각총리대신 [[이토|이토(伊藤博文)]]는 이 보고를 받은 즉시 '일본공사관 및 거류민을 보호한다.’라는 구실로 제5사단 [[오시마|오시마(大島義昌)]] 소장 휘하의 혼성여단을 조선에 파견하였다.<ref>유영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6610 [[청일전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조선 정부는, 일본이 독단으로 대규모 군인을 파병한 데 당황하고 이에 항의, 즉시 철병할 것을 요청하였다. 더욱이, 6월 11일 정부군과 동학농민군 사이에 [[전주화약|전주화약(全州和約)]]이 성립되었기 때문에 외국군이 간섭할 구실이 없어진 상황이었다. 따라서 육전대(陸戰隊)와 함께 서울에 귀임한 오토리(大鳥圭介) 일본공사는, 위안스카이와 3차례에 걸친 회담 끝에 양국군의 공동 철수에 합의하기에 이르렀다.<ref>유영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6610 [[청일전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하지만 일본 정부는 국내에서의 정치적 혼란을 청국과의 전쟁으로 해결하고자 전쟁을 일으킬 명분을 찾으려 급급하였다. 그리하여 공동철병안 대신 조선의 내정을 공동으로 개혁하자는 안을 청국에 내놓았다. 청국측이 이 제안을 거절하자 일본은 청국에 ‘제1차 절교서(絶交書)’를 보냄과 동시에 단독으로 조선의 ‘내정개혁’을 강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사이 [[이홍장]]의 조정 의뢰에 따라 러시아와 미국이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였지만, 7월 중순 일본 정부는 청국에 ‘제2차 절교서’를 보내는 한편, 영국과 [[영일신조약|영일신조약(英日新條約)]]을 체결, 영국의 간접적인 지원을 얻어 개전을 서둘렀다.<ref>유영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6610 [[청일전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청일전쟁]] 일어나다===
 
