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영 백서사건"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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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01년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 중국인 [[주문모|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비롯하여 많은 교회지도자들이 체포되고 [[황사영]]에 | + | 1801년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 중국인 [[주문모|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비롯하여 많은 교회지도자들이 체포되고 [[황사영]]에 대해서도 체포령이 내려졌다. [[황사영]]은 충청도 제천의 토기 굽는 마을인 배론[舟論]으로 피신하여 토굴에 숨어 지내면서 자기가 겪은 박해상을 기록해 두었다. 이 때 박해를 피하여 배론으로 온 [[황심|황심(黃沁)]]을 만나 조선교회를 구출할 방도를 상의한 끝에, 박해의 경과와 재건 계획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기로 하였다. [[황사영]]은 길이 62㎝, 너비 38㎝의 흰 비단에다 한 줄에 110자씩 121행, 도합 1만 3311자를 검은 먹글씨로 깨알같이 써 내려갔다.[[옥천희|옥천희(玉千禧)]]가 이 백서를 가지고 10월에 떠나는 동지사(冬至使) 일행을 따라 중국까지 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9월 20일(양력 10월27일) [[옥천희]]가 먼저 잡히고, 이어 [[황심]]이 9월 26일에 체포되어 [[황사영백서|백서]]는 사전에 압수되고, [[황사영]] 자신도 9월 29일 발각되었다.<ref>최석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5170 황사영백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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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 백서사건]]에 대한 조선 조정의 반응=== | ===[[황사영 백서사건]]에 대한 조선 조정의 반응=== | ||
− | 이러한 내용에 접한 조정에서는 아연실색하여 관련자들을 즉각 처형함과 동시에 [[천주교인]]들에 대한 탄압을 한층 더 강화하였다. 그리고 | + | 이러한 내용에 접한 조정에서는 아연실색하여 관련자들을 즉각 처형함과 동시에 [[천주교인]]들에 대한 탄압을 한층 더 강화하였다. 그리고 그 해 10월에 파견된 동지사에게 진주사(陳奏使)를 겸하게 하여 [[신유사옥]]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토사주문(討邪奏文)을 보냈다. 또 백서의 사본이 중국에 전달되어 [[주문모]] 신부의 처형사실이 알려질 것을 염려하여 내용을 16행 923자로 대폭 축소하여 청나라 예부(禮部)에 제출하게 하였다. 이 축소된 [[황사영백서|백서]]를 이른바 ‘[[황사영 가백서|가백서(假帛書)]]’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중국의 감호책이나 종주권 행사 등에 관한 내용은 빼고, 서양 선박과 군대 파견을 요청한 사실을 적어 박해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삼았다.<ref>최석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5170 황사영백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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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 *논문 | ||
− | **안수강, 「황사영(黃嗣永)의 “백서”(帛書) 고찰」, 『역사신학 논총』, Vol 24, 2012, 160-197쪽. | + | **안수강, 「황사영(黃嗣永)의 “백서”(帛書) 고찰」, 『역사신학 논총』, Vol.24, No.-,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2012, 160-197쪽. |
− | **김태영, 「황사영의 의식 전환과 천주교적 세계관( 백서 작성 배경과 관련하여 )」, 『지역과 역사』, Vol 25, 2009, 187-235쪽. | + | **김태영, 「황사영의 의식 전환과 천주교적 세계관( 백서 작성 배경과 관련하여 )」, 『지역과 역사』, Vol.-, No.25, 부경역사연구소, 2009, 187-235쪽. |
− | + | *웹사이트 내 특정 페이지 | |
− | 웹사이트 | + | **최석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5170 황사영백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 *최석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5170 황사영백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분류:한글고문서]] | [[분류:한글고문서]] | ||
[[분류:사건]] | [[분류: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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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4일 (금) 23:55 기준 최신판
황사영 백서(黃嗣永帛書) | |
대표명칭 | 황사영 백서 |
---|---|
한자표기 | 黃嗣永帛書 |
유형 | 사건 |
시대 | 조선시대 |
날짜 | 1801년 |
관련인물 | 황사영 |
관련단체 | 기독교 |
목차
정의
한국가톨릭교회 초창기 지도자 중 한 사람인 황사영이 1801년(조선 순조 1) 신유박해의 전말과 그 대응책을 흰 비단에 적어 중국 북경의 구베아(Gouvea,A. de) 주교에게 보내고자 한 밀서이다.
