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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5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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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내문화재=[[문경 대승사 금동관음보살좌상]], [[문경 대승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문경 대승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및 관계문서]], [[대승사마애여래좌상]], [[문경대승사명부전지장탱화]], [[문경대승사사면석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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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의'''==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에 있는 절로 [[김천 직지사|직지사(直指寺)]]의 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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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에 있는 사찰.
  
 
=='''내용'''==
 
=='''내용'''==
 
===역사===
 
===역사===
1644년([[조선 인조|인조]] 22)과 1722년([[조선 경종|경종]] 2)에 의현(義玄)·종수(鍾守) 등이 중수하였고, 1831년(순조 31) 구담(九潭)이 중창하였다. 1922년 대화재로 불타, 의운(義雲)·덕산(德山)이 복원시켰는데, 1956년 또 대화재가 발생, 명부전과 극락전만 남고 소실되어, 1966년 남인(南印)·대휴(大休) 등에 의해 삼창(三創)되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81130&cid=40942&categoryId=31548 대승사]",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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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사는 587년([[신라 진평왕|진평왕]] 9)에 창건했는데, 신라에 불교가 국가적으로 공인된 지 70여 년이 지난 때 창건했으므로, 대승사는 신라 불교의 개척자 같은 존재였고, 왕이 직접 행차하여 창건을 명했기에,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찰이었다.<ref>사찰문화연구원, "대승사", 『전통사찰총서 17 - 경북의 전통사찰IV』, 사찰문화연구원, 2001, 177쪽.</ref> [[고려 고종|고려 고종]] 때 상주목사 최자(崔滋)는 대승사 서남쪽에 있는 백련사(白蓮寺)를 새롭게 단장하였으며, 조선 초기 [[기화|득통기화(得通己和, 1376-1433)]]가 이 절의 조전(祖殿)에 있으면서 『[[반야경|반야경(般若經)]]』을 연구하였고, 반야사(般若社)를 결성하여 후학들을 지도했다.<ref>박상국,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4542 대승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1644년([[조선 인조|인조]] 22)과 1722년([[조선 경종|경종]] 2)에 의현(義玄)·종수(鍾守) 등이 중수했고, 1831년(순조 31) 구담(九潭)이 중창했다. 1922년 큰 화재로 불타, 의운(義雲)·덕산(德山)이 복원시켰는데, 1956년 또 큰 화재가 발생, [[명부전]]과 [[극락전]]만 남고 소실되어, 1966년 남인(南印)·대휴(大休) 등이 삼창(三創)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81130&cid=40942&categoryId=31548 대승사]",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관련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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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건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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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사는 587년(진평왕 9)에 창건했는데, 『[[삼국유사|삼국유사(三國遺事)]]』 권3 「탑상(塔像)」의 '사불산 굴불산 만불산(四佛山 掘佛山 萬佛山)'조에 대승사 창건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한다.<ref>사찰문화연구원, "대승사", 『전통사찰총서 17 - 경북의 전통사찰IV』, 사찰문화연구원, 2001, 177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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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령(竹嶺) 동쪽 1백리 가량 떨어진 마을에 높은 산이 있는데, 진평왕(眞平王) 46년 갑신(甲申)에 홀연히 사면이 한 발이나 되는 큰 돌에 사방여래(四方如來: 사방의 불국토에 사는 부처)를 조각하고 모두 붉은 비단으로 감싼 것이 하늘로부터 그 산 정상에 떨어졌다. 왕은 그 말을 듣고 (그곳에) 가서 쳐다보고 예경한 후 드디어 그 바위 곁에 절을 창건하고 이름을 대승사(大乘寺)라 하였다. 『법화경(法華經)』을 외우는 이름이 전하지 않는 비구니를 청하여 절을 맡게 하여 깨끗하게 하고 돌을 공양하며 향불이 끊어지지 않게 하였다. 그 산을 역덕산(亦德山)이라고 하며, 혹은 사불산(四佛山: 대승사가 위치한 산으로, 산 위 바위에 새겨진 사방불에 이하여 산 이름이 지어짐)이라고도 한다. 비구니가 죽자 장사지냈더니 무덤위에서 연(蓮)이 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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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db.history.go.kr/id/sy_003r_0020_0090_0010 진평왕때 사불산에 사방여래가 떨어졌다]", 삼국유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데이터베이스』<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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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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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무렵 대승사에는 산내 암자 9개가 있었다. 미륵암(彌勒庵)·사불암(四佛庵)·상적암(上寂庵)·대비암(大妃庵)·묘적암(妙寂庵)·묘봉암(妙峰庵)·윤필암(閠筆庵)·문수암(文殊庵)·보현암(普賢庵) 등으로, 지금은 이 가운데 윤필암, 보현암, 묘적암, 총지암만이 남아 있다.