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봉 안경"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관계정보) |
(→내용) |
||
(사용자 3명의 중간 판 9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 |||
21번째 줄: | 21번째 줄: | ||
}} | }} | ||
=='''정의'''== | =='''정의'''== | ||
− | 학봉 [[김성일]]의 안경과 | + | 학봉 [[김성일]]의 안경과 안경집이다. |
=='''내용'''== | =='''내용'''== | ||
− | [[김성일|김성일(金誠一, 1538-1593)]] | + | [[김성일|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 사용하던 안경과 안경집으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안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대모(거북이 등껍질)로 안경테를 만들었고, 경첩을 가운데에 달아 반으로 접었다 폈다 할 수 있었다. 안경다리는 없으며, 대신 안경테에 구멍을 내어 끈을 달아 귀에 걸도록 되어 있다. 안경을 반으로 접어 안경집에 넣어 보관했으며, 안경집은 옆으로 비껴서 열 수 있었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시권(試券)』, 2015, 163쪽.</ref>안경집은 피나무로 제작되었으며 겉면은 옻칠을 하고 놋쇠로된 배꼽장식을 달았다. 이는 우리나라의 공예품 제작방식과 동일하다. 렌즈는 수정을 가공하여 만든 것이다. 이규경의 『[[오주서종박물고변]]』에서 수정을 이용하여 안경을 만든다고 하고 있는 것으로<ref>윤을요, 「조선시대 안경과 안경집 디자인 연구」, 『한국패션디자인학회지』14, 한국패션디자인학회, 2014, 123쪽.</ref> 을 보아 김성일의 안경과 안경집은 조선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안경을 통해 임진왜란 전부터 우리나라에서 안경을 제작하고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
<!-- | <!-- | ||
===조선시대 안경의 의미=== | ===조선시대 안경의 의미=== | ||
41번째 줄: | 41번째 줄: | ||
신하들은 왕의 앞에서는 허락없이 안경을 착용할 수 없었고 민간에서도 젊은사람은 나이든 사람 앞에서 안경을 착용할 수 없었다.<ref>김보람, 「한국의 안경 문화와 안경 디자인사」, 국민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6, 47쪽.</ref>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져온다. [[김택영]]의 역사서 『[[한사경]]』에 나오는 조병구의 일화이다. [[헌종]]의 외삼촌인 [[조병구|조병구(趙秉龜, 1801-1845)]]는 안경을 쓴 채로 헌종과 마주쳤고 헌종에게 크게 혼이 났다. 그 이후 조병구는 여동생인 [[신정왕후]]를 만나러 간 자리에서 안경을 쓴 채로 헌종과 마주쳤다. 결국 그는 극도의 불안감과 압박감으로 인해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이렇게 당시에 안경은 권위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자신보다 지위나 연령이 높은 사람 앞에서 안경을 쓰는 것이 엄격히 금지됬다. 특히 신하가 왕 앞에서 안경을 쓰는 것은 대역죄였다.<ref>"[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4614658351105940019 '헌종의 남자' 조병구, 안경 하나로 목숨 잃게 된 사연은? (서프라이즈)]", 『티브이데일리』, 2016년 4월 24일.</ref> 그러나 안경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19세기에는 하층민까지 안경을 쓸 정도로 대중화되었다. 처음에는 안경쓰는 것을 부끄러이 여겨 도포자락에 넣어 다녔지만, 점차 안경이 유행하면서 안경집을 허리춤에 매달아 다니게 되었다. 이에 맞춰 안경집도 자수, 상어가죽 등으로 고급스럽고 화려하게 변화해갔다.<ref>김보람, 「한국의 안경 문화와 안경 디자인사」, 국민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6, 49-50쪽.</ref> | 신하들은 왕의 앞에서는 허락없이 안경을 착용할 수 없었고 민간에서도 젊은사람은 나이든 사람 앞에서 안경을 착용할 수 없었다.<ref>김보람, 「한국의 안경 문화와 안경 디자인사」, 국민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6, 47쪽.</ref>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져온다. [[김택영]]의 역사서 『[[한사경]]』에 나오는 조병구의 일화이다. [[헌종]]의 외삼촌인 [[조병구|조병구(趙秉龜, 1801-1845)]]는 안경을 쓴 채로 헌종과 마주쳤고 헌종에게 크게 혼이 났다. 그 이후 조병구는 여동생인 [[신정왕후]]를 만나러 간 자리에서 안경을 쓴 채로 헌종과 마주쳤다. 결국 그는 극도의 불안감과 압박감으로 인해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이렇게 당시에 안경은 권위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자신보다 지위나 연령이 높은 사람 앞에서 안경을 쓰는 것이 엄격히 금지됬다. 특히 신하가 왕 앞에서 안경을 쓰는 것은 대역죄였다.<ref>"[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4614658351105940019 '헌종의 남자' 조병구, 안경 하나로 목숨 잃게 된 사연은? (서프라이즈)]", 『티브이데일리』, 2016년 4월 24일.</ref> 그러나 안경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19세기에는 하층민까지 안경을 쓸 정도로 대중화되었다. 처음에는 안경쓰는 것을 부끄러이 여겨 도포자락에 넣어 다녔지만, 점차 안경이 유행하면서 안경집을 허리춤에 매달아 다니게 되었다. 이에 맞춰 안경집도 자수, 상어가죽 등으로 고급스럽고 화려하게 변화해갔다.<ref>김보람, 「한국의 안경 문화와 안경 디자인사」, 국민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6, 49-50쪽.</ref> | ||
--> | --> | ||
− | |||
{{연계자원정보 | {{연계자원정보 | ||
|연계자원1=[[학봉 김성일 종가 고문헌을 통해 살펴보는 조선 사대부의 삶]] | |연계자원1=[[학봉 김성일 종가 고문헌을 통해 살펴보는 조선 사대부의 삶]] | ||
