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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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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궁중의 경서(經書)·사적(史籍)의 관리와 문한(文翰)의 처리 및 왕의 각종 자문에 응하는 일을 관장하던 관서. <ref> 최승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4081 홍문관(弘文館)]",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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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궁중의 경서(經書)·사적(史籍)의 관리와 문한(文翰)의 처리 및 왕의 각종 자문에 응하는 일을 관장하던 관서이다. <ref> 최승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4081 홍문관(弘文館)]",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내용==
 
==내용==
 
===조선시대 이전, 홍문관의 연원===
 
===조선시대 이전, 홍문관의 연원===
신라시대에도 [[상문사|상문사(詳文師)]]·[[통문박사|통문박사(通文博士)]] 또는 [[서서원]]이 있었고, 고구려와 백제에도 박사의 제도가 있어 학술적인 관부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홍문관]]의 연원은 중국 당나라에서 비롯되었다. 626년에 당나라에서는 [[수문관|수문관(修文館)]]을 개칭해 홍문관이라 했고, [[학사|학사(學士)]]와 [[직학사|직학사(直學士)]]를 두었다. 직무는 도적(圖籍)을 수장(收藏), 정리, 교정하고 생도를 교육하며 조정의 제도와 의례에 관한 논의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995년 [[숭문관|숭문관(崇文館)]]을 개칭해 [[홍문관]]이라 했고 학사를 두었다. 1298년에는 [[학사]]와 [[직학사]]를 두었다. 직무는 시종(侍從)·시강(侍講)으로서, 문신 중 재학(才學)이 있는 자로서 겸하도록 하였다.<ref> 최승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4081 홍문관(弘文館)]",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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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에도 [[상문사|상문사(詳文師)]]·[[통문박사|통문박사(通文博士)]] 또는 [[서서원]]이 있었고, 고구려와 백제에도 박사의 제도가 있어 학술적인 관부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홍문관]]의 연원은 중국 당나라에서 비롯되었다. 626년에 당나라에서는 [[수문관|수문관(修文館)]]을 개칭해 홍문관이라 했고, [[학사|학사(學士)]]와 [[직학사|직학사(直學士)]]를 두었다. 직무는 도적(圖籍)을 수장(收藏), 정리, 교정하고 생도를 교육하며 조정의 제도와 의례에 관한 논의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995년 [[숭문관|숭문관(崇文館)]]을 개칭해 [[홍문관]]이라 했고 학사를 두었다. 1298년에는 [[학사]]와 [[직학사]]를 두었다. 직무는 시종(侍從)·시강(侍講)으로서, 문신 중 재학(才學)이 있는 자로서 겸하도록 하였다.<ref> 최승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4081 홍문관(弘文館)]",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조선시대 홍문관의 위상===
 
