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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 | + | {{사건정보 |
+ | |사진=한글팀_을미사변_01_을미사변_옥호루.jpg | ||
+ | |사진출처=이민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948 을미사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05월 19일.. | ||
+ | |대표명칭=을미사변 | ||
+ | |한자표기=乙未事變 | ||
+ | |영문명칭= | ||
+ | |이칭=명성황후시해사건 | ||
+ | |유형=사건 | ||
+ | |시대=조선시대 | ||
+ | |날짜=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 ||
+ | |관련인물=[[명성황후]], [[미우라]], [[조선 고종]] | ||
+ | |관련단체= | ||
+ | |관련장소=[[경복궁]] | ||
+ | |관련물품= | ||
+ | |관련유물유적= [[순명효황후 한글편지]], [[책황귀비홀기]] | ||
+ | }} | ||
+ | =='''정의'''== | ||
+ |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새벽 일본의 공권력 집단이 서울에서 자행한 왕비 살해사건이다. | ||
+ | =='''내용'''== | ||
+ | ===[[을미사변]]이 일어나게 된 원인=== | ||
+ | ====청•러•일의 계산==== | ||
+ | *일본은 [[메이지유신]]이래 조선의 지배를 대외침략정책의 제1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목표에 결정적인 걸림돌이 있었다. 바로 청국과 러시아였다. 청국은 자국의 수도 북경의 안전을 위해 조선이 타국에 지배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시베리아철도의 건설을 통해 동아시아로 진출을 모색하던 상황에서 만주의 안정과 한반도의 영토보전이 필요하다는 입장 하에 조선에 대한 일본의 세력 확대를 견제하였기 때문이다.<ref>이민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948 을미사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5월 19일.</ref> | ||
+ | ====일본의 도발==== | ||
+ | *일본제국은 1890년대 초중반 청국과의 전쟁준비를 완료하였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조선에서 발생한 [[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봉기(1894)]]는 일본이 고대하던 전쟁 도발의 적기로 포착되었다. [[동학농민문동|농민봉기]] 이후 일본제국은 청나라를 기습 공격하여 [[청일전쟁]]을 승리로 마무리 지었다. 1895년4월 맺은 시모노세키조약을 통해 ‘청국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확인한다(제1조)’하였고, 요동반도의 할양(제2조) 등을 명시하였다. 만주 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함과 동시에 일본의 조선 지배를 기정사실화 한 것이었다. 나아가 일본의 모든 전쟁비용을 상회하는 2억 냥의 배상금을 부과시켜 청국의 재정을 곤두박질치게 하였다. 이를 이용하여 일본은 러일전쟁에 대비한 재무장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ref>이민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948 을미사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5월 19일.</ref> | ||
+ | ====러시아와 명성황후==== | ||
+ | *그러나 러시아는 즉각 일본의 행동을 견제하려는 쪽으로 방침을 굳히고, 1895년 4월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삼국간섭|삼국간섭(三國干涉)]]을 단행하였다. 러시아는 일본군을 만주지역에서 축출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서 조선에서도 반일적인 움직임이 표면화되면서 일본을 궁지로 몰아 넣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러한 분위기를 배후에서 유도한 것은 주한러시아공사인 [[베베르|베베르(Karl I. Wober: 韋貝)]]였지만, 조선 측의 핵심 인물은 [[명성왕후|왕후 민씨]]였다. [[베베르]]는 일본의 조선 지배를 견제하려는 것이었고, [[명성왕후|왕후]]는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 압제로부터 탈피하여 [[조선 고종|고종]]의 권력을 복구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ref>이민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948 을미사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5월 19일.</ref> | ||
+ | ====러시아 대신 황후를 치다==== | ||
+ | *일본정부의 당면 과제는 조선 문제의 처리였고, 그것은 러시아와 상대할 문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은 [[청일전쟁]] 직후 전력을 소모한 상태에서 러시아를 상대할 준비가 갖춰져 있지 않았다. 결국 러시아를 피하면서 조선 문제를 처리하는 손쉬운 방법은 직접 조선쪽을 상대하여 러시아와의 연결고리를 끊는 것이었다. 일본이 생각해낸 방법은 조선에서 반일세력의 핵심이자 러시아와의 연결고리인 [[명성황후|왕후]]를 제거하는 것이었다.<ref>이민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948 을미사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5월 19일.</ref> | ||
