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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2일 (수) 16:57 기준 최신판
합천 백엄사 (陜川 伯嚴寺) |
|
대표명칭 | 합천 백엄사 |
---|---|
한자 | 陜川 伯嚴寺 |
이칭 | 대동사(大同寺), 백암사(白巖寺) |
주소 | 경상남도 합천군 대양면 백암리 |
|
정의
경상남도 합천군 대양면에 있었던 사찰.
내용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신라시대에 엄흔(嚴欣)과 백흔(伯欣)이 살던 집을 희사하여 이 절을 창건하고 두 사람의 이름 중 한 글자씩을 따서 백엄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또 일설에는 신라 때의 북택청(北宅廳) 터를 희사하여 창건하였다고도 한다. 창건 후 건물이 헐어 한때 폐허가 되었다가 906년(효공왕 10)에 사목곡(沙木谷)의 양부(陽孚)가 중창하고 주지가 되어 선종(禪宗)의 중심도량으로 만들었다. 925년(태조 8)에 희양산파(曦陽山派)의 고승 긍양(兢讓)이 와서 스승 양부의 뜻을 이어 10년 동안 후학을 지도하다가 다시 희양산으로 돌아갔으며, 그 뒤를 이어 신탁(神卓)이 남원 백암사에서 이 절로 옮겨와 주지가 되었다. 1065년(문종 19) 11월에는 이 절의 주지 미정(微定)이 「원중상규(院中常規) 10조(十條)」를 정하고 5층 석탑을 세워 부처의 진신사리 24립(粒)을 봉안하였다. 그 뒤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폐사시기는 고려 말 조선 초로 추정된다. 현재의 절터 가운데 일부는 경작지로 변하였으며, 절터에는 보물 제381호로 지정된 합천 백암리석등과 석조여래좌상이 남아 있다.[1]
지식 관계망
- 합천 백엄사에 주석했던 정진대사 긍양의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합천 백엄사 | 양부 | A는 B가 중건하였다 | A ekc:renovator B |
긍양 | 합천 백엄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자복사찰 | 합천 백엄사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합천 백엄사지 | 합천 백엄사 | A는 B의 터이다 | A edm:isRelatedTo B |
합천 백암리 석등 | 합천 백엄사지 | A는 B에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주석
참고문헌
- 김위석, "백엄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