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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 =='''내용'''== | ||
+ | ===[[을미사변]]이 일어나게 된 원인=== | ||
+ | ====청•러•일의 계산==== | ||
+ | *일본은 [[메이지유신]]이래 조선의 지배를 대외침략정책의 제1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목표에 결정적인 걸림돌이 있었다. 바로 청국과 러시아였다. 청국은 자국의 수도 북경의 안전을 위해 조선이 타국에 지배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시베리아철도의 건설을 통해 동아시아로 진출을 모색하던 상황에서 만주의 안정과 한반도의 영토보전이 필요하다는 입장 하에 조선에 대한 일본의 세력 확대를 견제하였기 때문이다.<ref>이민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948 을미사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5월 19일.</ref> | ||
+ | ====일본의 도발==== | ||
+ | *일본제국은 1890년대 초중반 청국과의 전쟁준비를 완료하였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조선에서 발생한 [[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봉기(1894)]]는 일본이 고대하던 전쟁 도발의 적기로 포착되었다. [[동학농민문동|농민봉기]] 이후 일본제국은 청나라를 기습 공격하여 [[청일전쟁]]을 승리로 마무리 지었다. 1895년4월 맺은 시모노세키조약을 통해 ‘청국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확인한다(제1조)’하였고, 요동반도의 할양(제2조) 등을 명시하였다. 만주 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함과 동시에 일본의 조선 지배를 기정사실화 한 것이었다. 나아가 일본의 모든 전쟁비용을 상회하는 2억 냥의 배상금을 부과시켜 청국의 재정을 곤두박질치게 하였다. 이를 이용하여 일본은 러일전쟁에 대비한 재무장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ref>이민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948 을미사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5월 19일.</ref> | ||
+ | ====러시아와 명성황후==== | ||
+ | *그러나 러시아는 즉각 일본의 행동을 견제하려는 쪽으로 방침을 굳히고, 1895년 4월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삼국간섭|삼국간섭(三國干涉)]]을 단행하였다. 러시아는 일본군을 만주지역에서 축출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서 조선에서도 반일적인 움직임이 표면화되면서 일본을 궁지로 몰아 넣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러한 분위기를 배후에서 유도한 것은 주한러시아공사인 [[베베르|베베르(Karl I. Wober: 韋貝)]]였지만, 조선 측의 핵심 인물은 [[명성왕후|왕후 민씨]]였다. [[베베르]]는 일본의 조선 지배를 견제하려는 것이었고, [[명성왕후|왕후]]는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 압제로부터 탈피하여 [[조선 고종|고종]]의 권력을 복구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ref>이민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948 을미사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5월 19일.</ref> | ||
+ | ====러시아 대신 황후를 치다==== | ||
+ | *일본정부의 당면 과제는 조선 문제의 처리였고, 그것은 러시아와 상대할 문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은 [[청일전쟁]] 직후 전력을 소모한 상태에서 러시아를 상대할 준비가 갖춰져 있지 않았다. 결국 러시아를 피하면서 조선 문제를 처리하는 손쉬운 방법은 직접 조선쪽을 상대하여 러시아와의 연결고리를 끊는 것이었다. 일본이 생각해낸 방법은 조선에서 반일세력의 핵심이자 러시아와의 연결고리인 [[명성황후|왕후]]를 제거하는 것이었다.<ref>이민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948 을미사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5월 19일.</ref> | ||
+ | ===을미년 시월 새벽에 일어난 참변=== | ||
+ | 10월 8일 새벽 일단의 일본인패들이 [[흥선대원군|대원군]]과 그의 아들 [[이재면]]을 납치하여 [[경복궁]]으로 향했다. 한편 일본인교관은 야간 훈련을 실시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일본군 훈련대를 [[경복궁]]까지 유인하였다. [[경복궁]]담을 넘어간 일본인들은 일본군의 엄호 하에 광화문을 열어젖혔다. 일본군에 이어 일본인들이 호위한 [[흥선대원군|대원군]]의 가마와 훈련대가 밀려들어갔다. 일본군의 습격은 북문으로부터도 있었다. 광화문 쪽에서 총성이 울리자 이미 북서쪽(추성문), 북동쪽(춘생문)을 통과한 별도의 일본군이 북쪽(신무문)을 공격해 들어갔다. [[경복궁]]에서는 숙위 중이던 시위대 교관 [[다이(William McEntyre Dye, 茶伊]])와 연대장 [[현흥택]]의 지휘 하에 비상 소집된 300-400명의 조선군 시위대가 저항하였으나 무기가 열세하여 곧 무너졌다. [[명성왕후|왕후]]의 거처에서 만행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군은 사방의 출입구를 봉쇄하였다. 이들은 참혹하게 난자하여 살해한 시신을 근처의 수풀 속으로 옮겨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석유를 부어 불태워 버렸다.<ref>이민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948 을미사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5월 19일.</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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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의 개요=== | ===[[을미사변]]의 개요=== | ||