+ | ===을미년 시월 새벽에 일어난 참변=== | ||
+ | 10월 8일 새벽 일단의 일본인패들이 [[흥선대원군|대원군]]과 그의 아들 [[이재면]]을 납치하여 [[경복궁]]으로 향했다. 한편 일본인교관은 야간 훈련을 실시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일본군 훈련대를 [[경복궁]]까지 유인하였다. [[경복궁]]담을 넘어간 일본인들은 일본군의 엄호 하에 광화문을 열어젖혔다. 일본군에 이어 일본인들이 호위한 [[흥선대원군|대원군]]의 가마와 훈련대가 밀려들어갔다. 일본군의 습격은 북문으로부터도 있었다. 광화문 쪽에서 총성이 울리자 이미 북서쪽(추성문), 북동쪽(춘생문)을 통과한 별도의 일본군이 북쪽(신무문)을 공격해 들어갔다. [[경복궁]]에서는 숙위 중이던 시위대 교관 [[다이(William McEntyre Dye, 茶伊]])와 연대장 [[현흥택]]의 지휘 하에 비상 소집된 300-400명의 조선군 시위대가 저항하였으나 무기가 열세하여 곧 무너졌다. [[명성왕후|왕후]]의 거처에서 만행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군은 사방의 출입구를 봉쇄하였다. 이들은 참혹하게 난자하여 살해한 시신을 근처의 수풀 속으로 옮겨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석유를 부어 불태워 버렸다.<ref>이민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948 을미사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5월 19일.</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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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을미사변]]의 개요=== | ||
+ | 을미년(1895)에 일어나 [[을미사변]]이라 명칭이 붙었으며, [[을미사변|명성황후시해사건(明成皇后弑害事件)]]이라고도 한다. 사건 당시 서울 현지에서 이를 지휘한 일본측 최고위 인물은 부임한지 37일밖에 안되는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였으며, 주요 무력은 서울 주둔의 일본군 수비대이고, 행동대는 일본공사관원, 영사경찰, 신문기자, 낭인배 등이었다. 이들은 [[미우라]]의 직접 지시하에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을 기습하여, [[조선 고종|고종]]의 왕후인 [[명성황후|중전 민씨(1897년 명성황후로 추존)]]를 참혹히 살해하였다. 그리고 시신은 근처의 숲속으로 옮겨 장작더미 위에 올려 놓고 석유를 부어 불태워 버렸다.<ref>이민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948 을미사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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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을미사변]]의 진실은 무엇인가?=== | ||
+ | ====[[을미사변]]에 대한 일본 정부와 기자들 입장==== | ||
+ | 사건의 배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이견이 분분하다. 당초부터 은밀히 진행된 사건인 데다가 사건 직후, 일본측이 철저히 자료를 인멸, 왜곡했기때문이다. [[미우라]]는 [[흥선대원군|대원군]]이 사건을 주모하였으며 왕후의 시해는 조선군 훈련대가 자행한 것이라고 위증하였는가 하면, 공정한 재판을 통해 자국의 불명예를 씻겠다던 일본정부는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를 들어 범죄에 관련된 일본군민 모두를 무죄 방면하였다. 나아가 사건 현장에 참여했던 [[기꾸치 겐죠[菊池謙讓]]],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 등 [[한성신보사]](서울의 일본신문사)의 일본인 기자는 후일의 저작(『[[대원군]]』,『[[조선근대사]]』,『[[민후조락사건]]』,『[[조선잡기]]』등)을 통해 [[흥선대원군|대원군]]과 왕후의 갈등구도로 한국근대사를 날조하였고, 이 사건에 대해서도 그렇게 기술하였다. 그 결과 한국인 일반에게는 이 사건이 일본의 국가적 범죄라는 것이 상식화되어 있는 반면 일본인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일본측 연구자들은 [[미우라]]가 단독으로 계획하여 자행한 것으로 그 이상의 배후는 없으며 조선측에서도 [[흥선대원군|대원군]]이 적극 협조하였다는 입장이다. 즉 [[명성왕후|왕후 민씨]]와 정치적 대립관계에 있던 [[흥선대원군|대원군]]과 [[미우라]]가 공모한 사건이라는 주장이다. 사건 현장의 지휘구도에 대해서도 일본군 장교 대신 낭인배의 역할이 중심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ref>이민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948 을미사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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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인 현대 한국사학자와 한국인 학자들의 반박==== | ||
