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훈이씨제문 (해독)"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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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문2=유세차 신축(1721, 경종 1) 11월 경자 삭 19일 병오
 
|해석문2=유세차 신축(1721, 경종 1) 11월 경자 삭 19일 병오
|해석문3=왕세제가 상궁 이씨를 보내고 술과 여러 가지 음식[淸酌庶羞]을 가지고 소훈이씨의 영구 앞에서 전을 올리고 말합니다. 오호 애재라. 세상에 어찌 애통한 아픔이 없겠으리오마는 어찌 내가 오늘 당한 일과 같은 것이 있겠는가! 오호라! 婉順한 성품과 우아한 기질을 가지고 양가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蚤歲]에 입궁하였다.3) 그대가 뽑혀 들어 왔을 때에 나 또한 나이가 어렸다.4) 이미 어렸을 때부터 처신하는 바가 규범과 법도[規度]가 있었으니 진실로 내가 남몰래 탄복한 바이다. 몸이 소실[첩]에 있을 때에5) 조심조심하여[翼翼小心] 아침저녁으로 공경하고 삼가 하였다. 내가 허물이 있으면 문득 반드시 엿보고서 간하였는데, 내가 항상 뉘우쳐 그것(허물)을 고친 것이 어찌 사랑에 이끌려서 그런 것이겠는가! 선량한 마음에 지성으로 감복하여 그런 것이다. 명분은 비록 남자와 여자이지만 생각은 친구사이여서 나의 마음을 아는 자는 그대요 그대의 마음을 아는 자는 나였다. 규중에서 경사스럽게 자식을 낳아 길러 자손이 번성하였으니6) 내가 일찍이 “선을 쌓은 사람은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으리니7) 뒷날 자손이 번성[麟趾]8) 하는 기쁨은 반드시 여기에 그치지 않을 것이고 백년을 기한하여 그 복을 누릴 것이다” 라 하였는데, 뜻하지 않게 하나의 질병에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오호 통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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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문3=왕세제가 상궁 이씨를 보내고 술과 여러 가지 음식[淸酌庶羞]을 가지고 소훈이씨의 영구 앞에서 전을 올리고 말합니다. 오호 애재라. 세상에 어찌 애통한 아픔이 없겠으리오마는 어찌 내가 오늘 당한 일과 같은 것이 있겠는가! 오호라! 婉順한 성품과 우아한 기질을 가지고 양가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蚤歲]에 입궁하였다.<ref>양가에서 태어나……나이에 입궁하였다: 1701년(숙종 27) 8세에 정식 궁인 선발에 응시하여 뽑혔는데(「有明朝鮮國靖嬪含城李氏墓誌」(장서각 소장 K2-3990), 양인 집안의 딸이 입궁한 것은 한미하고 쇠락한 집안 형편에 투탁한 것으로 추측된다.</ref> 그대가 뽑혀 들어 왔을 때에 나 또한 나이가 어렸다.<ref>그대가 뽑혀……왔을 때에: 정빈이씨가 아기나인이 된 해는 1701년(숙종 27)이므로, 당시 영조(1694~1776) 나이 8세였고 그녀와 동년배였다.</ref>이미 어렸을 때부터 처신하는 바가 규범과 법도[規度]가 있었으니 진실로 내가 남몰래 탄복한 바이다. 몸이 소실[첩]에 있을 때에<ref>몸이 소실에 있을 때에: 1717년(숙종 43) 4월 22일 요절한 장녀 和憶翁主가 태어났음을 감안한다면, 적어도 1년 전 1716년(숙종 42) 23살 때에 승은을 입었을 것이다. 1721년(경종 1) 10월 3일, 세자궁 소속 종5품 昭訓에 봉작되기 전까지 사실상 왕자군의 첩이었다.</ref> 조심조심하여[翼翼小心] 아침저녁으로 공경하고 삼가 하였다. 내가 허물이 있으면 문득 반드시 엿보고서 간하였는데, 내가 항상 뉘우쳐 그것(허물)을 고친 것이 어찌 사랑에 이끌려서 그런 것이겠는가! 선량한 마음에 지성으로 감복하여 그런 것이다. 명분은 비록 남자와 여자이지만 생각은 친구사이여서 나의 마음을 아는 자는 그대요 그대의 마음을 아는 자는 나였다. 규중에서 경사스럽게 자식을 낳아 길러 자손이 번성하였으니<ref>규중에서 경사스럽게……자손이 번성하였으니[慶毓閨中, 螽斯詵詵]: 『시경』「周南」“螽斯羽詵詵兮”</ref> 내가 일찍이 “선을 쌓은 사람은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으리니<ref>선을 쌓은……경사가 있으리니[積善之人, 必有餘□]: 『주역』「坤卦」에는 ‘선(善)을 쌓은 집에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는 말이 있다.</ref> 뒷날 자손이 번성[麟趾]<ref>인지(麟趾): 『시경』「周南」. 文王의 后妃가 仁厚하여, 그 자손이 번성하기를 빈 것임.</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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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기쁨은 반드시 여기에 그치지 않을 것이고 백년을 기한하여 그 복을 누릴 것이다” 라 하였는데, 뜻하지 않게 하나의 질병에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오호 통재라.
  