*본국 정부의 개전 결의를 전달받은 [[오토리]] 공사는, 조선 정부에 청국의 대조선종주권 주장에 대한 확답을 요구하는 시한부 최후통첩을 발한 뒤 7월 23일 [[경복궁]]을 불법 점령, 쿠데타를 통해 [[흥선대원군|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 [[김홍집|김홍집(金弘集)]] 등을 앞세운 [[친일정권]]을 수립하였다. 이어 일본군은 서울의 조선군대를 무장시킨 다음 [[아산]] 근처에 집결한 청군을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청일간의 본격적인 전투는 7월 25일 일본 해군이 [[풍도|풍도(豊島)]] 앞바다에서 청국함대를 기습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 해전에서 청국군함과 청국 증원군을 태운 영국수송선 가오슝호(高陞號)가 일본 해군의 기습공격으로 격침되었다.이어 29일에 벌어진 [[성환전투]]에서 일본 육군은 [[아산]]에 상륙했던 청국군을 쉽게 격파해 버렸다. 일본 정부는 이처럼 육·해상의 초전에서 승리를 거둔 다음, 8월 1일에야 비로소 청국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했으며, 청국도 이에 응해 대일선전포고를 하였다.<ref>유영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6610 [[청일전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일본 정부는 열강의 간섭을 피해 가능한 한 빨리 승리를 거두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일본 육군이 9월 15-17일 평양에 집결한 청국군 1만 4000명을 격파하고, 17일 해군이 [[황해전투]]에서 청국함대를 격침시켜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렇게 [[평양]]과 황해에서 대승을 거둔 일본군은 곧이어 중국 본토에 대한 공략을 서둘렀다. 10월 하순 조선에 진주했던 일본의 제1군은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로 진격하고, 제2군은 랴오둥반도(遼東半島)에 상륙하여 11월 하순 여순(旅順)·다롄(大連)을 점령하였다. 그런 다음 1895년 2월 2일 산둥반도(山東半島)의 웨이하이웨이(威海衛)에 있던 청국의 북양함대기지를 공략하였다.<ref>유영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6610 [[청일전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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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부는, 일본이 독단으로 대규모 군인을 파병한 데 당황하고 이에 항의, 즉시 철병할 것을 요청하였다. 더욱이, 6월 11일 정부군과 동학농민군 사이에 [[전주화약|전주화약(全州和約)]]이 성립되었기 때문에 외국군이 간섭할 구실이 없어진 상황이었다. 따라서 육전대(陸戰隊)와 함께 서울에 귀임한 오토리(大鳥圭介) 일본공사는, 위안스카이와 3차례에 걸친 회담 끝에 양국군의 공동 철수에 합의하기에 이르렀으나,<ref>유영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6610 [[청일전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일본 정부는 자국 내에서의 정치적 혼란을 청국과의 전쟁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ref>유영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6610 [[청일전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청나라는 사태가 불리하게 흐르자 전쟁을 마무리짓기 위하여 [[장인환|장인환(張蔭桓)]]을 전권대신으로 임명하여 일본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1895년 2월 초 두 차례 열린 [[히로시마회담|히로시마회담(廣島會談)]]에서 일본측은 자국에 더욱 유리한 강화조건을 확보할 목적으로 교섭을 거부하고 전투를 재개하였다. 그 결과 3월 중순까지 일본 육군은 랴오둥반도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청국은 그제야 [[이홍장]]을 전권대신으로 교체하고 강화회담 재개를 서둘렀다. 3월 20일부터 [[시모노세키|시모노세키(下關: 馬關)]]에서 [[이토]]와 [[이홍장]]이 양국을 대표해 강화회의를 하였다. 4월 17일 청일강화조약, 즉 [[시모노세키조약|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을 성립시켰다.<ref>유영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6610 [[청일전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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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포고를 주고받은 청•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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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의 개전 결의를 전달받은 [[오토리]] 공사는, 조선 정부에 청국의 대조선종주권 주장에 대한 확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발한 뒤 7월 23일 [[경복궁]]을 불법 점령, 쿠데타를 통해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김홍집|김홍집(金弘集)]] 등을 앞세운 [[친일정권]]을 수립하였다. 이어 일본군은 서울의 조선군대를 무장시킨 다음 [[아산]] 근처에 집결한 청군을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청일간의 본격적인 전투는 7월 25일 일본 해군이 [[풍도|풍도(豊島)]] 앞바다에서 청국함대를 기습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 해전에서 청국군함과 청국 증원군을 태운 영국수송선 가오슝호(高陞號)가 일본 해군의 기습공격으로 격침되었다. 이어 29일에 벌어진 [[성환전투]]에서 일본 육군은 [[아산]]에 상륙했던 청국군을 쉽게 격파해 버렸다. 이후 일본은 청국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했으며, 청국도 이에 응해 대일선전포고를 하였다.<ref>유영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6610 [[청일전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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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죽지세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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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육군이 9월 15-17일 평양에 집결한 청국군 1만 4,000명을 격파하고, 17일 해군이 [[황해전투]]에서 청국함대를 격침시켜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렇게 [[평양]]과 황해에서 대승을 거둔 일본군은 곧이어 중국 본토에 대한 공략을 서둘렀다. 10월 하순 조선에 진주했던 일본의 제1군은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로 진격하고, 제2군은 랴오둥반도(遼東半島)에 상륙하여 11월 하순 여순(旅順)·다롄(大連)을 점령하였다. 그런 다음 1895년 2월 2일 산둥반도(山東半島)의 웨이하이웨이(威海衛)에 있던 청국의 북양함대기지를 공략하였다.<ref>유영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6610 [[청일전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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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노세키조약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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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는 사태가 불리하게 흐르자 전쟁을 마무리짓기 위하여 [[장인환|장인환(張蔭桓)]]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1895년 2월 초 두 차례 열린 [[히로시마회담|히로시마회담(廣島會談)]]에서 일본측은 자국에 더욱 유리한 강화조건을 확보할 목적으로 교섭을 거부하고 전투를 재개하였다. 그 결과 3월 중순까지 랴오둥반도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청국은 그제야 [[이홍장]]을 보내 강화회담 재개를 서둘렀다. 3월 20일부터 [[시모노세키|시모노세키(下關)]]에서 [[이토]]와 [[이홍장]]이 양국을 대표해 강화회의를 한 끝에 4월 17일 청일강화조약, 즉 [[시모노세키조약|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을 성립시켰다.<ref>유영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6610 [[청일전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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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의 배경===
 