+ | 그러나 [[흥선대원군|대원군]]이 이 음모와 무관함은 재일사학자 [[박종근|박종근(朴宗根)]]이 이미 일본측 자료의 정밀한 추적을 통해 밝혀 놓은 바 있고, 사건의 주요 무력 기반이 일본군이었음도 일본의 한국사 연구자였던 [[야마베 겐따로[山邊健太郞]]]가 밝혀 놓았다. 남은 의문은 사건에 [[흥선대원군|대원군]]이 간여했는가, 혹은 일본 정규군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가라는 것이 아니라, 사건 배후구도는 어떠하며, 일본측이 [[명성황후|왕후 민씨]]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일본정부가 여타의 수단을 배제한 채 그토록 야만적인 수단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등이 밝혀져야 할 것이다. 한국측 연구자들은 일본정부가 이 사건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과 같다고 보고 있다. [[흥선대원군|대원군]]의 요청에 일본국을 대표하는 공사가 선선히 응했다는 주장도 어불성설이거니와 조선군 훈련대의 거사에 일본군이 요청을 받아 지원을 해 주었다는 논리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일본국을 대표하는 공사가 정부의 지시도 없이 그와 같은 범죄를 독단적으로 계획하고 자행하였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ref>이민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948 을미사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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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정부 왜 [[을미사변]]을 실행했나?=== | ||
+ | ====일본 제국의 확장 정책과 그들의 적 러시아와 청나라==== | ||
+ | 이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청일전쟁]]에서 이 사건에 이르기까지 조선과 만주를 둘러싸고 전개된 러시아와 일본의 갈등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일본은 [[명치유신]]이래 조선의 지배를 대외침략정책의 제1의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러한 목표는 서세동점의 위기를 타개하고 자국의 활로를 모색한다는 취지하에 설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목표에 결정적인 걸림돌이 있었다. 청국과 러시아였다. 청국은 자국의 수도 북경의 안전을 위해 조선이 타국에 지배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시베리아철도의 건설을 통해 동아시아로 진출을 모색하고 있던 상황에서 만주의 안정과 한반도의 영토보전이 필요하다는 입장하에 조선에 대한 일본의 세력확대를 견제했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은 청국과는 물론, 러시아와도 일전을 치러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그러한 인식은 이미 1890년대초에 드러나고 있었다. 수상 [[야마가타[山縣有朋]는]] 그의 의견서(1890.3)에서 ‘일본의 이익선의 촛점은 실로 조선에 있으며 ……조선의 독립은 시베리아철도가 완공되는 날 살얼음을 딛는 운명에 처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1880∼1890년대에 걸쳐 일본이 군비확충에 박차를 가한 것이나 일본육군참모본부에서 조선과 만주에 밀정을 파견하여 정보수집에 열중하였던 것도 그러한 배경에서 취해진 것이었다. 일본이 광개토왕능비문의 탁본을 입수하여 비문 날조를 시도한 것도 이 시점이었다.<ref>이민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948 을미사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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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제국의 완성된 청나라와의 전투, 이후 배상금으로 러시아와도 전쟁을 하려하다==== | ||
+ | 이렇듯 일본은 조선침략을 치밀하게 준비해 왔으며, 1890년대 초중반 청국과의 전쟁준비를 완료하였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조선에서 발생한 [[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봉기(1894)]]는 일본이 고대하던 전쟁 도발의 적기로 포착되었다. [[동학농민문동|농민봉기]]는 그들의 의지와는 반대로 일본에게 적절히 이용된 사건이었다.[[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하관조약(1895.4.17)을 통해 ‘청국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확인한다(제1조)’ 하였고, 요동반도의 할양(제2조) 등을 명시하였다. 만주 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함과 동시에 일본의 조선지배를 기정사실화 한 것이었다. 나아가 일본의 모든 전쟁비용을 상회하는 2억냥의 배상금을 부과시켜 청국의 재정을 곤두박질치게 하는 대신, 일본은 러일전쟁에 대비한 재무장에 박차를 가하였다.<ref>이민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948 을미사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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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제국의 움직임에 제동을 건 나라들 러시아와 조선==== | ||