|해석문4=그대의 일을 생각하면 말하기도 비참하도다. 7년 안에 큰 상[巨愴]을 계속해서 당해9) 衰麻服을 벗기도 전에 갑자기 멀리 가버리니 이 세상에 태어나서 즐거워했던 것이 무엇과 같겠는가! 말문이 막히고 마음이 아프다. 평소 조심해서 오직 외진 곳에 조용히 있으면서 명예와 이익[名利]의 영욕을 원하지 않고 항상 일찍이 自劃[분수에 맞게 절제하는 것]하는 것을 내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이미 그 작위[소훈]을 받고 집에 자녀가 있어서는 결코 그대로 궁궐 밖 집[外第]에 있을 수 없어서 부득이 그대로 하여금 궐내에 들어와 살게 하였다. 禁中은 번거롭고 어지러운 장소이니 그대의 평소 마음에 맞지 않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매번 스스로 두려워하여 갈수록 더욱 불편해하다가 끝내 깊은 병으로 고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으니 누구의 허물이겠는가! 실로 나의 탓이로다. 후회한들 어디에 미치겠는가! 오호라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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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문4=그대의 일을 생각하면 말하기도 비참하도다. 7년 안에 큰 상[巨愴]을 계속해서 당해<ref>7년 안에……계속해서 당해: 모친 숙빈최씨(1670~1718), 장녀 和憶翁主(1717~1718, 정빈이씨 소생), 경종비 단의왕후(1686~1718), 이복동생 연령군(1699~1719, 명빈 박씨 소생), 숙종(1674~1720) 등 5명의 상장례를 치렀다.</ref> 衰麻服을 벗기도 전에 갑자기 멀리 가버리니 이 세상에 태어나서 즐거워했던 것이 무엇과 같겠는가! 말문이 막히고 마음이 아프다. 평소 조심해서 오직 외진 곳에 조용히 있으면서 명예와 이익[名利]의 영욕을 원하지 않고 항상 일찍이 自劃[분수에 맞게 절제하는 것]하는 것을 내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이미 그 작위[소훈]을 받고 집에 자녀가 있어서는 결코 그대로 궁궐 밖 집[外第]에 있을 수 없어서 부득이 그대로 하여금 궐내에 들어와 살게 하였다. 禁中은 번거롭고 어지러운 장소이니 그대의 평소 마음에 맞지 않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매번 스스로 두려워하여 갈수록 더욱 불편해하다가 끝내 깊은 병으로 고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으니 누구의 허물이겠는가! 실로 나의 탓이로다. 후회한들 어디에 미치겠는가! 오호라 아프다.
  