− | 을미년(1895)에 일어나 [[을미사변]]이라 명칭이 붙었으며, [[을미사변|명성황후시해사건(明成皇后弑害事件)]]이라고도 한다. 사건 당시 서울 현지에서 이를 지휘한 일본측 최고위 인물은 부임한지 37일밖에 안되는 일본공사 [[미우라 | + | 을미년(1895)에 일어나 [[을미사변]]이라 명칭이 붙었으며, [[을미사변|명성황후시해사건(明成皇后弑害事件)]]이라고도 한다. 사건 당시 서울 현지에서 이를 지휘한 일본측 최고위 인물은 부임한지 37일밖에 안되는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였으며, 주요 무력은 서울 주둔의 일본군 수비대이고, 행동대는 일본공사관원, 영사경찰, 신문기자, 낭인배 등이었다. 이들은 [[미우라]]의 직접 지시하에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을 기습하여, [[조선 고종|고종]]의 왕후인 [[명성황후|중전 민씨(1897년 명성황후로 추존)]]를 참혹히 살해하였다. 그리고 시신은 근처의 숲속으로 옮겨 장작더미 위에 올려 놓고 석유를 부어 불태워 버렸다.<ref>이민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948 을미사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을미사변]]의 진실은 무엇인가?=== | ===[[을미사변]]의 진실은 무엇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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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의 완성된 청나라와의 전투, 이후 배상금으로 러시아와도 전쟁을 하려하다==== | ====일본 제국의 완성된 청나라와의 전투, 이후 배상금으로 러시아와도 전쟁을 하려하다==== | ||
− | 이렇듯 일본은 조선침략을 치밀하게 준비해 왔으며, | + | 이렇듯 일본은 조선침략을 치밀하게 준비해 왔으며, 1890년대 초중반 청국과의 전쟁준비를 완료하였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조선에서 발생한 [[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봉기(1894)]]는 일본이 고대하던 전쟁 도발의 적기로 포착되었다. [[동학농민문동|농민봉기]]는 그들의 의지와는 반대로 일본에게 적절히 이용된 사건이었다.[[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하관조약(1895.4.17)을 통해 ‘청국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확인한다(제1조)’ 하였고, 요동반도의 할양(제2조) 등을 명시하였다. 만주 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함과 동시에 일본의 조선지배를 기정사실화 한 것이었다. 나아가 일본의 모든 전쟁비용을 상회하는 2억냥의 배상금을 부과시켜 청국의 재정을 곤두박질치게 하는 대신, 일본은 러일전쟁에 대비한 재무장에 박차를 가하였다.<ref>이민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948 을미사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일본 제국의 움직임에 제동을 건 나라들 러시아와 조선==== | ====일본 제국의 움직임에 제동을 건 나라들 러시아와 조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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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상해에서 서양의 선교사들이 발간한 ‘북화첩보’(北華捷報: The North China Herald)에서는 조선과 일본주재 통신원의 다양한 보고를 토대로 이렇게 보도하였다. “사건의 주모자는 [[이노우에]]이며, [[미우라]]가 조선공사로 임명될 때 이미 그가 [[이노우에]]의 희생양이라는 것이 잘 알려져 있었다. …… 이 사건은 [[미우라]]가 일본을 떠나오기 전에 계획된 것이다.” 결국 사건의 지휘계통은 ‘이토내각(배후)->[[이노우에]](중개역)->[[미우라]](하수역)’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얼마 뒤 일본정부에서는 감옥에 수감된 범죄자들을 ‘증거불충분’이라 하여 전원 무죄 방면하였다(1896.1.20). 범죄자들은 감옥에서조차 일본의 관민으로부터 영웅처럼 대우를 받았고, [[미우라]]가 석방되어 동경에 도착하자 일본천황은 그의 ‘노고’를 치하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북화첩보’에서는 “일본정부는 이 음모를 사전에 알지 못한 것처럼 가장하면서도 희색은 만면 …… 사건과 일본정부의 관계는 독자가 알아서 판단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일본정부와 사건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ref>이민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948 을미사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다만 상해에서 서양의 선교사들이 발간한 ‘북화첩보’(北華捷報: The North China Herald)에서는 조선과 일본주재 통신원의 다양한 보고를 토대로 이렇게 보도하였다. “사건의 주모자는 [[이노우에]]이며, [[미우라]]가 조선공사로 임명될 때 이미 그가 [[이노우에]]의 희생양이라는 것이 잘 알려져 있었다. …… 이 사건은 [[미우라]]가 일본을 떠나오기 전에 계획된 것이다.” 결국 사건의 지휘계통은 ‘이토내각(배후)->[[이노우에]](중개역)->[[미우라]](하수역)’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얼마 뒤 일본정부에서는 감옥에 수감된 범죄자들을 ‘증거불충분’이라 하여 전원 무죄 방면하였다(1896.1.20). 범죄자들은 감옥에서조차 일본의 관민으로부터 영웅처럼 대우를 받았고, [[미우라]]가 석방되어 동경에 도착하자 일본천황은 그의 ‘노고’를 치하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북화첩보’에서는 “일본정부는 이 음모를 사전에 알지 못한 것처럼 가장하면서도 희색은 만면 …… 사건과 일본정부의 관계는 독자가 알아서 판단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일본정부와 사건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ref>이민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948 을미사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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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 *논문 | ||
