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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후기 [[의정부]]를 대신하여 국정 전반을 총괄한 실질적인 최고의 관청. <ref> 정하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5147 비변사(備邊司)]",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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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군국기무(軍國機務)를 관장한 문무합의기구(文武合議機構)이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06009&cid=40942&categoryId=31667 비변사]",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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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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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변사의 설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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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국(備局)·주사(籌司)라고도 한다. 조선의 군사행정은 국방부격인 병조에서 관장하였는데, 외적의 침입 등 변방에 국가적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병조 단독으로 군사 문제를 처결할 수 없었다. 그러한 결정은 [[의정부]]와 [[육조|육조(六曹)]]의 대신, 그리고 변방의 일을 잘 아는 [[지변사재상|지변사재상(知邊司宰相:경상도·전라도·평안도·함경도의 관찰사와 병사(兵使)·수사(水使)를 지낸 종2품 이상의 관원)]]으로 구성한 회의에서 협의하여 내렸다. 그러나 이 회의는 대개 적의 침입이 있다는 보고를 받은 연후에 소집되므로 즉각 대처하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이 때문에, 남쪽 해안과 북쪽 국경지대에 대한 국방대책을 사전에 마련하기 위해, 1517년 6월 [[비변사]]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초기에는 1524년의 여연(閭延)·무창(茂昌)에 침입한 야인(野人)을 격퇴할 때, 1544년 [[사량왜변|사량왜변(蛇梁倭變)]]이 일어났을 때, 1555년 [[을묘왜변]]이 일어났을 때와, 기타 변방에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등 간헐적으로 활동하였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06009&cid=40942&categoryId=31667 비변사]",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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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변사의 폐지===
===비변사의 설치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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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상의 질서, 기능상의 중복, 그리고 권한의 한계성 등 때문에 폐지론이 여러 차례 제기되었으나 후기까지 존속하였다. 그러나 1865년 [[흥선대원군|대원군]]이 집정하면서 [[의정부]]와 [[비변사]]의 한계를 규정, 국정 의결권을 의정부에 이관하면서 기능이 약화되었다. 이후 [[삼군부|3군부(三軍府)]] 제도를 부활시켜 군무를 처리하게 함으로써 폐지되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06009&cid=40942&categoryId=31667 비변사]",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조선의 정치체제는 왕권과 [[의정부]]·[[육조|육조(六曹)]]·[[삼사|삼사(三司 : 홍문관·사헌부·사간원)]]의 유기적인 기능이 표방되는 체제였다. [[의정부]]가 정책조정 기관으로 정치적 결정을 내리면 [[육조]]가 행정 실무를 집행하고, [[삼사|삼사(三司)]]가 권력 행사에 견제 작용을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에 따라 군사 업무는 원칙적으로 [[의정부]]와 [[병조]]사이에서 처리되어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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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성종]] 때에 이르러 소규모이기는 하지만, 왜구와 여진의 침입이 끊이지 않자 보다 실정에 맞는 대책을 수립하기 위해 점차 [[의정부]]의 3의정(영의정·좌의정·우의정)을 포함하는 [[원상]](院相 : 임금이 정상적인 정치를 할 수 없을 때 이를 대리 수행할 수 있도록 이끌던 원로 재상)과 [[병조]] 외에 국경 지방의 요직을 지낸 인물을 필요에 따라 참여시켜 군사 방략을 협의하게 되었는데, 이들을 [[지변사재상|지변사재상(知邊事宰相)]]이라고 일컬었다. [[지변사재상]]은 외침이 있을 때마다 항상 방략 수립에 참여한 것은 아니고, 활동면에서도 부침이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국방력의 약화, 군사전문가의 부족, 군제의 해이 등 대내적 요인과, 간헐적으로 계속된 외적의 침입이라는 대외적 요인 때문에 필요성이 계속 인정되고 있었다. 1510년(중종 5) [[삼포왜란|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나자 [[지변사재상]]을 급히 소집하여 방어책을 논의하는 한편, 그동안 변칙적이며 편의적으로 유지해오던 [[지변사재상]]과의 합의체제를 고쳐 임시적으로 [[비변사]]라는 비상 시국에 대비하는 기구를 만들었다. <ref> 정하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5147 비변사(備邊司)]",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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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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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읽을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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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논문
** 임정은, 「備邊司謄錄의 書誌學的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문헌정보학과, 석사학위논문,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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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미소, 「조선 인조대 비변사의 기능과 위상 변화」, 전남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12.
** 양미소, 「조선 인조대 비변사의 기능과 위상 변화」, 전남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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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정은, 「備邊司謄錄의 書誌學的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문헌정보학과 석사학위논문, 2006.
** 이시내, 「大院君의 備邊司革罷 背景과 그 結果」, 성신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학과 역사교육전공, 석사학위논문,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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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식, 「조선 숙종대 비변사(備邊司)의 정치적 기능과 왕권강화」, 『民族文化硏究』42,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5, 307-343쪽.
** 이재철, 「17世紀 備邊司의 運營과 性格」, 경북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한국사전공, 박사학위논문,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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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시내, 「大院君의 備邊司革罷 背景과 그 結果」, 성신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학과 역사교육전공 석사학위논문,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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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철, 「17世紀 備邊司의 運營과 性格」, 경북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한국사전공 박사학위논문,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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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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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하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5147 비변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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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5149 비변사등록]",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분류:한글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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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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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4일 (금) 01:02 기준 최신판