===[[청일전쟁]]의 배경===
====[[동학농민 운동]]발발과 조선 정부가 청나라 군대를 요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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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발발과 조선 정부가 청나라 군대를 요청하다.====
 
1894년 봄 전라도에서 제1차 동학농민군(東學農民軍)이 봉기하자 조선 정부는 양력 5월 7일 [[홍계훈|홍계훈(洪啓薰)]]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임명, 진압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장성에서 정부군을 격파한 농민군은 31일 전주까지 함락시켰다. 6월 2일 전주가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정부는 자력으로는 농민군을 진압할 수 없다고 판단, [[임오군란]] 진압시의 전례에 따라 청국의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 [[위안스카이|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다. [[위안스카이]]를 통해 파병 요청을 받은 청국의 직례총독 겸 북양대신(直隷總督兼北洋大臣) [[이홍장|이홍장(李鴻章)]]은 6월 6일, [[톈진조약|톈진조약(天津條約)]]에 의거하여 일본에 파병 사실을 통고하는 한편, 직례제독 [[예즈차오|예즈차오(葉志超)]]와 [[딩루창|딩루창(丁汝昌)]] 휘하의 군사 2,800명을 충청도 [[아산]]에 급파하였다.<ref>유영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6610 [[청일전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1894년 봄 전라도에서 제1차 동학농민군(東學農民軍)이 봉기하자 조선 정부는 양력 5월 7일 [[홍계훈|홍계훈(洪啓薰)]]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임명, 진압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장성에서 정부군을 격파한 농민군은 31일 전주까지 함락시켰다. 6월 2일 전주가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정부는 자력으로는 농민군을 진압할 수 없다고 판단, [[임오군란]] 진압시의 전례에 따라 청국의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 [[위안스카이|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다. [[위안스카이]]를 통해 파병 요청을 받은 청국의 직례총독 겸 북양대신(直隷總督兼北洋大臣) [[이홍장|이홍장(李鴻章)]]은 6월 6일, [[톈진조약|톈진조약(天津條約)]]에 의거하여 일본에 파병 사실을 통고하는 한편, 직례제독 [[예즈차오|예즈차오(葉志超)]]와 [[딩루창|딩루창(丁汝昌)]] 휘하의 군사 2,800명을 충청도 [[아산]]에 급파하였다.<ref>유영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6610 [[청일전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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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 조선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나라 군을 기습 공격하다 [[청일전쟁]] 시작====
 
====일본 정부 조선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나라 군을 기습 공격하다 [[청일전쟁]] 시작====
본국 정부의 개전 결의를 전달받은 [[오토리]] 공사는, 조선 정부에 청국의 대조선종주권 주장에 대한 확답을 요구하는 시한부 최후통첩을 발한 뒤 23일 [[경복궁]]을 불법 점령, 쿠데타를 통해 [[흥선대원군|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 [[김홍집|김홍집(金弘集)]] 등을 앞세운 [[친일정권]]을 수립하였다. [[청일전쟁]]은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어 일본군은 서울의 조선군대를 무장시킨 다음 [[아산]] 근처에 집결한 청군을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청일간의 본격적인 전투는 7월 25일 일본 해군이 [[풍도|풍도(豊島)]] 앞바다에서 청국함대를 기습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 해전에서 청국군함과 청국 증원군을 태운 영국수송선 가오슝호(高陞號)가 일본 해군의 기습공격으로 격침되었다.이어 29일에 벌어진 [[성환전투]]에서 일본 육군은 [[아산]]에 상륙했던 청국군을 쉽게 격파해 버렸다. 일본 정부는 이처럼 육·해상의 초전에서 승리를 거둔 다음, 8월 1일에야 비로소 청국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했으며, 청국도 이에 응해 대일선전포고를 하였다.<ref>유영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6610 [[청일전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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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국 정부의 개전 결의를 전달받은 [[오토리]] 공사는, 조선 정부에 청국의 대조선종주권 주장에 대한 확답을 요구하는 시한부 최후통첩을 발한 뒤 23일 [[경복궁]]을 불법 점령, 쿠데타를 통해 [[흥선대원군 이하응|흥선대원군 이하응(興宣大院君)]]과 [[김홍집|김홍집(金弘集)]] 등을 앞세운 [[친일정권]]을 수립하였다. [[청일전쟁]]은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어 일본군은 서울의 조선군대를 무장시킨 다음 [[아산]] 근처에 집결한 청군을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청일간의 본격적인 전투는 7월 25일 일본 해군이 [[풍도|풍도(豊島)]] 앞바다에서 청국함대를 기습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 해전에서 청국군함과 청국 증원군을 태운 영국수송선 가오슝호(高陞號)가 일본 해군의 기습공격으로 격침되었다.이어 29일에 벌어진 [[성환전투]]에서 일본 육군은 [[아산]]에 상륙했던 청국군을 쉽게 격파해 버렸다. 일본 정부는 이처럼 육·해상의 초전에서 승리를 거둔 다음, 8월 1일에야 비로소 청국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했으며, 청국도 이에 응해 대일선전포고를 하였다.<ref>유영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6610 [[청일전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일본 군대의 거침없는 진격 청나라 군대는 계속 패배하다====
 