+ | 그런데 일본의 행태에 제동을 건 몇몇 나라가 있었다. 가장 민감한 대응을 보인 쪽은 러시아였다. [[청일전쟁]] 초기 관망하던 러시아는 전장(戰場)이 만주로 확대되자, 일본의 목표가 자국의 시베리아횡단철도에 향해져 있음을 깨닫고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였다. 이어 강화조약에 요동반도의 할양이 명시되었음을 확인하자, 러시아는 즉각 일본의 행동을 견제하려는 쪽으로 방침을 굳히고, 불·독을 끌어들여 [[삼국간섭|삼국간섭(三國干涉, 1895.4.23)]]을 단행하였다. 러시아는 일본군을 만주지역에서 축출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서 조선에서도 반일적인 움직임이 표면화되면서 일본을 궁지로 몰아 넣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러시아세력과 손을 잡고 일본세력을 축출(引俄拒日)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를 배후에서 유도한 것은 주한러시아공사인 [[베베르|베베르(Karl I. W○ber: 韋貝)]]였지만, 조선측의 핵심 인물은 [[명성왕후|왕후 민씨]]였다. [[베베르]]는 일본의 조선지배를 견제하려는 것이었고, [[명성왕후|왕후]]는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 압제로부터 탈피하여 [[조선 고종|고종]]의 권력을 복구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일례로 [[베베르]]는 영·미·불 등 열국공사와 함께 [[이노우에]]를 방문하여, 한반도에서 행해지는 일본의 독주에 대해 경고하였다. 이런 움직임을 파악한 왕후는 [[이노우에]]의 행동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고 나섰는데, 때문에 [[이노우에]]의 조선 ‘보호국화’ 기도가 장벽에 부딪쳤다.<ref>이민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948 을미사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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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 주도의 [[삼국간섭]]과 조선 문제에 비상이 걸린 일본==== | ||
+ | 이후 일본에서는 요동반도 환부와 조선문제의 처리를 놓고 비상이 걸렸다. 내각회의가 거듭되었고(6.4), [[이노우에]]도 본국에 휴가를 요청하여 귀국하였다(6.7, 서울 출발. 6.20, 요코하마 도착). 일본에 도착한 [[이노우에]]는 (1) 자신의 후임으로 [[미우라[三浦梧樓]]]를 추천하고, (2) 내각회의에서 500(후에 300)만엔을 조선에 제공할 것을 건의하였다(7.10∼7.11). 그런데 일본정부가 외교에 문외한인 육군중장 출신의 예비역 장성 [[미우라]]를 주한공사로 파견한 이유에 대해서는 일본측 당로자들의 주장은 모호하다. [[이토|이토(『伊藤博文傳』)]]는 [[이노우에]]가 [[미우라]]를 추천하였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였을 뿐이라 하였다. 반면에 [[이노우에|이노우에(『世外井上公傳』)]]는 [[미우라]]의 파견은 [[이토]]가 결정한 일이라 하였으며, [[미우라]] 자신은 [[이토]]와 [[이노우에]]가 자신을 한국으로 밀어내듯 쫓아보냈다(『[[관수장군회고록|관수장군회고록(觀樹將軍回顧錄)]]』)고 하였다. 당시의 조선사태에 대해 [[이토]]는, “만일 종래처럼 한국의 개혁을 추진한다면 러시아의 방해를 받을 것이고 그렇다고 중단한다면 일청전쟁은 전혀 그 의의를 상실하는 동시에 도리어 러시아에게 한국을 엿볼 수 있는 기회까지 허용할 우려가 있어 난처하다”(『[[이등박문전|이등박문전(伊藤博文傳)]]』)고 하였다.<ref>이민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948 을미사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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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시 일본의 상황을 기록한 고바야카와의 증언==== | ||
+ | 사진기까지 휴대하고 [[명성왕후|왕후]]시해의 현장에 ‘출동’하였던 [[한성신보사|한성신보사(서울의 일본신문사)]] 기자 [[고바야카와]]도 후일 이렇게 기록하였다. “[[청일전쟁]]을 도발한 의도에서 보거나 거액의 전비를 쓰고 자국의 청년들을 희생시킨 점에 비춰 본다면, 또한 동양장래의 평화와 일본제국의 영원한 안위를 생각한다면, 러시아세력의 신장을 방임할 수 없었던 것이니 ……오로지 비상한 수단으로 한러 관계를 차단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었다. 즉 러시아와 왕실이 굳게 악수하며 서로 호응하고 온갖 음모를 다함에는 일도양단(一刀兩斷)!……환언하면 왕실의 중심이요, 대표적 인물인 [[명성황후|민후]]를 제거하여 러시아로 하여금 결탁할 당사자를 상실케 하는 이외에 다른 좋은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만일에 [[명성황후|민후]]를 궁중에서 제거한다면 [[베베르]] 같은 자가 누구를 통해 한국의 상하를 조종할 수 있겠는가......한국의 정치활동가 중에도 그 지략과 수완이 일개 [[명성황후|민후]]의 위에 있는 자가 없었으니 [[명성황후|민후]]는 실로 당대무쌍의 뛰어난 인물이었다” (『[[민후조락사건]]』).<ref>이민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948 을미사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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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러시아를 상대하지 않고 조선문제를 처리하는 방안을 모색하다==== | ||