|해석문5=아침에는 나를 대면하여 말을 하였는데 저녁에는 병이 심하여 말하지 못하였으니 그 날 광경[景象]의 참혹함을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 이것이 곧 운명인가? 운명이 아닌가? 운명이라고 말한다면 방년 스물여덟이 어찌 청춘이 아니겠으며, 운명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착한 이에게 복을 주고 간사한 이에게 화를 내리는 이치는10) 과연 어디에 있는가? 비록 나에게 생각이 미치지 않더라도 유독 젖먹이 두 아이11)에게는 생각이 미치지 않는가? 만복[효장세자]이가 어미를 부른다면 아무리 철석같은 심장이라도 어찌 찢어지지 않겠는가? 오호라. 통재라. 오호 통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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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문5=아침에는 나를 대면하여 말을 하였는데 저녁에는 병이 심하여 말하지 못하였으니 그 날 광경[景象]의 참혹함을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 이것이 곧 운명인가? 운명이 아닌가? 운명이라고 말한다면 방년 스물여덟이 어찌 청춘이 아니겠으며, 운명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착한 이에게 복을 주고 간사한 이에게 화를 내리는 이치는<ref>착한 이에게……내리는 이치는: 사마천 『사기』“福善禍淫 是眞得嗎”</ref> 과연 어디에 있는가? 비록 나에게 생각이 미치지 않더라도 유독 젖먹이 두 아이<ref>젖먹이 두 아이: 1남 2녀를 낳았으나, 장녀 和憶翁主(1717~1718)는 요절하였으므로, 당시 1719년(숙종 45)에 태어난 효장세자와 1720년(숙종 46)에 태어난 화순옹주만을 두고 있었다.</ref>에게는 생각이 미치지 않는가? 만복[효장세자]이가 어미를 부른다면 아무리 철석같은 심장이라도 어찌 찢어지지 않겠는가? 오호라. 통재라. 오호 통재라.
  
|해석문6=다른 날에 두 아이가 장성하여 만약 생모를 묻는다면 내가 장차 무슨 말로 답하겠는가? 말과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오장을 도려내는 듯하다. 내 마음이 이와 같은데, 그대의 정회는 어찌 말하겠는가? 옛날을 생각해 보면 문득 꿈을 꾼 것 같으니, 진실인가. 거짓인가. 아득하여 깨워나질 못한다. 임종할 때에 영결하지 못하고 염습할 때에 보지 못하였으니 이 한이 맺혀 있어 죽어서도 눈을 감기 어렵다. 서쪽으로 옛 집을 바라보니12) 눈물이 물 흐르듯 하다. 돌아가서 대궁[숙빈 최씨]을 뵈옵거든13) 나의 안부를 아뢸 때 만약 오늘의 큰 한을 안다면 심회를 대략 말하고 대궁께 대신 고하도록 하겠다. 하지만 이것은 진실로 몽매하여 마음대로 하지 못하니 이 역시 내가 죽을 때까지의 한이다. 오호 통재라. 오호 통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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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문6=다른 날에 두 아이가 장성하여 만약 생모를 묻는다면 내가 장차 무슨 말로 답하겠는가? 말과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오장을 도려내는 듯하다. 내 마음이 이와 같은데, 그대의 정회는 어찌 말하겠는가? 옛날을 생각해 보면 문득 꿈을 꾼 것 같으니, 진실인가. 거짓인가. 아득하여 깨워나질 못한다. 임종할 때에 영결하지 못하고 염습할 때에 보지 못하였으니 이 한이 맺혀 있어 죽어서도 눈을 감기 어렵다. 서쪽으로 옛 집을 바라보니<ref>서쪽으로 옛집을 바라보니: 1724년(영조 즉위) 8월 창덕궁 인정전에서 즉위한 영조는 연잉군 시절에 彰義宮에서 살았다. 창의궁은 한성부 북부 順化坊에 위치한 자신의 잠저로, 오늘날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의동 35번지 및 그 부근이다. 이곳은 창덕궁에서 보면, 서쪽에 위치하였다.</ref> 눈물이 물 흐르듯 하다. 돌아가서 대궁[숙빈 최씨]을 뵈옵거든<ref>돌아가서 대궁을 뵈옵거든: 정빈이씨의 무덤[綏吉園]은 양주 高嶺洞 瓮場里[현재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있는데, 숙빈 최씨의 무덤[昭寧園] 옆에 위치한다. 여기에서 大宮은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 자신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를 가리킨다.</ref> 나의 안부를 아뢸 때 만약 오늘의 큰 한을 안다면 심회를 대략 말하고 대궁께 대신 고하도록 하겠다. 하지만 이것은 진실로 몽매하여 마음대로 하지 못하니 이 역시 내가 죽을 때까지의 한이다. 오호 통재라. 오호 통재라.
  