내용
황사영 백서사건이 일어난 배경
1801년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비롯하여 많은 교회지도자들이 체포되고 황사영에 대해서도 체포령이 내려졌다. 황사영은 충청도 제천의 토기 굽는 마을인 배론[舟論]으로 피신하여 토굴에 숨어 지내면서 자기가 겪은 박해상을 기록해 두었다. 이 때 박해를 피하여 배론으로 온 황심(黃沁)을 만나 조선교회를 구출할 방도를 상의한 끝에, 박해의 경과와 재건 계획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기로 하였다. 황사영은 길이 62㎝, 너비 38㎝의 흰 비단에다 한 줄에 110자씩 121행, 도합 1만 3311자를 검은 먹글씨로 깨알같이 써 내려갔다.옥천희(玉千禧)가 이 백서를 가지고 10월에 떠나는 동지사(冬至使) 일행을 따라 중국까지 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9월 20일(양력 10월27일) 옥천희가 먼저 잡히고, 이어 황심이 9월 26일에 체포되어 백서는 사전에 압수되고, 황사영 자신도 9월 29일 발각되었다.[1]
황사영백서의 내용
백서의 내용은 1785년(정조 9) 이후의 교회의 사정과 박해의 발생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한 다음, 신유박해의 상세한 전개과정과 순교자들의 간단한 약전(略傳)을 적었다. 그리고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자수한 후 죽음까지의 과정을 증언하였다. 끝으로, 폐허가 된 조선교회를 재건하고 신앙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즉, 종주국인 청나라 황제에게 청하여 조선도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것을 요청하였다. 혹은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하거나, 서양의 배 수백 척과 군대 5만∼6만 명을 조선에 보내어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도록 조정을 굴복하게 하는 방안 등을 제시하였다.[2]
황사영 백서사건에 대한 조선 조정의 반응
이러한 내용에 접한 조정에서는 아연실색하여 관련자들을 즉각 처형함과 동시에 천주교인들에 대한 탄압을 한층 더 강화하였다. 그리고 그 해 10월에 파견된 동지사에게 진주사(陳奏使)를 겸하게 하여 신유사옥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토사주문(討邪奏文)을 보냈다. 또 백서의 사본이 중국에 전달되어 주문모 신부의 처형사실이 알려질 것을 염려하여 내용을 16행 923자로 대폭 축소하여 청나라 예부(禮部)에 제출하게 하였다. 이 축소된 백서를 이른바 ‘가백서(假帛書)’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중국의 감호책이나 종주권 행사 등에 관한 내용은 빼고, 서양 선박과 군대 파견을 요청한 사실을 적어 박해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삼았다.[3]
백서의 원본 소장 경로와 현재 소장위치
황사영백서의 원본은 1801년에 압수된 이후 줄곧 의금부에 보관되어 오다가 1894년 갑오경장 후, 옛 문서를 파기할 때 우연히 당시의 교구장이던 뮈텔(Mutel,G.C.M.) 주교가 입수하여, 1925년 한국순교복자 79위의 시복식 때 로마교황에게 전달되었다. 현재 로마교황청 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4]
연계 자원 보러 가기 |
• 윤음을 통해 보는 조선 임금들의 애민정신 |
• 유중외대소민인등척사윤음 |
지식 관계망
- 윤음을 통해 보는 조선 임금들의 애민정신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황사영 백서사건 | 황사영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황사영백서 | 황사영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황사영 백서사건 | 구베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황사영 백서사건 | 신유사옥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황사영 백서사건 | 천주교인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천주교인 | 황사영 |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 A foaf:member B |
천주교인 | 구베아 |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 A foaf:member B |
천주교인 | 주문모 |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 A foaf:member B |
천주교인 | 황심 |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 A foaf:member B |
천주교인 | 옥천희 |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 A foaf:member B |
황사영 백서사건 | 황사영백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황사영 백서사건 | 황사영 가백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황사영백서 | 의금부 | A는 B에 있었다 | A ekc:formerLocation B |
갑오경장 | 황사영백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갑오경장 | 뮈텔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황사영백서 | 뮈텔 | A는 B에 소장되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황사영백서 | 로마교황청 민속박물관 | A는 B에 소장되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801년 | 황서영 백서사건이 일어났다 |
1801년 | 신유사옥이 일어났다 |
1801년 | 황사영백서는 의금부에 있었다 |
1839년 | 유중외대소민인등척사윤음이 반포되었다 |
1894년 | 갑오경장이 일어났다 |
1925년 | 로마교황청 민속박물관에 황사영백서가 소장되었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7.57048 | 126.982324 | 1801년 황사영백서는 의금부에 있었다 |
41.906487 | 12.453639 | 바티칸 박물관에 황사영백서가 소장되어있다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최석우, "황사영백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최석우, "황사영백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최석우, "황사영백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최석우, "황사영백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안수강, 「황사영(黃嗣永)의 “백서”(帛書) 고찰」, 『역사신학 논총』, Vol.24, No.-,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2012, 160-197쪽.
- 김태영, 「황사영의 의식 전환과 천주교적 세계관( 백서 작성 배경과 관련하여 )」, 『지역과 역사』, Vol.-, No.25, 부경역사연구소, 2009, 187-235쪽.
- 웹사이트 내 특정 페이지
- 최석우, "황사영백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최석우, "황사영백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