+ | 일본정부의 당면 과제는 조선문제의 처리였고, 그것은 러시아와 상대할 문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은 [[청일전쟁]] 직후 전력을 소모한 상태에서 러시아를 상대할 준비가 갖춰져 있지 않았다. 결국 러시아를 상대하지 않고 조선 문제를 처리하는 손쉬운 방법은 직접 조선쪽을 상대하여 러시아와의 연결고리를 끊는 것이었다. 일본이 당면한 내외의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서는 조선에서 반일세력의 핵심이자 러시아와의 연결고리인 [[명성황후|왕후]]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이것은 향후 일본의 침략에 저항할 조선의 어떤 인물이나 집단에 대해서도 미리 쐐기를 박자는 정략이기도 했다. 조선인들에게 공포심을 자아내 일본에 대한 저항의욕을 봉쇄하려는 심리전적 조치이기도 했다. 외교에 문외한인 육군중장 출신의 [[미우라]]가 떠밀다시피 하여 주한공사로 파견된 것은 바로 이때였다. 일본의 내각회의에 참석한 뒤, 7월 하순 서울로 돌아온 [[이노우에]]는 종래의 위압적 자세를 전환, 미처 확정되지 않은 300만엔 기증금 제공 건을 확언하며 [[조선 고종|고종]]과 [[명성왕후|왕후]]의 환심을 사려하였다.<ref>이민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948 을미사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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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노우에]] 후임으로 온 [[미우라]] 결국 칼을 뽑기로 하다==== | ||
+ | [[이노우에]]는 후임자인 [[미우라]]가 부임(공식임명: 8.17, 서울도착: 9.1)하였지만, 업무인계를 핑계로 17일간을 일본공사관에 머물렀다. 그런데 그가 서울을 떠난 것은 9월 17일, 인천에서 4일간 더 머물다가 일본으로 향했으니,(9.21) [[명성왕후|왕후]]를 시해하기 불과 17일전이다. 그가 서울을 떠난 직후 서울에서는 [[명성왕후|왕후]]제거설이 나돌기 시작했다. 마침내 10월 3일 일본공사관 밀실에서 [[미우라]]·[[스기무라 후카시(衫村濬: 공사관 서기)]]·[[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공사관부무관 겸 조선군부고문)]]·[[구스노세 사치히코(楠瀨幸彦: 포병중좌)]] 등이 [[명성왕후|왕후]]시해의 구체안을 확정하였다. 이들은 서울 주둔 일본군 수비대를 주력으로 조선정부의 일본인고문, 한성신보사 사장과 기자, 영사경찰, 낭인배 등을 고루 동원하였다. 만일의 경우 사후 책임전가를 위해 [[명성왕후|왕후]]와 정치적 대립관계에 있던 [[흥선대원군|대원군]]과 조선군 훈련대(교관은 일본인)를 이용하기로 하였다.<ref>이민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948 을미사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
+ | |||
+ | ===[[을미사변]]의 진행과정=== | ||
+ | ====[[을미사변]]의 시작과 [[경복궁]] 숙위병의 전투==== | ||
+ | 10월 8일 새벽 일단의 일본인패들이 [[흥선대원군|대원군]]과 그의 아들 [[이재면]]을 납치하여 [[경복궁]]으로 향했다. 한편 일본인교관은 야간 훈련을 실시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조선군 훈련대를 [[경복궁]]까지 유인하였다. 계획이 개시된 것은 새벽 5시(일본측 자료는 5시 45분으로, 약 한시간 오차). [[경복궁]]담을 넘어간 일본인들이 일본군의 엄호하에 광화문을 열어 제쳤다. 일본군에 이어 일본인들이 호위한 [[흥선대원군|대원군]]의 가마와 훈련대가 밀려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궁궐 시위대병사 8∼10명과 [[홍계훈]](훈련대 연대장)이 희생되었다. 일본군의 습격은 북문으로부터도 있었다. 광화문쪽에서 총성이 울리자 이미 북서쪽의 문(추성문), 북동쪽의 문(춘생문)을 통과한 별도의 일본군이 북쪽의 문(신무문)을 공격해 들어갔다. [[경복궁]]에서는 숙위 중이던 시위대 교관 [[다이(William McEntyre Dye, 茶伊]])와 연대장 [[현흥택]]의 지휘하에 비상 소집된 300-400명의 조선군 시위대가 저항하였으나 무기의 열세로 곧 무너졌다. 이후 [[명성왕후|왕후]]의 거처에서 만행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군은 사방의 출입구를 봉쇄하였다.<ref>이민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948 을미사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
+ | |||
+ | ====궁궐을 점령한 일본인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궁궐을 약탈하다==== | ||
+ | 사복차림의 일본인이 현장을 지휘하였고, 일본군 장교(2명)가 이를 보조하였다. 주한영국영사 [[힐리어|힐리어(Walter C. Hillier)]]는 사건의 현장을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1895.10.11). “건청궁의 앞뒷문을 통해 일본군의 엄호하에 침입한 민간인 복장의 일본인들은 한 무리의(조선군 복장을 한)군인들과 함께 일본군 장교와 사병들이 경비를 서 주었다. 그들은 곧바로 왕과 [[명성왕후|왕후]]의 처소로 돌진하여 몇몇은 왕과 왕태자의 측근들을 붙잡았고, 다른 자들은 [[명성왕후|왕후]]의 침실로 향하였다. 이 때 궁내에 있던 궁내부대신 [[이경직|이경직(李耕稙)]]은 서둘러 [[명성왕후|왕후]]에게 급보를 전하였고, [[명성왕후|왕후]]와 궁녀들이 잠자리에서 뛰쳐나와 숨으려던 순간이었다. 그 때 흉도들이 달려 들어오자 [[이경직]]은 [[명성왕후|왕후]]를 보호하기 위해 두 팔을 벌려 가로막았다. 흉도들 중 하나가 [[명성왕후|왕후]]를 찾아내기 위해 [[명성왕후|왕후]]의 사진을 손에 지니고 있었던 데다, 그의 그러한 행동은 오히려 흉도들에게([[명성왕후|왕후]]를 알아보게 하는) 용이한 단서가 되었다. [[이경직]]은 내려친 칼날에 양팔목을 잘려 중상을 입고 쓰러져 피를 흘리며 죽었다. [[명성왕후|왕후]]는 뜰 아래로 뛰쳐나갔지만 곧 붙잡혀 넘어뜨려졌다. 그 뒤 흉도들은 [[명성왕후|왕후]]의 가슴을 짓밟으며 일본도를 휘둘러 거듭 내려 쳤다. 실수가 없도록 확실히 해치우기 위해 그들은 [[명성왕후|왕후]]와 용모가 비슷한 몇몇 궁녀들까지 함께 살해하였다. 그 때 [[명성왕후|왕후]]의 의녀(女侍醫)가(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가 손수건으로 [[명성왕후|왕후]]의 얼굴을 가려 주었다. 한 둘의 시신이 숲에서 불태워 지고, 나머지는 궁궐밖으로 옮겨가 처리되었다”(『주한영국영사의 보고문』). 상황이 일단락되자 일본인들은 [[명성왕후|왕후]]의 침소까지 약탈하고 유유히 광화문을 빠져나갔다.<ref>이민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948 을미사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