<ref>사찰문화연구원, "대승사", 『전통사찰총서 17 - 경북의 전통사찰IV』, 사찰문화연구원, 2001, 190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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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적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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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적암(妙寂庵)은 646년([[신라 선덕여왕|선덕여왕]] 15) 부설(浮雪)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고려 말의 고승인 [[혜근|나옹(懶翁)]]이 출가하여 수행했던 곳이다. [[혜근|나옹]]이 심었다는 회목(檜木)이 지금도 남아 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320025&cid=40942&categoryId=31548 묘적암]",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1668년([[조선 현종|현종]] 9) 성일(性日)이 중건했고, 1900년 취원(就圓)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ref>박상국,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8884 묘적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전각은 법당과 산신각이 있으며,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08호로 지정된 [[문경대승사묘적암나옹화상영정|나옹화상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320025&cid=40942&categoryId=31548 묘적암]",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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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필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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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필암(潤筆庵)은 1380년([[고려 우왕|우왕]] 6) 승려 각관(覺寬)과 김득배(金得培)의 부인 김씨(金氏)가 창건하였다. 각관과 김씨는 [[혜근|나옹화상(懶翁和尙)]]이 입적하자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윤필암을 짓고, [[이색|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에게 기문(記文)을 요청하였다. [[이색|이색]]은 기문의 집필료를 받지 않고 그 돈으로 사찰 건립 비용을 충당하게 했는데, 윤필암이라는 암자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다. 윤필은 원래 글을 지어주는 대가로 받는 일종의 사례금으로, 집필료를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제8 지평현(砥平縣) 불우(佛宇) 조에서는 "[[이색|이색]]이 왕명을 받들어 [[혜근|나옹]]의 부도명을 지었다. [[혜근|나옹]]의 문도들이 집필료를 마련하여 사례하였는데, [[이색|이색]]이 받지 않고 그 집필료로 허물어진 절을 수리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수리한 암자를) 윤필암이라고 불렀다(李穡以王旨撰懶翁浮屠銘 其徒致潤筆物 穡不受使修廢寺 因名之)."라고 하여 명칭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당시 [[혜근|나옹]]의 사리탑이 있던 [[여주 신륵사|신륵사(神勒寺)]]와 [[양주 회암사|회암사(檜巖寺)]] 외에도, 묘향산(妙香山)‧금강산(金剛山)‧소백산(小白山)‧사불산(四佛山)‧치악산(雉岳山)‧용문산(龍門山)‧구룡산(九龍山) 등 일곱 곳에 [[혜근|나옹]]의 진영을 모신 진당(眞堂)을 세우고 사리를 나누어 모셨는데, 이 일곱 곳에 모두 이색이 기문을 써주었고 윤필암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색|이색]]은 「윤필암기(潤筆庵記)」에서 이르기를, 공덕산(사불산의 다른 이름)에 묘적암(妙寂庵)이 있는데 이곳은 요연선사(了然禪師)가 머물고 있을 적 [[혜근|나옹]]이 출가했던 곳이니 [[혜근|나옹]]의 본 고향이라고 했다. 이는 [[혜근|나옹]]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공덕산에 그의 사리를 봉안한 윤필암을 세우는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ref>이종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9084 윤필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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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불산(四佛山)을 일명 공덕산(功德山)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이름을 지은 사람은 지공(指空)스님이다. 중 각관(覺寬)과 찬성(贊成)이었던 김득배(金得培)의 부인 김씨가 이 산에다 윤필암이란 절을 짓고, 윤필암기를 지어달라고 편지를 보내는데 그 내용에는 "산 가운데 있는 암자를 묘적암(妙寂菴)이라 하는데, 요연선사(了然禪師)께서 계셨고, 나옹(懶翁)스님께서 출가(出家 처음으로 중이 됨)한 곳입니다. 지금은 나옹스님은 떠났으나 사리는 온나라에 펴졌으며, 그림을 그려서 모시는 곳도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그러나 모두 스쳐가신 땅에 지나지 않는 것이요, 꼭 이런 곳을 다 평소에 유의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중은 뽕나무 아래서 사흘 밤을 계속해 자지 않는다.'는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가 처음 출발한 곳으로 말할 것같으면, 머리를 깎음으로써 번뇌를 씻어버린 곳이요, 계명을 받음으로써 중이 된 곳이니, 이른바, '여러 성인이 전하지 못한 종문(宗門)의 지극한 곳[極處]'으로 지향하는 출발이 이에서 시작된 것이며, 도에 들어감도 이에서 시작되었다 하겠습니다. 도를 회암(檜巖)에서 깨닫고, 얻은 것을 평산(平山)에서 인정받으신 것도 다 여기서 비롯된 것이며, 서울에서 설법해서 선왕(先王)의 스승이 되신 것도 모두 여기서 비롯된 것이니, 공덕산은 사실로 나옹의 본바탕이 되는 곳입니다. 나옹은 벌써 돌아가셨으되 그분의 사리를 간직하고, 그림을 모시어 공양하는 것은 오늘날 공덕을 구하는 사람들의 보통 일입니다마는, 소위 참된 공덕을 알고 그러는 것입니까? 공덕산은 나옹 때문에 이름을 더욱 전하게 되었고, 세상에서 나옹을 흠모하여 공덕을 닦는 사람도 그와 같이 넓은 지역에 깔렸으니, 따져볼 때 공덕이 산에 있는 것인지 나옹에게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아니하면 분주하게 다니며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인지, 선생께서 한 말씀으로 써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였었다. 나는 이 글을 받아보고 말하기를, "나는 들으니 공덕산이 대원(大院) 동쪽에 있는데 우뚝 솟은 봉 위에 큰 돌이 네 갈래로 갈라졌고, 높이가 모두 넉 자 남짓한데, 마치 부처님의 모양같으므로 복을 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떼를 지어 몰려와서 기도하기 때문에, 이 산을 '사불산(四佛山)'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성(聖)·지(智)·묘(妙)·원(圓)은 그 체(體)가 스스로 공적(空寂)한 것이니, '묘적암(妙寂菴)'이란 이름인들 어찌 근거 없이 생겼겠는가. 공덕을 묘적암에서 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나옹과 같이 하면 족할 것이다." 하였다 아울러 드러낸다. 경신 추 8월 초하루 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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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65A_0740_010_0010_2002_006_XML 윤필암기(潤筆菴記)]", 동문선(東文選) 제74권 기(記),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고전종합DB』<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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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1645년([[조선 인조|인조]] 23) 서조(瑞祖)와 탁잠(卓岑), 1765년([[조선 영조|영조]] 41) 야운(野雲), 1806년([[조선 순조|순조]] 6) 취운(醉雲), 1885년([[조선 고종|고종]] 22) 창명(滄溟)이 윤필암을 각각 중건했다. 