====일본 군대의 거침없는 진격 청나라 군대는 계속 패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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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간섭]]과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쇠퇴하다===
 
===[[삼국간섭]]과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쇠퇴하다===
[[삼국간섭 ]]이후 일본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은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이노우에]] 공사를 경질하고 그의 후임으로 예비역 육군중장 [[미우라|미우라(三浦梧樓)]]를 선발, 파견하였다. [[미우라]] 공사는 서울 부임 후 조선에 대한 장기적인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한 조처로 [[스기무라]] 서기관 등과 더불어 [[을미사변|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를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1895년 10월 8일 [[미우라]] 공사는 [[흥선대원군|대원군]]을 앞세우고 일본군·순사·장사 등을 동원하여 왕궁에 난입, [[명성황후|황후]]를 시해하였다. [[을미사변|황후시해사건(皇后弑害事件)]]이 일어나자 조선인의 반일감정은 극에 달하였다. 또한 관계 열강의 비난이 세차게 일어나 일본은 곤궁에 빠졌다. 이러한 때에 친일적인 [[김홍집]] 내각이 11월 중순 단발령을 선포, 시행하자 곳곳에서 반일의병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기화로 [[조선 고종|고종]]은 1896년 2월 11일 자신의 거처를 러시아공관으로 옮기는 이른바 [[아관파천|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였다. 이로써 조선의 [[친일정권]]은 붕괴되고 일본은 조선에서 정치적·군사적으로 후퇴하게 되었다.<ref>유영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6610 [[청일전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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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간섭 ]]이후 일본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은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이노우에]] 공사를 경질하고 그의 후임으로 예비역 육군중장 [[미우라|미우라(三浦梧樓)]]를 선발, 파견하였다. [[미우라]] 공사는 서울 부임 후 조선에 대한 장기적인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한 조처로 [[스기무라]] 서기관 등과 더불어 [[을미사변|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를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1895년 10월 8일 [[미우라]] 공사는 [[흥선대원군 이하응|대원군]]을 앞세우고 일본군·순사·장사 등을 동원하여 왕궁에 난입, [[명성황후|황후]]를 시해하였다. [[을미사변|황후시해사건(皇后弑害事件)]]이 일어나자 조선인의 반일감정은 극에 달하였다. 또한 관계 열강의 비난이 세차게 일어나 일본은 곤궁에 빠졌다. 이러한 때에 친일적인 [[김홍집]] 내각이 11월 중순 단발령을 선포, 시행하자 곳곳에서 반일의병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기화로 [[조선 고종|고종]]은 1896년 2월 11일 자신의 거처를 러시아공관으로 옮기는 이른바 [[아관파천|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였다. 이로써 조선의 [[친일정권]]은 붕괴되고 일본은 조선에서 정치적·군사적으로 후퇴하게 되었다.<ref>유영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6610 [[청일전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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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읽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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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논문
**문희수, 「國際關係에 있어서 淸日戰爭(1894~1895)에 關한 史料와 연구(淸日戰爭 110 週年을 맞이하여)」, 『한국정치외교사논총』, Vol 28, 2006, 87-1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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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효숙, 「일본의 전쟁 인식화(동학농민전쟁·청일전쟁 시기를 중심으로)」, 『한일민족문제연구』, Vol.29, No.-, 한일민족문제학회, 2015, 39-70쪽.  
**최규진, 「청일전쟁기 지식인의 국제정세 인식과 세계관」, 『아시아문화연구』, Vol 26, 2012, 155-1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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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진, 「청일전쟁기 지식인의 국제정세 인식과 세계관」, 『아시아문화연구』, Vol.26, No.-, 경원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2012, 155-189쪽.  
**강효숙, 「일본의 전쟁 인식화(동학농민전쟁·청일전쟁 시기를 중심으로)」, 『한일민족문제연구』, Vol 29, 2015, 39-70쪽.  
+
**문희수, 「國際關係에 있어서 淸日戰爭(1894~1895)에 關한 史料와 연구(淸日戰爭 110 週年을 맞이하여)」, 『한국정치외교사논총』, Vol.28, No.1, 한국정치외교사학회, 2006, 87-129쪽.  
  