+ | |||
+ | ====[[명성황후]] 시해후 약탈까지 한 일본인 무리들==== | ||
+ | 한편 일본공사관에서 초초하게 사태의 결과를 기다리던 [[미우라]]는 [[조선 고종|고종]]의 부름에 응한 형식으로 입궐하였다(6시경). 그러나 즉시 그는 사태의 은폐공작에 들어갔다. 먼저 [[조선 고종|고종]]을 핍박하여, 당일로 신내각을 조각하게 하였다. 그리고 [[명성왕후|왕후]]가 궁궐을 탈출한 것처럼 꾸며, [[조선 고종|고종]]이 [[명성왕후|왕후]]를 폐한다는 조칙을 내리게 하였다. 그런데 [[조선 고종|고종]]의 서명도 없는 날조된 조칙이었다. 이어 그는 사건을 조선군 훈련대와 순검의 충돌에 의한 것으로 날조하였다. 다음날 이 사건의 ‘범죄자’들인 훈련대를 엄벌할 것과 일본인이 가담하였다는 ‘소문’의 사실여부를 규명해 달라는 위장된 내용의 문서를 외부에 보내, 조선측 스스로가 일본군민의 가담을 부인하는 희한한 공문까지 확보해 두었다. 그러나 사건의 진상은 당일부터 서양외교관들에 의해 폭로되었다. 당시 만행이 왕태자·[[다이]]·[[사바틴|사바틴(다이의 보조역)]]·현흥택·의녀(醫女)·궁녀·궁중하인 등에 의해 각기 다른 위치에서 목격되었고, 열국 외교관들도 이를 간접적으로 접하였기 때문이다.<ref>이민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948 을미사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
+ | |||
+ | ===당시 [[을미사변]]의 만행이 외국에 알려지다=== | ||
+ | ====[[알렌]]의 [[을미사변]] 직후 상황 목격과 일본 정부의 변명==== | ||
+ | [[알렌|알렌(미국공사관 서기)]]이 총소리에 놀라 깬 것은 새벽 5시. 곧 이어 [[이범진]]으로부터 [[조선 고종|고종]]의 화급한 전갈을 받고 러시아공사 [[베베르]]와 함께 입궐하였다. 그들은 궁궐에 도착하여 산만한 복장의 칼찬 일인들이 광화문에서 나오는 것을 목격하였다(7시). 입궐 후 한시간 반 가량을 기다리다가 방문을 밀고 들어갔을 때 [[조선 고종|고종]]과 [[미우라]]가 있었다. 당시 [[미우라]]는 [[조선 고종|고종]]에게 “훈련대와 순검의 충돌을 막아달라는 [[조선 고종|고종]]의 요청으로 일본군을 보내 현장에 도착해 보니 사태는 일단락된 뒤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알렌]] 등이 직간접으로 접한 현장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이들은 일본군·영사경찰·공사관원·낭인배 등이 [[명성왕후|왕후]]시해를 자행하였음과 [[미우라]]가 이들의 사주자임을 간파하였다. 그리고 [[알렌·힐리어|알렌·힐리어(Walter C. Hillier: 영국영사)]]·[[웨베르]] 등 주한외교관들의 보고와 뉴욕헤럴드의 특파원 [[코커릴]] 등에 의해 사건이 각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초 일본정부는 외교와 언론 등을 통해 일본 군민은 사건과 하등 관련이 없으며, [[흥선대원군|대원군]]과 조선[[명성왕후|왕후]]의 ‘중세적’ 정권다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변명하였다. 그러나 열국 여론의 비난을 받은 일본정부는 [[미우라]]가 사건에 연루되었음을 시인하면서 사건의 철저한 조사를 천명하였다. 이어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를 주한 판리공사(辦理公使)로, [[이노우에]]를 왕실문안사라는 명목으로 서울에 파견하여 사태 호도에 나섰다. 아울러 [[미우라]]와 [[스기무라]] 이하 약 50인에게 퇴한명령(10.18)을 내려 이들을 히로시마[廣島] 감옥에 수감하였다. 잠시 국제여론의 비난을 피하고자 한 것이다.<ref>이민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948 을미사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
+ | |||
+ | ====[[춘생문 사건]] 발발과 일본에 역풍을 맞은 각국 정부들==== | ||
+ | 그러나 얼마 뒤 조선에서 돌발한 [[춘생문사건]](11.28)이 일본측에 의해 역이용되었다. [[웨베르]]·[[알렌]] 및 [[이범진]]·[[이완용]] 등 조선의 친미·친로파 인사들이 [[조선 고종|고종]]을 미국공사관으로 피신시키고자 한 사건이다. 그런데 일본정부와 언론은 이 사건에 주한열국외교관들이 관계되었다고 선전하며, 다른 열강들도 조선내정에 개입하기는 마찬가지라는 논조를 펴면서, 그들의 [[을미사변]]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기회로 이용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후 [[을미사변]]에 대한 국제여론의 비판은 잠시뿐, 각국 정부의 반응은 정반대의 기류를 타고 있었다 영·미·러 각국 정부는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자국 외교관들의 행동을 자제토록 지시하였다. [[이토]] 이하 일본정부의 인물 및 각국주재 일본외교관의 다양한 사태무마책이 적지 않게 작용하였다. 따라서 조선의 서양 외교관들은 이 사건에 [[미우라]]가 직접 관계되어 있다는 것까지는 밝혔으나 더 이상의 배후는 추구하지 못하였다.<ref>이민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948 을미사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
+ | |||
+ | ====중국 상해 선교사들이 [[을미사변]]에 대해서 폭로하다==== | ||