 
|해석문7=상장의 도구들을 후회가 없도록 극진히 하여 내 평생의 정을 폈으니 영령은 지각이 있거든 이미 나의 마음을 감응할 것이다. 옛날에 내가 점지해둔 묘지[宅兆]는 이제 그대가 묻힐 무덤이 되었다. 세상 모든 일이 진실로 예측하기 어려워서 그대가 이미 이와 같은데 내 살 날을 어찌 믿겠는가! 평소 생활을 회상해 보면 나의 마음은 어떠하며, 물건을 접촉할 때마다 감정을 손상시키니 나의 정회가 어떠하겠는가? 이 삶은 끝났으니, 가는 것이 애통하다. 저승과 이승이 영원이 갈라져 소식이 서로 통하기가 어렵고, 소리를 머금고 슬퍼하니 눈물이 흐르는 시내를 이루었으며, 슬픔을 품고 제문을 지으니 목메어 차마 못 짓겠네. 촛불 아래에서 붓을 적시니 글자가 제대로 써지지 못하였다. 오호통재라. 오호통재라.
 
|해석문7=상장의 도구들을 후회가 없도록 극진히 하여 내 평생의 정을 폈으니 영령은 지각이 있거든 이미 나의 마음을 감응할 것이다. 옛날에 내가 점지해둔 묘지[宅兆]는 이제 그대가 묻힐 무덤이 되었다. 세상 모든 일이 진실로 예측하기 어려워서 그대가 이미 이와 같은데 내 살 날을 어찌 믿겠는가! 평소 생활을 회상해 보면 나의 마음은 어떠하며, 물건을 접촉할 때마다 감정을 손상시키니 나의 정회가 어떠하겠는가? 이 삶은 끝났으니, 가는 것이 애통하다. 저승과 이승이 영원이 갈라져 소식이 서로 통하기가 어렵고, 소리를 머금고 슬퍼하니 눈물이 흐르는 시내를 이루었으며, 슬픔을 품고 제문을 지으니 목메어 차마 못 짓겠네. 촛불 아래에서 붓을 적시니 글자가 제대로 써지지 못하였다. 오호통재라. 오호통재라.
  
|해석문8=영혼이여! 멀리 가지 않았으면, 이 슬픈 정을 살펴다오. 아! 나의 도가 다하도다!14) 내가 이 사람이 아니면 누구를 위해서 통곡하겠는가!15) 온화한 말과 낭낭한 소리를 어느 날에 다시 듣고, 온화한 얼굴과 부드러운 낯빛을 어느 때에 다시 보겠는가? 매사 슬픔이 더해지고 물건마다 마음이 상하니 바야흐로 함께 살면서 해로하고자 했는데 어찌하여 합하였다가는 다시 이별하게 되었는가! 날마다 더욱 애달파서 이 정을 억제하기 어렵구나. 죽은 후에 의탁할 곳이 있으니 밝은 혼령에 의지할 것이다. 길택을 정하였으니 나의 마음이 위로된다. 이에 여관을 보내어 泂酌16)을 대신 드리게 하니 영혼은 아느냐? 영혼은 아느냐? 지금 내 이 글은 나의 심곡[간절하고 애틋한 마음]을 하소연하는 것이니 어찌 차마 글을 꾸미고 지나치게 칭찬하여 평소 삼가고 경계하는 마음을 저버리겠는가! 발인할 시기가 임박하면 다시 대신 잔을 올리게 할 것이다. 영혼이 반드시 어둡지 않다면 나의 정성을 헤아릴 것이다. 오호 통재라. 오호 통재라. 흠향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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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문8=영혼이여! 멀리 가지 않았으면, 이 슬픈 정을 살펴다오. 아! 나의 도가 다하도다!<ref>나의 도가 다하였노라[吾道之窮]: 魯 哀公 14년 봄에 공자가 聖王의 상서인 기린이 난세에 잘못 나와 잡혀 죽은 것을 보고 이에 몹시 傷心한 나머지 흐르는 눈물을 옷소매로 닦으면서 이르기를, “나의 도가 곤궁하도다[吾道窮矣].”라고 하고, 마침내『春秋』를 지으면서 “14년 봄에 서쪽으로 순수하여 기린을 얻다[十有四年春,西狩獲麟].”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春秋公羊傳』哀公 14年).</ref> 내가 이 사람이 아니면 누구를 위해서 통곡하겠는가!<ref>내가 이……위해서 통곡하는가[非夫人之慟]: 공자가 안연의 죽음을 두고 매우 슬퍼하여 모시던 자가 슬픔이지나침을 말하자, 공자가 “이런 사람을 위해서 애통해 하지 않는다면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하겠는가[非夫人之爲慟而誰爲].”라 하였다(『논어』「先進」).</ref> 온화한 말과 낭낭한 소리를 어느 날에 다시 듣고, 온화한 얼굴과 부드러운 낯빛을 어느 때에 다시 보겠는가? 매사 슬픔이 더해지고 물건마다 마음이 상하니 바야흐로 함께 살면서 해로하고자 했는데 어찌하여 합하였다가는 다시 이별하게 되었는가! 날마다 더욱 애달파서 이 정을 억제하기 어렵구나. 죽은 후에 의탁할 곳이 있으니 밝은 혼령에 의지할 것이다. 길택을 정하였으니 나의 마음이 위로된다. 이에 여관을 보내어 泂酌<ref>泂酌: 『시경』「大雅」生民之什 형작장(洞酌章)임. 멀리서 물을 떠와서 큰 그릇에 붓고 다시 그것을 작은그릇에 옮겨 부은 다음, 그것으로 제수용 음식이나 술을 빚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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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대신 드리게 하니 영혼은 아느냐? 영혼은 아느냐? 지금 내 이 글은 나의 심곡[간절하고 애틋한 마음]을 하소연하는 것이니 어찌 차마 글을 꾸미고 지나치게 칭찬하여 평소 삼가고 경계하는 마음을 저버리겠는가! 발인할 시기가 임박하면 다시 대신 잔을 올리게 할 것이다. 영혼이 반드시 어둡지 않다면 나의 정성을 헤아릴 것이다. 오호 통재라. 오호 통재라. 흠향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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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1일 (화) 21:37 기준 최신판

