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찬과 김주국의 편지 (해독)"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주석)
 
(다른 사용자 한 명의 중간 판 하나는 보이지 않습니다)
3번째 줄: 3번째 줄:
 
|온라인자료제목= 의성김씨학봉김성일종가언간(김광찬이 진성이씨에게 쓴 탁서)
 
|온라인자료제목= 의성김씨학봉김성일종가언간(김광찬이 진성이씨에게 쓴 탁서)
 
|URL= http://archive.aks.ac.kr/letter/letterViewer.aspx?datauci=G002+LET+KSM-XF.1765.0000-20140430.B0018_001-1
 
|URL= http://archive.aks.ac.kr/letter/letterViewer.aspx?datauci=G002+LET+KSM-XF.1765.0000-20140430.B0018_001-1
|온라인자료정보= 조선시대한글편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학자료센터』<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온라인자료정보= 조선시대한글편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학자료센터』<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작성일=
 
|최종확인일= 2017년 10월 1일
 
|최종확인일= 2017년 10월 1일
44번째 줄: 44번째 줄:
 
==주석==
 
==주석==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references/></span>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references/></span>
[[분류:한글고문서]][[분류:해독자료]] [[분류:이혜영]]
+
[[분류:한글고문서]][[분류:해독자료]]

2017년 11월 21일 (화) 21:55 기준 최신판

Pici.png

본 기사의 해독문은 "의성김씨학봉김성일종가언간(김광찬이 진성이씨에게 쓴 탁서)"(조선시대한글편지, 『한국학자료센터』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을/를 참고 활용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원문 중 옛 한글의 경우 웹브라우저 및 시스템의 문자세트(character set) 표현상 한계로 인해 표시가 불완전할 수 있으며, 각 내용상의 사소한 교정은 별도의 언급 없이 적용하였습니다.


한글팀 김광찬과 김주국의 편지 01 김광찬과 김주국의 편지 메인.png

원문과 해석문

원문 해석문
긔셔(寄內書) 안흘 주 글 기내서(寄內書). 아내에게 주는 글.
 병(病)이 랄 거시 업서 일만(一萬) 가지 일이 모도 마니 녕위(營爲)야 셩닙(成立)려던 계(計巧ㅣ) 구롬치 헷거로 도라가니 가(可)히 탄식(歎息)물 이긔랴 한 병이 바랄 것이 없어 일만 가지 일이 모두 많이 영위하여 성립하려던 계교가 구름같이 헛것으로 돌아가니 가히 탄식함을 이기랴.
내 죽으무로 (恨) 말고 능(能)히 내 을 니어 일(一) 괴(塊) 육(肉)[1]귀륭(龜隆)[2]이 보젼(保全)야 내 슈쇄(收刷)[3] 못  나문 업(業)을 니으면 내 죽어도 눈을 무리라 내가 죽는 것을 가지고 한하지 말고 능히 내 뜻을 이어 한 덩어리 살붙이 귀륭이를 보전하여서 내가 수쇄하지 못한 남은 업을 이으면 내가 죽어도 눈을 감으리라.
부로골[4] 논은 곳 내 긔(自己) 득(買得) 거시라 토품(土品)이 됴코 소츌(所出)이 우리 집 두어  냥식(糧食)니나 될 거신즉 이 논이 실(實)노 우리 집  모 막을 거시라 (代代) 종종손(宗子宗孫)이 젼(傳)야 (百代)라도 가히 여 내지 못 거시오 부로골 논은 곧 내 스스로 매득한 것이라 토품이 좋고 소출이 우리 집 두어 달 양식이나 될 것인즉, 이 논이 실로 우리 집 한 귀퉁이를 감당할 것이라, 대대로 종자종손이 전하여 백대라도 가히 떼어내지 못할 것이요,
궁골[5] 논도 비록 내 삿다 지라도  가(可)히 여 내지 못 거니니 논곳 면 그나마 다 박전박퇴(薄田薄土ㅣ) 다 미들 거시 업쓰미오 그나마 놋졈[6] 논 오삼개[7] 자리와 장(台庄)[8]남돌고개[9] 밧츤 유뮈(有無ㅣ) 됵(足)히 거론(擧論) 배 아니오 궁골 논도 비록 내가 샀다 할지라도 또한 가히 떼어내지 못할 것이니, 논을 떼어내면 그나마 다른 거친 밭과 땅이 다 맡을 것이 없고, 그나마 놋점 논 오삼개 자리와 태장 납돌고개 밭은 유무를 족히 거론할 바가 아니요,
봄파일[10] 새 밧츤 쳐가(妻家) 깃득[11]으로 산 거시니 자[12] 젼(生前)은 가(可)히 스로 고 휜즉[13]종믈(宗物)[14]노 들 거시니 거나 거나  거 아니라 내 을 톄렴(體念)[15]면 현뷔(賢婦ㅣ)라[16] 이 거시오 갓 죽은 날만 부지져 가(家事) 도라보지 아닌즉 내의 라미 아니로라 봄파일 새 밭은 처가 유산으로 산 것이니, 자네 생전은 가히 스스로 하고 죽은 뒤에는 종물로 들어갈 것이니, 팔거나 떼어내거나 할 것은 아니라, 내 뜻을 깊이 이해하면 현부라 이를 것이요, 한갓 죽은 나만 (애타게) 부르짖어 집안일을 돌보지 아니하면, 나의 바람이 아니로다.
을유년(乙酉年) 월(月) 일(日) 김(金) 탹셔(托書) 을유년, 월 일 김(金). 글로 씀.