+ | 다만 상해에서 서양의 선교사들이 발간한 ‘북화첩보’(北華捷報: The North China Herald)에서는 조선과 일본주재 통신원의 다양한 보고를 토대로 이렇게 보도하였다. “사건의 주모자는 [[이노우에]]이며, [[미우라]]가 조선공사로 임명될 때 이미 그가 [[이노우에]]의 희생양이라는 것이 잘 알려져 있었다. …… 이 사건은 [[미우라]]가 일본을 떠나오기 전에 계획된 것이다.” 결국 사건의 지휘계통은 ‘이토내각(배후)->[[이노우에]](중개역)->[[미우라]](하수역)’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얼마 뒤 일본정부에서는 감옥에 수감된 범죄자들을 ‘증거불충분’이라 하여 전원 무죄 방면하였다(1896.1.20). 범죄자들은 감옥에서조차 일본의 관민으로부터 영웅처럼 대우를 받았고, [[미우라]]가 석방되어 동경에 도착하자 일본천황은 그의 ‘노고’를 치하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북화첩보’에서는 “일본정부는 이 음모를 사전에 알지 못한 것처럼 가장하면서도 희색은 만면 …… 사건과 일본정부의 관계는 독자가 알아서 판단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일본정부와 사건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ref>이민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948 을미사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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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을미사변]]||[[스기무라 후카시]]||A는 B와 관련이 있다||A edm:isRelatedTo B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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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을미사변]]||[[오카모토 류노스케]]||A는 B와 관련이 있다||A edm:isRelatedTo B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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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을미사변]]||[[명성황후]]||A는 B와 관련이 있다||A edm:isRelatedTo B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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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성황후]]||[[베베르]]||A는 B와 관련이 있다||A edm:isRelatedTo B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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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각자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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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갤러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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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일:한글팀_을미사변_01_을미사변_옥호루.jpg | 옥호루 | ||
+ | 파일:한글팀_을미사변_02_을미사변_명성황후_조난지_표석.jpg | 명성황후 조난지 표석 | ||
+ | 파일:한글팀_을미사변_03_을미사변_장충단비.jpg | 장충단비 | ||
+ | </gallery> | ||
+ | |||
+ | =='''주석'''== | ||
+ | <references/> | ||
+ | |||
+ | =='''참고문헌'''== | ||
+ | ===더 읽을거리=== | ||
+ | *논문 | ||
+ | **김영수, 「세레진 사바찐의 하루(을미사변에 관한 기억과 선택)」, 『역사비평』, Vol.-, No.91, 역사문제연구소, 2010, 329-362쪽. | ||
+ | **김종현, 「근대한러관계연구: 아관파천과 한러관계의 진전 ; 을미사변 이후 아관파천까지 베베르의 활동」, 『史林』, Vol.35, No.-, 수선사학회, 2010, 20-58쪽. | ||
+ | **신명호, 「을미사변 후 고종의 國母復讎와 君主專制論」, 『동북아 문화연구』, Vol.19, No.-, 동북아시아문학학회, 2009, 5-22쪽. | ||
+ | **김영수, 「을미사변, 그 하루의 기록 (대원군의 침묵과 명성황후암살의 배후)」, 『梨花史學硏究』, Vol.39, No.-, 梨花女子大學校 史學硏究所, 2009, 193-225쪽. | ||
+ | |||
+ | *웹사이트 내 특정 페이지 | ||
+ | **이민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948 을미사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 | |||
+ | [[분류:한글고문서]] | ||
+ | [[분류:사건]] |
2017년 11월 24일 (금) 23:59 기준 최신판
을미사변(乙未事變) | |
대표명칭 | 을미사변 |
---|---|
한자표기 | 乙未事變 |
이칭 | 명성황후시해사건 |
유형 | 사건 |
시대 | 조선시대 |
날짜 |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
관련인물 | 명성황후, 미우라, 조선 고종 |
관련장소 | 경복궁 |
관련유물유적 | 순명효황후 한글편지, 책황귀비홀기 |
목차
정의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새벽 일본의 공권력 집단이 서울에서 자행한 왕비 살해사건이다.