근래에는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한 청담(靑潭, 1902~1971)의 속가 둘째 딸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을 역임한 성철(性徹, 1912~1993)의 비구니 제자인 묘엄(妙嚴, 1931~2011)이 출가 수행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ref>이종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9084 윤필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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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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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대승사 금동관음보살좌상|문경 대승사 금동관음보살좌상(聞慶 大乘寺 金銅觀音菩薩坐像)]] - 보물 제9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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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대승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문경 대승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聞慶 大乘寺 金銅阿彌陀如來坐像 및 腹藏遺物)]] - 보물 제16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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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대승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및 관계문서|문경 대승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및 관계문서(聞慶 大乘寺 木刻阿彌陀如來說法像 및 關係文書)]] - 보물 제5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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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사마애여래좌상|대승사마애여래좌상(大乘寺磨崖如來坐像)]]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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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사윤필암목조아미타여래좌상및지감|대승사윤필암목조아미타여래좌상및지감(大乘寺潤筆庵木造阿彌陀如來坐像및紙龕)]]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0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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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대승사명부전지장탱화|문경대승사명부전지장탱화(聞慶大乘寺冥府殿地藏幀畵)]] - 문화재자료 제5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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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대승사윤필암후불탱화|문경대승사윤필암후불탱화(聞慶大乘寺潤筆庵後佛幀畵)]] - 문화재자료 제348호
 +
*[[문화재자료 제348호|문경대승사사면석불(聞慶 大乘寺 四面石佛)]]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0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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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대승사묘적암나옹화상영정|문경대승사묘적암나옹화상영정(聞慶大乘寺妙寂庵懶翁和尙影幀)]]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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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윤필암 삼층이형석탑|문경 윤필암 삼층이형석탑(聞慶 潤筆庵 三層異形石塔)]]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9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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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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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대승사에서 출가한 나옹 혜근의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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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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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정보===
===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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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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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문화연구원, "대승사", 『전통사찰총서 17 - 경북의 전통사찰IV』, 사찰문화연구원, 2001, 176-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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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국,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4542 대승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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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81130&cid=40942&categoryId=31548 대승사]",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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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320025&cid=40942&categoryId=31548 묘적암]",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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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국,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8884 묘적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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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9084 윤필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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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승탑/교열완료!]]