===유용한 정보===
+
*웹사이트 내 특정 페이지
*유영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6610 [[청일전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유영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6610 [[청일전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분류:한글고문서]]
 
[[분류:한글고문서]]
 
[[분류:사건]]
 
[[분류:사건]]
[[분류:이창섭]]
 

2017년 11월 25일 (토) 00:00 기준 최신판

청일전쟁(淸日戰爭)
Hoodinski, "First Sino-Japanese War", 『Wikimedia Commons』online, Wikimedia Foundation, Inc.
대표명칭 청일전쟁
한자표기 淸日戰爭
유형 사건
시대 조선시대
날짜 1894년-1895년
관련유물유적 백동화 무효에 관한 고시



정의

조선 말기 조선의 지배를 둘러싸고 중국(청)과 일본 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내용

청군차용(淸軍借用) 요청

1894년 봄 전라도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조선 정부는 자력으로는 농민군을 진압할 수 없다고 판단, 임오군란 진압시의 전례에 따라 청국의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다. 위안스카이를 통해 파병 요청을 받은 청국의 직례총독 겸 북양대신(直隷總督兼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은 6월 6일, 톈진조약(天津條約)에 의거하여 일본에 파병 사실을 통고하는 한편, 직례제독 예즈차오(葉志超)딩루창(丁汝昌) 휘하의 군사 2,800명을 충청도 아산에 급파하였다.[1]

독단으로 들어온 일본군

일본 정부는 서울주재 임시대리공사 스기무라(杉村濬)로부터 조선이 청국에 파병을 요청하였다는 보고를 받았다. 내각총리대신 이토(伊藤博文)는 이 보고를 받은 즉시 '일본공사관 및 거류민을 보호한다.’라는 구실로 제5사단 오시마(大島義昌) 소장 휘하의 혼성여단을 조선에 파견하였다.[2]

조선 정부는, 일본이 독단으로 대규모 군인을 파병한 데 당황하고 이에 항의, 즉시 철병할 것을 요청하였다. 더욱이, 6월 11일 정부군과 동학농민군 사이에 전주화약(全州和約)이 성립되었기 때문에 외국군이 간섭할 구실이 없어진 상황이었다. 따라서 육전대(陸戰隊)와 함께 서울에 귀임한 오토리(大鳥圭介) 일본공사는, 위안스카이와 3차례에 걸친 회담 끝에 양국군의 공동 철수에 합의하기에 이르렀으나,[3] 일본 정부는 자국 내에서의 정치적 혼란을 청국과의 전쟁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4]

