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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희랑은 [[신라 헌강왕]] 때 [[합천 해인사|해인사(海印寺)]]에서 [[최치원|최치원(崔致遠)]]과 시문으로 사귀었고, 『[[화엄경|화엄경(華嚴經)]]』에 정통했다.<ref>두산백과</ref> | + | 희랑은 [[신라 헌강왕]] 때 [[합천 해인사|해인사(海印寺)]]에서 [[최치원|최치원(崔致遠)]]과 시문으로 사귀었고, 『[[화엄경|화엄경(華嚴經)]]』에 정통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56551&cid=40942&categoryId=33380 희랑]",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희랑은 고려 [[고려 태조|태조 왕건(王建)]]의 복전(福田 : 歸依를 받았다는 뜻)이 되었고, [[관혜]]는 후백제 [[견훤|견훤(甄萱)]]의 복전이 되었다. [[관혜]]와 그 문도들은 남악 [[구례 화엄사|화엄사(華嚴寺)]]를 근거로 활동하였으며, 희랑과 그 문도들은 북악 [[영주 부석사|부석사(浮石寺)]]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ref>정병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6086 희랑]",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희랑은 고려 [[고려 태조|태조 왕건(王建)]]의 복전(福田 : 歸依를 받았다는 뜻)이 되었고, [[관혜]]는 후백제 [[견훤|견훤(甄萱)]]의 복전이 되었다. [[관혜]]와 그 문도들은 남악 [[구례 화엄사|화엄사(華嚴寺)]]를 근거로 활동하였으며, 희랑과 그 문도들은 북악 [[영주 부석사|부석사(浮石寺)]]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ref>정병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6086 희랑]",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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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신라 말기에 이르러 화엄학은 [[영주 부석사|부석사]]와 [[구례 화엄사|화엄사]]의 두 파로 나누어졌으며, 서로 정통임을 주장하는 폐해가 노골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합천 해인사|해인사]]의 희랑대(希朗臺)는 희랑이 머무르면서 수도하던 곳이라고 전해진다.<ref>정병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6086 희랑]",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즉, 신라 말기에 이르러 화엄학은 [[영주 부석사|부석사]]와 [[구례 화엄사|화엄사]]의 두 파로 나누어졌으며, 서로 정통임을 주장하는 폐해가 노골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합천 해인사|해인사]]의 희랑대(希朗臺)는 희랑이 머무르면서 수도하던 곳이라고 전해진다.<ref>정병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6086 희랑]",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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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4일 (금) 18:17 기준 최신판
희랑(希朗) | |
대표명칭 | 희랑 |
---|---|
한자 | 希朗 |
정의
신라 말·고려 초의 승려.
내용
희랑은 신라 헌강왕 때 해인사(海印寺)에서 최치원(崔致遠)과 시문으로 사귀었고, 『화엄경(華嚴經)』에 정통했다.[1] 희랑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복전(福田 : 歸依를 받았다는 뜻)이 되었고, 관혜는 후백제 견훤(甄萱)의 복전이 되었다. 관혜와 그 문도들은 남악 화엄사(華嚴寺)를 근거로 활동하였으며, 희랑과 그 문도들은 북악 부석사(浮石寺)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2]
두 파의 쟁점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고, 다만 그 분파가 매우 심각하였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고려 때 균여(均如)는 그 조화를 모색한 인물이었다. 『균여전』에는 “이 두 사람은 신심(信心)을 받아 향화(香火)를 올리며 서원(誓願)을 맺었으나 서원이 이미 달라졌으니 어찌 주장이 같을 수 있으랴! 문도들에게 내려가면서 점차 물과 불처럼 되었다.[3]
즉, 신라 말기에 이르러 화엄학은 부석사와 화엄사의 두 파로 나누어졌으며, 서로 정통임을 주장하는 폐해가 노골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해인사의 희랑대(希朗臺)는 희랑이 머무르면서 수도하던 곳이라고 전해진다.[4]
지식 관계망
- 합천 해인사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희랑 | 고려 태조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희랑 | 영주 부석사 | A는 B에서 수행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희랑 | 화엄경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희랑 | 균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희랑 | 관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희랑 |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 | A는 B를 묘사하였다 | A ekc:depicts B |
주석
- ↑ "희랑",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정병조, "희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정병조, "희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정병조, "희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