− | **김영수, 「세레진 사바찐의 하루(을미사변에 관한 기억과 선택)」, 『역사비평』, Vol 91, 2010, 329-362쪽. | + | **김영수, 「세레진 사바찐의 하루(을미사변에 관한 기억과 선택)」, 『역사비평』, Vol.-, No.91, 역사문제연구소, 2010, 329-362쪽. |
− | **김종현, 「근대한러관계연구: 아관파천과 한러관계의 진전 ; 을미사변 이후 아관파천까지 베베르의 활동」, 『史林』, Vol 35, 2010, 20-58쪽. | + | **김종현, 「근대한러관계연구: 아관파천과 한러관계의 진전 ; 을미사변 이후 아관파천까지 베베르의 활동」, 『史林』, Vol.35, No.-, 수선사학회, 2010, 20-58쪽. |
− | **신명호, 「을미사변 후 고종의 國母復讎와 君主專制論」, 『동북아 문화연구』, Vol 19, 2009, 5-22쪽. | + | **신명호, 「을미사변 후 고종의 國母復讎와 君主專制論」, 『동북아 문화연구』, Vol.19, No.-, 동북아시아문학학회, 2009, 5-22쪽. |
− | **김영수, 「을미사변, 그 하루의 기록 (대원군의 침묵과 명성황후암살의 배후)」, 『梨花史學硏究』, Vol 39, 2009, 193-225쪽. | + | **김영수, 「을미사변, 그 하루의 기록 (대원군의 침묵과 명성황후암살의 배후)」, 『梨花史學硏究』, Vol.39, No.-, 梨花女子大學校 史學硏究所, 2009, 193-22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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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사이트 내 특정 페이지 | ||
+ | **이민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948 을미사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분류:한글고문서]] | [[분류:한글고문서]] | ||
[[분류:사건]] | [[분류: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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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4일 (금) 23:59 기준 최신판
을미사변(乙未事變) | |
대표명칭 | 을미사변 |
---|---|
한자표기 | 乙未事變 |
이칭 | 명성황후시해사건 |
유형 | 사건 |
시대 | 조선시대 |
날짜 |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
관련인물 | 명성황후, 미우라, 조선 고종 |
관련장소 | 경복궁 |
관련유물유적 | 순명효황후 한글편지, 책황귀비홀기 |
목차
정의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새벽 일본의 공권력 집단이 서울에서 자행한 왕비 살해사건이다.
내용
을미사변이 일어나게 된 원인
청•러•일의 계산
- 일본은 메이지유신이래 조선의 지배를 대외침략정책의 제1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목표에 결정적인 걸림돌이 있었다. 바로 청국과 러시아였다. 청국은 자국의 수도 북경의 안전을 위해 조선이 타국에 지배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시베리아철도의 건설을 통해 동아시아로 진출을 모색하던 상황에서 만주의 안정과 한반도의 영토보전이 필요하다는 입장 하에 조선에 대한 일본의 세력 확대를 견제하였기 때문이다.[1]
일본의 도발
- 일본제국은 1890년대 초중반 청국과의 전쟁준비를 완료하였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조선에서 발생한 동학농민봉기(1894)는 일본이 고대하던 전쟁 도발의 적기로 포착되었다. 농민봉기 이후 일본제국은 청나라를 기습 공격하여 청일전쟁을 승리로 마무리 지었다. 1895년4월 맺은 시모노세키조약을 통해 ‘청국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확인한다(제1조)’하였고, 요동반도의 할양(제2조) 등을 명시하였다. 만주 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함과 동시에 일본의 조선 지배를 기정사실화 한 것이었다. 나아가 일본의 모든 전쟁비용을 상회하는 2억 냥의 배상금을 부과시켜 청국의 재정을 곤두박질치게 하였다. 이를 이용하여 일본은 러일전쟁에 대비한 재무장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2]
러시아와 명성황후
- 그러나 러시아는 즉각 일본의 행동을 견제하려는 쪽으로 방침을 굳히고, 1895년 4월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삼국간섭(三國干涉)을 단행하였다. 러시아는 일본군을 만주지역에서 축출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서 조선에서도 반일적인 움직임이 표면화되면서 일본을 궁지로 몰아 넣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러한 분위기를 배후에서 유도한 것은 주한러시아공사인 베베르(Karl I. Wober: 韋貝)였지만, 조선 측의 핵심 인물은 왕후 민씨였다. 베베르는 일본의 조선 지배를 견제하려는 것이었고, 왕후는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 압제로부터 탈피하여 고종의 권력을 복구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3]
러시아 대신 황후를 치다
- 일본정부의 당면 과제는 조선 문제의 처리였고, 그것은 러시아와 상대할 문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은 청일전쟁 직후 전력을 소모한 상태에서 러시아를 상대할 준비가 갖춰져 있지 않았다. 결국 러시아를 피하면서 조선 문제를 처리하는 손쉬운 방법은 직접 조선쪽을 상대하여 러시아와의 연결고리를 끊는 것이었다. 일본이 생각해낸 방법은 조선에서 반일세력의 핵심이자 러시아와의 연결고리인 왕후를 제거하는 것이었다.[4]