===조선시대 홍문관의 위상===
조선시대에는 학술적인 관부이자, [[사헌부]]·[[사간원]]과 더불어 삼사(三司)라고 하였다.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홍문관직은 청요직(淸要職)의 상징이었으므로 홍문관원이 되면 출세가 보장되었다. 조선시대의 정승·판서로서, 홍문관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후 1463년에 [[양성지|양성지(梁誠之)]]의 건의에 따라 [[장서각|장서각(藏書閣)]]을 [[홍문관]]이라 했는데, 이때의 홍문관은 장서기관(藏書機關)이었을 뿐이다. 1478년에야 비로소 학술·언론기관으로서의 [[홍문관]]이 성립하였다. <ref> 최승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4081 홍문관(弘文館)]",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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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학술적인 관부이자, [[사헌부]]·[[사간원]]과 더불어 삼사(三司)라고 하였다.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홍문관직은 청요직(淸要職)의 상징이었으므로 홍문관원이 되면 출세가 보장되었다. 조선시대의 정승·판서로서, 홍문관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1463년에 [[양성지|양성지(梁誠之)]]의 건의에 따라 [[장서각|장서각(藏書閣)]]을 [[홍문관]]이라 했는데, 이때의 홍문관은 장서기관(藏書機關)이었을 뿐이다. 1478년에야 비로소 학술·언론기관으로서의 [[홍문관]]이 성립하였다. 성종 이후 [[홍문관]]은 학술적인 관부이자, [[사헌부]]·[[사간원]]과 더불어 삼사(三司)로 꼽혔으며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홍문관직은 [[청요직|청요직(淸要職)]]의 상징이었으므로 홍문관원이 되면 출세가 보장되었다. 조선시대의 정승·판서로서 홍문관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ref> 최승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4081 홍문관(弘文館)]",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조선시대 홍문관의 잦은 명칭 변경과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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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잦은 명칭 변경과 과정===
세조가 [[집현전]]을 혁파한 뒤, [[집현전]]의 기능은 부분적으로 [[예문관]]에 의해 계속되었다. 1470년에 옛 [[집현전]] 제도에 의해 15인의 전임관(專任官)을 [[예문관]]에 더 둠으로써 [[예문관]]은 구 집현전의 기능을 겸했다. 1478년 2월에는 직제도 [[집현전]]과 [[예문관]]의 복합체가 되었다. 이에 따라 [[예문관]] 분관(分館)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해 3월에 구 [[집현전]]의 직제를 [[예문관]]에서 분리해 당시 유명무실한 기관이던 [[홍문관]]에 이양함으로써 비로소 [[집현전]]의 직제와 기능을 이은 [[홍문관]]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그 뒤 1504년에 [[홍문관]]을 [[진독청|진독청(進讀廳)]]으로 개칭하고 전임관을 없애고 예문관의 관원으로 겸하게 했으나 1506년 다시 복구하였다. 이후 이러한 체제로 계속되다가 1894년 [[갑오개혁]]으로 [[홍문관]]과 [[예문관]]을 합해 [[경연청|경연청(經筵廳)]]이라 하였다. 이듬해에는 이를 폐해 [[시종원|시종원(侍從院)]]에 속하게 했고, 그 해 관제 개정으로 [[경연원|경연원(經筵院)]]이 되었다가 1896년에 다시 [[홍문관]]으로 개칭하였다. <ref> 최승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4081 홍문관(弘文館)]",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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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가 [[집현전]]을 혁파한 뒤, [[집현전]]의 기능은 부분적으로 [[예문관]]에 의해 계속되었다. 1470년에 옛 [[집현전]] 제도에 따라 [[예문관]]에 15인의 전임관(專任官)을 더 둠으로써 [[예문관]]은 구 집현전의 기능을 겸했다. 1478년 2월에는 직제도 [[집현전]]과 [[예문관]]의 복합체가 되었다. 이에 따라 [[예문관]] 분관(分館)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해 3월에 구 [[집현전]]의 직제를 [[예문관]]에서 분리하여 당시 유명무실한 기관이던 [[홍문관]]에 이양함으로써 비로소 [[집현전]]의 직제와 기능을 이은 [[홍문관]]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그 뒤 1504년에 [[홍문관]]을 [[진독청|진독청(進讀廳)]]으로 개칭하면서 전임관을 없애고 예문관관원이 겸하게 했다가 1506년 다시 복구하였다. 이후 이러한 체제로 계속되다가 1894년 [[갑오개혁]]으로 [[홍문관]]과 [[예문관]]을 합해 [[경연청|경연청(經筵廳)]]이라 하였다. 이듬해에는 이를 폐해 [[시종원|시종원(侍從院)]]에 속하게 했고, 그 해 관제 개정으로 [[경연원|경연원(經筵院)]]이 되었다가 1896년에 다시 [[홍문관]]으로 개칭하였다. <ref> 최승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4081 홍문관(弘文館)]",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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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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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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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읽을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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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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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옹섭, 「조선 전기 청요직(淸要職)의 위상과 인사이동 양상」, 『韓國思想史學』, 한국사상사학회, Vol.55 No.- , 2017, 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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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옹섭, 「조선 전기 청요직(淸要職)의 위상과 인사이동 양상」, 『韓國思想史學』55, 한국사상사학회, 2017, 1-47쪽.
** 조윤혜, 「조선 정치의 성격과 특징 교육 연구 : 홍문관을 중심으로」, 성신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학과(역사교육전공),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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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윤혜, 「조선 정치의 성격과 특징 교육 연구 : 홍문관을 중심으로」, 성신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1.
** 최승희, 「홍문관의 언관화」, 『朝鮮時代史學報』, 조선시대사학회, Vol.18 No.- , 2001, 35-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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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승희, 「홍문관의 언관화」, 『朝鮮時代史學報』18, 조선시대사학회, 2001, 35-61쪽.
** 최승희, 「弘文館의 成立經緯」, 『한국사연구』, 한국사연구회, Vol.5 No.- , 1970, 101-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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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승희, 「弘文館의 成立經緯」, 『한국사연구』5, 한국사연구회, 1970, 101-115쪽.
  