49번째 줄: | 48번째 줄: | ||
=='''지식 관계망'''== | =='''지식 관계망'''== | ||
+ | *학봉 김성일가의 한글 고문서 지식관계망 | ||
+ | <html> | ||
+ | <scrip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script> | ||
+ | <input type="button" value="Graph" onclick="reload();"> | ||
+ | <iframe width="100%" height="670px" src="http://dh.aks.ac.kr/Encyves/Graph/A201/A201.htm"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 ||
+ | </html> | ||
===관계정보=== | ===관계정보=== | ||
− | {|class="wikitable sortable" | + | {|class="wikitable sortable" style="background:white; width:100%; text-align:center;" |
!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 | |- | ||
64번째 줄: | 69번째 줄: | ||
!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 | |- | ||
− | | | + | | [[학봉 안경]] || 안경 || A는 B에 포함된다 || |
|- | |- | ||
− | | [[김성일]] || | + | | [[김성일]] || [[학봉 안경]] || A는 B를 사용하였다 || |
|- | |- | ||
− | | | + | | [[학봉 안경]] || [[의성김씨 학봉종택]] || A는 B에 소장되었다 || |
|- | |- | ||
| [[이시원]] || 송서상서경조이상사부연 || A는 B를 저술하였다 || | | [[이시원]] || 송서상서경조이상사부연 || A는 B를 저술하였다 || | ||
84번째 줄: | 89번째 줄: | ||
|} | |} | ||
--> | --> | ||
− | |||
===시간정보=== | ===시간정보=== | ||
{|class="wikitable" style="background:white; width:100%; | {|class="wikitable" style="background:white; width:100%; | ||
!style="width:20%px"|시간정보!!style="width:80%px"|내용 | !style="width:20%px"|시간정보!!style="width:80%px"|내용 | ||
|- | |- | ||
− | | 16세기 후반 || [[김성일]]이 ''' | + | | 16세기 후반 || [[김성일]]이 '''[[학봉 안경]]'''을 사용하였다. |
|- | |- | ||
|} | |} | ||
97번째 줄: | 101번째 줄: | ||
!style="width:5%px"|위도!!style="width:5%px"|경도!!style="width:90%px"|내용 | !style="width:5%px"|위도!!style="width:5%px"|경도!!style="width:90%px"|내용 | ||
|- | |- | ||
− | |36.609771 || 128.669643 || [[의성김씨 학봉종택]]에 ''' | + | |36.609771 || 128.669643 || [[의성김씨 학봉종택]]에 '''[[학봉 안경]]'''이 소장되어 있다 |
|- | |- | ||
|} | |} | ||
118번째 줄: | 122번째 줄: | ||
[[분류:한글고문서]] | [[분류:한글고문서]] | ||
[[분류:문화유산]] | [[분류:문화유산]] | ||
− |
2017년 11월 24일 (금) 22:43 기준 최신판
학봉 안경 (鶴峰 眼鏡) |
|
대표명칭 | 학봉 안경 |
---|---|
한자표기 | 鶴峰 眼鏡 |
이칭 | 김성일 안경 |
유형 | 장신구 |
시대 | 16세기 후반 |
소장처 | 의성김씨 학봉종택 |
수량 | 1개 |
관련인물 | 김성일 |
관련단체 | 의성 김씨 |
관련유물유적 | 의성김씨 학봉종택 |
정의
학봉 김성일의 안경과 안경집이다.
내용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 사용하던 안경과 안경집으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안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대모(거북이 등껍질)로 안경테를 만들었고, 경첩을 가운데에 달아 반으로 접었다 폈다 할 수 있었다. 안경다리는 없으며, 대신 안경테에 구멍을 내어 끈을 달아 귀에 걸도록 되어 있다. 안경을 반으로 접어 안경집에 넣어 보관했으며, 안경집은 옆으로 비껴서 열 수 있었다.[1]안경집은 피나무로 제작되었으며 겉면은 옻칠을 하고 놋쇠로된 배꼽장식을 달았다. 이는 우리나라의 공예품 제작방식과 동일하다. 렌즈는 수정을 가공하여 만든 것이다. 이규경의 『오주서종박물고변』에서 수정을 이용하여 안경을 만든다고 하고 있는 것으로[2] 을 보아 김성일의 안경과 안경집은 조선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안경을 통해 임진왜란 전부터 우리나라에서 안경을 제작하고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연계 자원 보러 가기 |
• 학봉 김성일 종가 고문헌을 통해 살펴보는 조선 사대부의 삶 |
지식 관계망
- 학봉 김성일가의 한글 고문서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학봉 안경 | 안경 | A의 유형은 B이다 | A dcterms:type B |
김성일 | 학봉 안경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학봉 안경 | 의성김씨 학봉종택 | A는 B에 소장되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6세기 후반 | 김성일이 학봉 안경을 사용하였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6.609771 | 128.669643 | 의성김씨 학봉종택에 학봉 안경이 소장되어 있다 |
시각자료
영상
- 역사채널e : 두 개의 눈(게시일:2013.01.04.)
주석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시권(試券)』, 2015, 163쪽.
- ↑ 윤을요, 「조선시대 안경과 안경집 디자인 연구」, 『한국패션디자인학회지』14, 한국패션디자인학회, 2014, 123쪽.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단행본
- 금복현, 『옛 안경과 안경집』, 대원사,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