을미년 시월 새벽에 일어난 참변
10월 8일 새벽 일단의 일본인패들이 대원군과 그의 아들 이재면을 납치하여 경복궁으로 향했다. 한편 일본인교관은 야간 훈련을 실시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일본군 훈련대를 경복궁까지 유인하였다. 경복궁담을 넘어간 일본인들은 일본군의 엄호 하에 광화문을 열어젖혔다. 일본군에 이어 일본인들이 호위한 대원군의 가마와 훈련대가 밀려들어갔다. 일본군의 습격은 북문으로부터도 있었다. 광화문 쪽에서 총성이 울리자 이미 북서쪽(추성문), 북동쪽(춘생문)을 통과한 별도의 일본군이 북쪽(신무문)을 공격해 들어갔다. 경복궁에서는 숙위 중이던 시위대 교관 다이(William McEntyre Dye, 茶伊)와 연대장 현흥택의 지휘 하에 비상 소집된 300-400명의 조선군 시위대가 저항하였으나 무기가 열세하여 곧 무너졌다. 왕후의 거처에서 만행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군은 사방의 출입구를 봉쇄하였다. 이들은 참혹하게 난자하여 살해한 시신을 근처의 수풀 속으로 옮겨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석유를 부어 불태워 버렸다.[5]
지식 관계망
- 순명효황후 한글편지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을미사변 | 미우라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을미사변 | 경복궁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을미사변 | 흥선대원군 이하응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을미사변 | 고바야카와 히데오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을미사변 | 기꾸치 겐죠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청일전쟁 | 동학농민운동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을미사변 | 스기무라 후카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을미사변 | 오카모토 류노스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을미사변 | 구스노세 사치히코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을미사변 | 이경직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을미사변 | 다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을미사변 | 명성황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명성황후 | 베베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흥선대원군 이하응 | 이재면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흥선대원군 이하응 | 조선 고종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조선 고종 | 명성황후 | A는 B의 남편이다 | A ekc:hasWife B |
을미사변 | 이범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삼국간섭 | 을미사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삼국간섭 | 워베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삼국간섭 | 이완용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을미사변 | 책황귀비홀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을미사변 | 순명효황후 한글편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867년 | 일본에서 명치유신이 일어났다 |
1894년 | 조선에서 동학농민 운동이 일어났다 |
1894년-1895년 |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
1895년 | 경복궁에서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
1895년 4월 23일 | 청일전쟁 이후 삼국간섭이 일어났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7.578019 | 126.976862 | 을미사변은 경복궁에서 일어났다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이민원, "을미사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5월 19일. - ↑ 이민원, "을미사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5월 19일. - ↑ 이민원, "을미사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5월 19일. - ↑ 이민원, "을미사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5월 19일. - ↑ 이민원, "을미사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5월 19일.
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 논문
- 김영수, 「세레진 사바찐의 하루(을미사변에 관한 기억과 선택)」, 『역사비평』, Vol.-, No.91, 역사문제연구소, 2010, 329-362쪽.
- 김종현, 「근대한러관계연구: 아관파천과 한러관계의 진전 ; 을미사변 이후 아관파천까지 베베르의 활동」, 『史林』, Vol.35, No.-, 수선사학회, 2010, 20-58쪽.
- 신명호, 「을미사변 후 고종의 國母復讎와 君主專制論」, 『동북아 문화연구』, Vol.19, No.-, 동북아시아문학학회, 2009, 5-22쪽.
- 김영수, 「을미사변, 그 하루의 기록 (대원군의 침묵과 명성황후암살의 배후)」, 『梨花史學硏究』, Vol.39, No.-, 梨花女子大學校 史學硏究所, 2009, 193-225쪽.
- 웹사이트 내 특정 페이지
- 이민원, "을미사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민원, "을미사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