비변사(備邊司)
Government office.png
대표명칭 비변사
한자표기 備邊司
이칭 비국(備局)·묘당(廟堂)·주사(籌司)
유형 관청, 제도
창립시대 조선


정의

조선시대 군국기무(軍國機務)를 관장한 문무합의기구(文武合議機構)이다.[1]

내용

비변사의 설치 배경

비국(備局)·주사(籌司)라고도 한다. 조선의 군사행정은 국방부격인 병조에서 관장하였는데, 외적의 침입 등 변방에 국가적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병조 단독으로 군사 문제를 처결할 수 없었다. 그러한 결정은 의정부육조(六曹)의 대신, 그리고 변방의 일을 잘 아는 지변사재상(知邊司宰相:경상도·전라도·평안도·함경도의 관찰사와 병사(兵使)·수사(水使)를 지낸 종2품 이상의 관원)으로 구성한 회의에서 협의하여 내렸다. 그러나 이 회의는 대개 적의 침입이 있다는 보고를 받은 연후에 소집되므로 즉각 대처하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이 때문에, 남쪽 해안과 북쪽 국경지대에 대한 국방대책을 사전에 마련하기 위해, 1517년 6월 비변사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초기에는 1524년의 여연(閭延)·무창(茂昌)에 침입한 야인(野人)을 격퇴할 때, 1544년 사량왜변(蛇梁倭變)이 일어났을 때, 1555년 을묘왜변이 일어났을 때와, 기타 변방에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등 간헐적으로 활동하였다.[2]

비변사의 폐지

행정상의 질서, 기능상의 중복, 그리고 권한의 한계성 등 때문에 폐지론이 여러 차례 제기되었으나 후기까지 존속하였다. 그러나 1865년 대원군이 집정하면서 의정부비변사의 한계를 규정, 국정 의결권을 의정부에 이관하면서 그 기능이 약화되었다. 이후 3군부(三軍府) 제도를 부활시켜 군무를 처리하게 함으로써 폐지되었다.[3]


연계 자원 보러 가기
윤음을 통해 보는 조선 임금들의 애민정신
가체신금사목
어제 유함경남북관대소민인등윤음


지식관계망

  • 윤음을 통해 보는 조선 임금들의 애민정신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비변사 의정부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비변사 지변사재상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비변사 가체신금사목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비변사 어제 유함경남북관대소민인등윤음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비변사 진휼청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비변사 호조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비변사 허목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비변사 의정부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비변사 예조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비변사 정리소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비변사 논개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비변사 흥선대원군 이하응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주석

  1. "비변사",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2. "비변사",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3. "비변사",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양미소, 「조선 인조대 비변사의 기능과 위상 변화」, 전남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12.
    • 임정은, 「備邊司謄錄의 書誌學的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문헌정보학과 석사학위논문, 2006.
    • 이상식, 「조선 숙종대 비변사(備邊司)의 정치적 기능과 왕권강화」, 『民族文化硏究』42,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5, 307-343쪽.
    • 이시내, 「大院君의 備邊司革罷 背景과 그 結果」, 성신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학과 역사교육전공 석사학위논문, 1998.
    • 이재철, 「17世紀 備邊司의 運營과 性格」, 경북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한국사전공 박사학위논문, 1995.
  • 웹자원
    • 정하명, "비변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재호, "비변사등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