2017년 11월 22일 (수) 11:29 기준 최신판

문경 대승사
(聞慶 大乘寺)
대표명칭 문경 대승사
한자 聞慶 大乘寺
주소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전두리 사불산
교구정보 대한불교조계종
건립시기 587년
경내문화재 문경 대승사 금동관음보살좌상, 문경 대승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문경 대승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및 관계문서, 대승사마애여래좌상, 문경대승사명부전지장탱화, 문경대승사사면석불



정의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에 있는 사찰.

내용

역사

대승사는 587년(진평왕 9)에 창건했는데, 신라에 불교가 국가적으로 공인된 지 70여 년이 지난 때 창건했으므로, 대승사는 신라 불교의 개척자 같은 존재였고, 왕이 직접 행차하여 창건을 명했기에,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찰이었다.[1] 고려 고종 때 상주목사 최자(崔滋)는 대승사 서남쪽에 있는 백련사(白蓮寺)를 새롭게 단장하였으며, 조선 초기 득통기화(得通己和, 1376-1433)가 이 절의 조전(祖殿)에 있으면서 『반야경(般若經)』을 연구하였고, 반야사(般若社)를 결성하여 후학들을 지도했다.[2] 1644년(인조 22)과 1722년(경종 2)에 의현(義玄)·종수(鍾守) 등이 중수했고, 1831년(순조 31) 구담(九潭)이 중창했다. 1922년 큰 화재로 불타, 의운(義雲)·덕산(德山)이 복원시켰는데, 1956년 또 큰 화재가 발생, 명부전극락전만 남고 소실되어, 1966년 남인(南印)·대휴(大休) 등이 삼창(三創)했다.[3]

창건 설화

대승사는 587년(진평왕 9)에 창건했는데, 『삼국유사(三國遺事)』 권3 「탑상(塔像)」의 '사불산 굴불산 만불산(四佛山 掘佛山 萬佛山)'조에 대승사 창건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한다.[4]

Quote-left.png 죽령(竹嶺) 동쪽 1백리 가량 떨어진 마을에 높은 산이 있는데, 진평왕(眞平王) 46년 갑신(甲申)에 홀연히 사면이 한 발이나 되는 큰 돌에 사방여래(四方如來: 사방의 불국토에 사는 부처)를 조각하고 모두 붉은 비단으로 감싼 것이 하늘로부터 그 산 정상에 떨어졌다. 왕은 그 말을 듣고 (그곳에) 가서 쳐다보고 예경한 후 드디어 그 바위 곁에 절을 창건하고 이름을 대승사(大乘寺)라 하였다. 『법화경(法華經)』을 외우는 이름이 전하지 않는 비구니를 청하여 절을 맡게 하여 깨끗하게 하고 돌을 공양하며 향불이 끊어지지 않게 하였다. 그 산을 역덕산(亦德山)이라고 하며, 혹은 사불산(四佛山: 대승사가 위치한 산으로, 산 위 바위에 새겨진 사방불에 이하여 산 이름이 지어짐)이라고도 한다. 비구니가 죽자 장사지냈더니 무덤위에서 연(蓮)이 났었다. Quote-right.png
출처: "진평왕때 사불산에 사방여래가 떨어졌다", 삼국유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국사편찬위원회.