내용
을미사변이 일어나게 된 원인
청•러•일의 계산
- 일본은 메이지유신이래 조선의 지배를 대외침략정책의 제1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목표에 결정적인 걸림돌이 있었다. 바로 청국과 러시아였다. 청국은 자국의 수도 북경의 안전을 위해 조선이 타국에 지배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시베리아철도의 건설을 통해 동아시아로 진출을 모색하던 상황에서 만주의 안정과 한반도의 영토보전이 필요하다는 입장 하에 조선에 대한 일본의 세력 확대를 견제하였기 때문이다.[1]
일본의 도발
- 일본제국은 1890년대 초중반 청국과의 전쟁준비를 완료하였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조선에서 발생한 동학농민봉기(1894)는 일본이 고대하던 전쟁 도발의 적기로 포착되었다. 농민봉기 이후 일본제국은 청나라를 기습 공격하여 청일전쟁을 승리로 마무리 지었다. 1895년4월 맺은 시모노세키조약을 통해 ‘청국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확인한다(제1조)’하였고, 요동반도의 할양(제2조) 등을 명시하였다. 만주 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함과 동시에 일본의 조선 지배를 기정사실화 한 것이었다. 나아가 일본의 모든 전쟁비용을 상회하는 2억 냥의 배상금을 부과시켜 청국의 재정을 곤두박질치게 하였다. 이를 이용하여 일본은 러일전쟁에 대비한 재무장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2]
러시아와 명성황후
- 그러나 러시아는 즉각 일본의 행동을 견제하려는 쪽으로 방침을 굳히고, 1895년 4월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삼국간섭(三國干涉)을 단행하였다. 러시아는 일본군을 만주지역에서 축출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서 조선에서도 반일적인 움직임이 표면화되면서 일본을 궁지로 몰아 넣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러한 분위기를 배후에서 유도한 것은 주한러시아공사인 베베르(Karl I. Wober: 韋貝)였지만, 조선 측의 핵심 인물은 왕후 민씨였다. 베베르는 일본의 조선 지배를 견제하려는 것이었고, 왕후는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 압제로부터 탈피하여 고종의 권력을 복구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3]
러시아 대신 황후를 치다
- 일본정부의 당면 과제는 조선 문제의 처리였고, 그것은 러시아와 상대할 문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은 청일전쟁 직후 전력을 소모한 상태에서 러시아를 상대할 준비가 갖춰져 있지 않았다. 결국 러시아를 피하면서 조선 문제를 처리하는 손쉬운 방법은 직접 조선쪽을 상대하여 러시아와의 연결고리를 끊는 것이었다. 일본이 생각해낸 방법은 조선에서 반일세력의 핵심이자 러시아와의 연결고리인 왕후를 제거하는 것이었다.[4]
을미년 시월 새벽에 일어난 참변
10월 8일 새벽 일단의 일본인패들이 대원군과 그의 아들 이재면을 납치하여 경복궁으로 향했다. 한편 일본인교관은 야간 훈련을 실시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일본군 훈련대를 경복궁까지 유인하였다. 경복궁담을 넘어간 일본인들은 일본군의 엄호 하에 광화문을 열어젖혔다. 일본군에 이어 일본인들이 호위한 대원군의 가마와 훈련대가 밀려들어갔다. 일본군의 습격은 북문으로부터도 있었다. 광화문 쪽에서 총성이 울리자 이미 북서쪽(추성문), 북동쪽(춘생문)을 통과한 별도의 일본군이 북쪽(신무문)을 공격해 들어갔다. 경복궁에서는 숙위 중이던 시위대 교관 다이(William McEntyre Dye, 茶伊)와 연대장 현흥택의 지휘 하에 비상 소집된 300-400명의 조선군 시위대가 저항하였으나 무기가 열세하여 곧 무너졌다. 왕후의 거처에서 만행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군은 사방의 출입구를 봉쇄하였다. 이들은 참혹하게 난자하여 살해한 시신을 근처의 수풀 속으로 옮겨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석유를 부어 불태워 버렸다.[5]
지식 관계망
- 순명효황후 한글편지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을미사변 | 미우라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을미사변 | 경복궁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을미사변 | 흥선대원군 이하응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을미사변 | 고바야카와 히데오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을미사변 | 기꾸치 겐죠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청일전쟁 | 동학농민운동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을미사변 | 스기무라 후카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을미사변 | 오카모토 류노스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을미사변 | 구스노세 사치히코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을미사변 | 이경직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을미사변 | 다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을미사변 | 명성황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명성황후 | 베베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흥선대원군 이하응 | 이재면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흥선대원군 이하응 | 조선 고종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조선 고종 | 명성황후 | A는 B의 남편이다 | A ekc:hasWife B |
을미사변 | 이범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삼국간섭 | 을미사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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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867년 | 일본에서 명치유신이 일어났다 |
1894년 | 조선에서 동학농민 운동이 일어났다 |
1894년-1895년 |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
1895년 | 경복궁에서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
1895년 4월 23일 | 청일전쟁 이후 삼국간섭이 일어났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7.578019 | 126.976862 | 을미사변은 경복궁에서 일어났다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이민원, "을미사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5월 19일. - ↑ 이민원, "을미사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5월 19일. - ↑ 이민원, "을미사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5월 19일. - ↑ 이민원, "을미사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5월 19일. - ↑ 이민원, "을미사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5월 19일.
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 논문
- 김영수, 「세레진 사바찐의 하루(을미사변에 관한 기억과 선택)」, 『역사비평』, Vol.-, No.91, 역사문제연구소, 2010, 329-362쪽.
- 김종현, 「근대한러관계연구: 아관파천과 한러관계의 진전 ; 을미사변 이후 아관파천까지 베베르의 활동」, 『史林』, Vol.35, No.-, 수선사학회, 2010, 20-58쪽.
- 신명호, 「을미사변 후 고종의 國母復讎와 君主專制論」, 『동북아 문화연구』, Vol.19, No.-, 동북아시아문학학회, 2009, 5-22쪽.
- 김영수, 「을미사변, 그 하루의 기록 (대원군의 침묵과 명성황후암살의 배후)」, 『梨花史學硏究』, Vol.39, No.-, 梨花女子大學校 史學硏究所, 2009, 193-225쪽.
- 웹사이트 내 특정 페이지
- 이민원, "을미사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민원, "을미사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