본래의 항목 기사로 돌아가기

주석

  1. 육(肉)혈육. 살붙이.
  2. 귀륭(龜隆)인명. 김광찬(金光燦, 1736~1765)의 외아들 김종수(金宗壽, 1761~1813)아명.
  3. 슈쇄(收刷)수습(收拾). 흩어진 재산이나 물건을 거두어 정돈함.
  4. 부로골지명. 부로곡(扶老谷).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 있는 동네 이름.
  5. 궁골지명.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궁골. 웃태장 서쪽에 있는 동네 이름.
  6. 놋졈지명. 녹전(祿田).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녹전면 녹래리 녹전.
  7. 오삼개지명. 놋점에 있는 논 중 일부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이 편지 뒤에서 ‘오삼 논’이라고도 하였다.
  8. 장(台庄)지명. 태장.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台庄里). 고려 시대에, 왕의 태(胎)를 묻어 태장(胎藏), 태장촌(胎藏村)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상태장리, 하태장리 및 와원동을 병합하여 태장리라 하였다.
  9. 남돌고개지명. 납돌고개. 이 편지 뒤에서 ‘납돌고개’라고 표기되었다.
  10. 봄파일지명. 춘파(春坡).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에 있는 마을. 현재 면 소재지이다.
  11. 깃득깃득[衿得]. 부모로부터 몫으로 나누어 받은 바의 유산이나 재산. “分財所得, 謂之衿得.”(󰡔行用吏文󰡕.) ‘깃’(衿)의 소급 형태는 ‘깆’으로서 무엇을 여럿으로 나눌 때에 ‘저마다 돌아오는 한 몫’을 뜻하며, 이것을 표기하는 이두(吏讀) 문자 ‘衿’은 한자에서 그 훈(訓)의 음(音)을 빌려온 것이다.
  12. 자자네. 2인칭대명사. 여기서는 김광찬이 아내 진성이씨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13. 휜즉휜즉(死後즉). 사후인즉. ‘후(死後)+ㅣ(서술격조사)+-ㄴ즉’으로 분석된다.
  14. 종믈(宗物)종가(宗家)의 소유물.
  15. 톄렴(體念)깊이 생각함.
  16. 현뷔(賢婦ㅣ)라현부이라. 어진 며느리라. ‘현부+ㅣ(서술격조사)+-라’로 분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