선전포고를 주고받은 청•일

일본 정부의 개전 결의를 전달받은 오토리 공사는, 조선 정부에 청국의 대조선종주권 주장에 대한 확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발한 뒤 7월 23일 경복궁을 불법 점령, 쿠데타를 통해 흥선대원군 이하응김홍집(金弘集) 등을 앞세운 친일정권을 수립하였다. 이어 일본군은 서울의 조선군대를 무장시킨 다음 아산 근처에 집결한 청군을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청일간의 본격적인 전투는 7월 25일 일본 해군이 풍도(豊島) 앞바다에서 청국함대를 기습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 해전에서 청국군함과 청국 증원군을 태운 영국수송선 가오슝호(高陞號)가 일본 해군의 기습공격으로 격침되었다. 이어 29일에 벌어진 성환전투에서 일본 육군은 아산에 상륙했던 청국군을 쉽게 격파해 버렸다. 이후 일본은 청국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했으며, 청국도 이에 응해 대일선전포고를 하였다.[5]

파죽지세 일본

일본 육군이 9월 15-17일 평양에 집결한 청국군 1만 4,000명을 격파하고, 17일 해군이 황해전투에서 청국함대를 격침시켜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렇게 평양과 황해에서 대승을 거둔 일본군은 곧이어 중국 본토에 대한 공략을 서둘렀다. 10월 하순 조선에 진주했던 일본의 제1군은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로 진격하고, 제2군은 랴오둥반도(遼東半島)에 상륙하여 11월 하순 여순(旅順)·다롄(大連)을 점령하였다. 그런 다음 1895년 2월 2일 산둥반도(山東半島)의 웨이하이웨이(威海衛)에 있던 청국의 북양함대기지를 공략하였다.[6]

시모노세키조약 성립

청나라는 사태가 불리하게 흐르자 전쟁을 마무리짓기 위하여 장인환(張蔭桓)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1895년 2월 초 두 차례 열린 히로시마회담(廣島會談)에서 일본측은 자국에 더욱 유리한 강화조건을 확보할 목적으로 교섭을 거부하고 전투를 재개하였다. 그 결과 3월 중순까지 랴오둥반도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청국은 그제야 이홍장을 보내 강화회담 재개를 서둘렀다. 3월 20일부터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이토이홍장이 양국을 대표해 강화회의를 한 끝에 4월 17일 청일강화조약, 즉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을 성립시켰다.[7]

지식 관계망

  • 백동화 무효에 관한 고시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임오군란 동학농민운동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임오군란 백동화 무효에 관한 고시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동학농민운동 전봉준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전주화약 명성황후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전주화약 조선 고종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갑오개혁 이토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갑오개혁 이홍장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친일정권 김홍집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친일정권 흥선대원군 이하응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을미사변 오토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을미사변 친일정권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을미사변 김홍집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을미사변 박영효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1894년 조선 정부군과 동학농민군은 전주화약을 맺었다
1894년 영국과 일본은 영일신조약을 맺었다
1894년-1895년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1894년-1896년 갑오개혁이 일어났다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1895년 4월 17일 청나라와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었다
1895년 4월 23일 러시아 프랑스 독일 3국이 일본에 간섭한 삼국간섭이 일어났다
1909년 백동화 무효에 관한 고시가 일어났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유영익, "청일전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유영익, "청일전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유영익, "청일전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유영익, "청일전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유영익, "청일전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유영익, "청일전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7. 유영익, "청일전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 논문
    • 강효숙, 「일본의 전쟁 인식화(동학농민전쟁·청일전쟁 시기를 중심으로)」, 『한일민족문제연구』, Vol.29, No.-, 한일민족문제학회, 2015, 39-70쪽.
    • 최규진, 「청일전쟁기 지식인의 국제정세 인식과 세계관」, 『아시아문화연구』, Vol.26, No.-, 경원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2012, 155-189쪽.
    • 문희수, 「國際關係에 있어서 淸日戰爭(1894~1895)에 關한 史料와 연구(淸日戰爭 110 週年을 맞이하여)」, 『한국정치외교사논총』, Vol.28, No.1, 한국정치외교사학회, 2006, 87-129쪽.
  • 웹사이트 내 특정 페이지
    • 유영익, "청일전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