*웹사이트 내 특정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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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자원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54784&cid=40942&categoryId=33383 홍문관(弘文館)]",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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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54784&cid=40942&categoryId=33383 홍문관(弘文館)]",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분류:한글고문서]]
 
[[분류:한글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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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분류:한글고문서]]
 
[[분류:한글고문서]]
 
[[분류: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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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4일 (금) 01:21 기준 최신판

홍문관(弘文館)
Government office.png
대표명칭 홍문관
한자표기 弘文館
이칭 옥당(玉堂)·옥서(玉署)·영각(瀛閣)·서서원(瑞書院)·청연각(淸燕閣)
창립시대 조선


정의

조선시대 궁중의 경서(經書)·사적(史籍)의 관리와 문한(文翰)의 처리 및 왕의 각종 자문에 응하는 일을 관장하던 관서이다. [1]

내용

조선시대 이전, 홍문관의 연원

신라시대에도 상문사(詳文師)·통문박사(通文博士) 또는 서서원이 있었고, 고구려와 백제에도 박사의 제도가 있어 학술적인 관부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홍문관의 연원은 중국 당나라에서 비롯되었다. 626년에 당나라에서는 수문관(修文館)을 개칭해 홍문관이라 했고, 학사(學士)직학사(直學士)를 두었다. 직무는 도적(圖籍)을 수장(收藏), 정리, 교정하고 생도를 교육하며 조정의 제도와 의례에 관한 논의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995년 숭문관(崇文館)을 개칭해 홍문관이라 했고 학사를 두었다. 1298년에는 학사직학사를 두었다. 직무는 시종(侍從)·시강(侍講)으로서, 문신 중 재학(才學)이 있는 자로서 겸하도록 하였다.[2]

조선시대 홍문관의 위상

조선시대에는 학술적인 관부이자, 사헌부·사간원과 더불어 삼사(三司)라고 하였다.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홍문관직은 청요직(淸要職)의 상징이었으므로 홍문관원이 되면 출세가 보장되었다. 조선시대의 정승·판서로서, 홍문관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1463년에 양성지(梁誠之)의 건의에 따라 장서각(藏書閣)홍문관이라 했는데, 이때의 홍문관은 장서기관(藏書機關)이었을 뿐이다. 1478년에야 비로소 학술·언론기관으로서의 홍문관이 성립하였다. 성종 이후 홍문관은 학술적인 관부이자, 사헌부·사간원과 더불어 삼사(三司)로 꼽혔으며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홍문관직은 청요직(淸要職)의 상징이었으므로 홍문관원이 되면 출세가 보장되었다. 조선시대의 정승·판서로서 홍문관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3]

잦은 명칭 변경과 과정

세조가 집현전을 혁파한 뒤, 집현전의 기능은 부분적으로 예문관에 의해 계속되었다. 1470년에 옛 집현전 제도에 따라 예문관에 15인의 전임관(專任官)을 더 둠으로써 예문관은 구 집현전의 기능을 겸했다. 1478년 2월에는 직제도 집현전예문관의 복합체가 되었다. 이에 따라 예문관 분관(分館)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해 3월에 구 집현전의 직제를 예문관에서 분리하여 당시 유명무실한 기관이던 홍문관에 이양함으로써 비로소 집현전의 직제와 기능을 이은 홍문관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그 뒤 1504년에 홍문관진독청(進讀廳)으로 개칭하면서 전임관을 없애고 예문관관원이 겸하게 했다가 1506년 다시 복구하였다. 이후 이러한 체제로 계속되다가 1894년 갑오개혁으로 홍문관예문관을 합해 경연청(經筵廳)이라 하였다. 이듬해에는 이를 폐해 시종원(侍從院)에 속하게 했고, 그 해 관제 개정으로 경연원(經筵院)이 되었다가 1896년에 다시 홍문관으로 개칭하였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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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두공부시
어제계주윤음


지식관계망

  • 분류두공부시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홍문관 당나라 수문관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홍문관 고려 숭문관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홍문관 어제계주윤음 A는 B에 있었다 A ekc:formerLocation B
홍문관 집현전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홍문관 규장각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홍문관 갑오개혁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홍문관 신용개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A foaf:member B
홍문관 이옥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A foaf:member B
홍문관 경연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홍문관 예문관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홍문관 채제공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A foaf:member B
홍문관 서명선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A foaf:member B
홍문관 예조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주석

  1. 최승희, "홍문관(弘文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최승희, "홍문관(弘文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최승희, "홍문관(弘文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최승희, "홍문관(弘文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송옹섭, 「조선 전기 청요직(淸要職)의 위상과 인사이동 양상」, 『韓國思想史學』55, 한국사상사학회, 2017, 1-47쪽.
    • 조윤혜, 「조선 정치의 성격과 특징 교육 연구 : 홍문관을 중심으로」, 성신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1.
    • 최승희, 「홍문관의 언관화」, 『朝鮮時代史學報』18, 조선시대사학회, 2001, 35-61쪽.
    • 최승희, 「弘文館의 成立經緯」, 『한국사연구』5, 한국사연구회, 1970, 101-1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