관련 암자

18세기 무렵 대승사에는 산내 암자 9개가 있었다. 미륵암(彌勒庵)·사불암(四佛庵)·상적암(上寂庵)·대비암(大妃庵)·묘적암(妙寂庵)·묘봉암(妙峰庵)·윤필암(閠筆庵)·문수암(文殊庵)·보현암(普賢庵) 등으로, 지금은 이 가운데 윤필암, 보현암, 묘적암, 총지암만이 남아 있다.[5]

묘적암

묘적암(妙寂庵)은 646년(선덕여왕 15) 부설(浮雪)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고려 말의 고승인 나옹(懶翁)이 출가하여 수행했던 곳이다. 나옹이 심었다는 회목(檜木)이 지금도 남아 있다.[6] 1668년(현종 9) 성일(性日)이 중건했고, 1900년 취원(就圓)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7] 전각은 법당과 산신각이 있으며,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08호로 지정된 나옹화상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8]

윤필암

윤필암(潤筆庵)은 1380년(우왕 6) 승려 각관(覺寬)과 김득배(金得培)의 부인 김씨(金氏)가 창건하였다. 각관과 김씨는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입적하자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윤필암을 짓고,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에게 기문(記文)을 요청하였다. 이색은 기문의 집필료를 받지 않고 그 돈으로 사찰 건립 비용을 충당하게 했는데, 윤필암이라는 암자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다. 윤필은 원래 글을 지어주는 대가로 받는 일종의 사례금으로, 집필료를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제8 지평현(砥平縣) 불우(佛宇) 조에서는 "이색이 왕명을 받들어 나옹의 부도명을 지었다. 나옹의 문도들이 집필료를 마련하여 사례하였는데, 이색이 받지 않고 그 집필료로 허물어진 절을 수리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수리한 암자를) 윤필암이라고 불렀다(李穡以王旨撰懶翁浮屠銘 其徒致潤筆物 穡不受使修廢寺 因名之)."라고 하여 명칭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당시 나옹의 사리탑이 있던 신륵사(神勒寺)회암사(檜巖寺) 외에도, 묘향산(妙香山)‧금강산(金剛山)‧소백산(小白山)‧사불산(四佛山)‧치악산(雉岳山)‧용문산(龍門山)‧구룡산(九龍山) 등 일곱 곳에 나옹의 진영을 모신 진당(眞堂)을 세우고 사리를 나누어 모셨는데, 이 일곱 곳에 모두 이색이 기문을 써주었고 윤필암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색은 「윤필암기(潤筆庵記)」에서 이르기를, 공덕산(사불산의 다른 이름)에 묘적암(妙寂庵)이 있는데 이곳은 요연선사(了然禪師)가 머물고 있을 적 나옹이 출가했던 곳이니 나옹의 본 고향이라고 했다. 이는 나옹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공덕산에 그의 사리를 봉안한 윤필암을 세우는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9]

Quote-left.png 사불산(四佛山)을 일명 공덕산(功德山)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이름을 지은 사람은 지공(指空)스님이다. 중 각관(覺寬)과 찬성(贊成)이었던 김득배(金得培)의 부인 김씨가 이 산에다 윤필암이란 절을 짓고, 윤필암기를 지어달라고 편지를 보내는데 그 내용에는 "산 가운데 있는 암자를 묘적암(妙寂菴)이라 하는데, 요연선사(了然禪師)께서 계셨고, 나옹(懶翁)스님께서 출가(出家 처음으로 중이 됨)한 곳입니다. 지금은 나옹스님은 떠났으나 사리는 온나라에 펴졌으며, 그림을 그려서 모시는 곳도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그러나 모두 스쳐가신 땅에 지나지 않는 것이요, 꼭 이런 곳을 다 평소에 유의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중은 뽕나무 아래서 사흘 밤을 계속해 자지 않는다.'는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가 처음 출발한 곳으로 말할 것같으면, 머리를 깎음으로써 번뇌를 씻어버린 곳이요, 계명을 받음으로써 중이 된 곳이니, 이른바, '여러 성인이 전하지 못한 종문(宗門)의 지극한 곳[極處]'으로 지향하는 출발이 이에서 시작된 것이며, 도에 들어감도 이에서 시작되었다 하겠습니다. 도를 회암(檜巖)에서 깨닫고, 얻은 것을 평산(平山)에서 인정받으신 것도 다 여기서 비롯된 것이며, 서울에서 설법해서 선왕(先王)의 스승이 되신 것도 모두 여기서 비롯된 것이니, 공덕산은 사실로 나옹의 본바탕이 되는 곳입니다. 나옹은 벌써 돌아가셨으되 그분의 사리를 간직하고, 그림을 모시어 공양하는 것은 오늘날 공덕을 구하는 사람들의 보통 일입니다마는, 소위 참된 공덕을 알고 그러는 것입니까? 공덕산은 나옹 때문에 이름을 더욱 전하게 되었고, 세상에서 나옹을 흠모하여 공덕을 닦는 사람도 그와 같이 넓은 지역에 깔렸으니, 따져볼 때 공덕이 산에 있는 것인지 나옹에게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아니하면 분주하게 다니며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인지, 선생께서 한 말씀으로 써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였었다. 나는 이 글을 받아보고 말하기를, "나는 들으니 공덕산이 대원(大院) 동쪽에 있는데 우뚝 솟은 봉 위에 큰 돌이 네 갈래로 갈라졌고, 높이가 모두 넉 자 남짓한데, 마치 부처님의 모양같으므로 복을 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떼를 지어 몰려와서 기도하기 때문에, 이 산을 '사불산(四佛山)'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성(聖)·지(智)·묘(妙)·원(圓)은 그 체(體)가 스스로 공적(空寂)한 것이니, '묘적암(妙寂菴)'이란 이름인들 어찌 근거 없이 생겼겠는가. 공덕을 묘적암에서 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나옹과 같이 하면 족할 것이다." 하였다 아울러 드러낸다. 경신 추 8월 초하루 기한다. Quote-right.png
출처: "윤필암기(潤筆菴記)", 동문선(東文選) 제74권 기(記), 『한국고전종합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조선시대에는 1645년(인조 23) 서조(瑞祖)와 탁잠(卓岑), 1765년(영조 41) 야운(野雲), 1806년(순조 6) 취운(醉雲), 1885년(고종 22) 창명(滄溟)이 윤필암을 각각 중건했다. 근래에는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한 청담(靑潭, 1902~1971)의 속가 둘째 딸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을 역임한 성철(性徹, 1912~1993)의 비구니 제자인 묘엄(妙嚴, 1931~2011)이 출가 수행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10]

관련 문화유산

지식관계망

  • 문경 대승사에서 출가한 나옹 혜근의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기화 문경 대승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문경 대승사 문경 대승사 묘적암 A의 암자는 B이다 A dcterms:hasPart B
문경 대승사 문경 대승사 윤필암 A의 암자는 B이다 A dcterms:hasPart B
혜근 문경 대승사 묘적암 A는 B에서 출가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이색 문경 대승사 윤필암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문경 대승사 묘적암 나옹화상 영정 문경 대승사 묘적암 A는 B에 있다

시각자료

주석

  1. 사찰문화연구원, "대승사", 『전통사찰총서 17 - 경북의 전통사찰IV』, 사찰문화연구원, 2001, 177쪽.
  2. 박상국, "대승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대승사",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4. 사찰문화연구원, "대승사", 『전통사찰총서 17 - 경북의 전통사찰IV』, 사찰문화연구원, 2001, 177쪽.
  5. 사찰문화연구원, "대승사", 『전통사찰총서 17 - 경북의 전통사찰IV』, 사찰문화연구원, 2001, 190쪽.
  6. "묘적암",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7. 박상국, "묘적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8. "묘적암",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9. 이종수, "윤필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0. 이종수, "윤필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사찰문화연구원, "대승사", 『전통사찰총서 17 - 경북의 전통사찰IV』, 사찰문화연구원, 2001, 176-192쪽.
  • 박상국, "대승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대승사",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묘적암",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박상국, "묘적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종수, "윤필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