Pici.png

본 기사의 해독문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2016년에 개최한 특별전 '한글, 소통과 배려의 문자(2016.6.29~12.31)'도록 228-229쪽을 참고 활용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원문 중 옛 한글의 경우 웹브라우저 및 시스템의 문자세트(character set) 표현상 한계로 인해 표시가 불완전할 수 있으며, 각 내용상의 사소한 교정은 별도의 언급 없이 적용하였습니다.


한글팀 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소지 01 표지.jpg


원문 해석문
維歲次辛丑 十一月庚子朔 十九日丙午

[대두]王世弟遣尙宮李氏, 以淸酌庶羞, 哀奠于[대두]昭訓李氏靈柩之前曰, 嗚呼哀哉 世間豈無哀慽之痛, 而豈有余今日所遭之事乎 嗚呼, 以婉順之性, 柔雅之質, 生自良家, 蚤歲入宮, 爾之選入也. 余亦年幼, 旣自幼時, 其所處身, 盡有規度, 寔余所以暗嘆者也. 至於身居小室, 翼翼小心, 夙宵敬謹, 余有過焉, 輒必窺諫, 余嘗悔悟而改之者, 是豈引愛而然哉 誠服善心而然也. 名雖男女, 意則朋友, 知余心者, 爾也. 知爾心者, 余也. 慶毓閨中, 螽斯詵詵, 余嘗曰, 積善之人, 必有餘□, 日後獜趾 振振之喜, 必不止此, 百年爲期, 以享其福, 不意一疾, 奚至此境 嗚呼痛哉

念爾之事, 言亦慘矣. 七年之內, 連遭巨愴, 衰麻未解, 遽以長逝, 生於斯世, 爲樂奚似, 言之塞矣, 思之痛矣. 平日操心, 惟以靜在僻處, 不願名利之榮辱, 常嘗自劃者, 余豈不知, 而旣受其爵, 堂有子女, 則決不可仍在外第, 不得已使之入處闕內, 禁中繁擾之地, 非爾素心, 故每自恐懼, 轉益不便, 終至於沈疴難醫之境, 是誰□咎, 實余之致也. 追悔何及 嗚呼痛矣.

朝則對余而言, 夕則沈潛而不語, 伊日景象之慘切, 豈忍言哉 豈忍言哉 是乃命耶, 非命耶 謂以命也, 則芳年卄八, 豈非靑春, 謂以非命也, 則福善禍淫之理, 果安在哉 雖不念及於余, 獨不念及於乳下兩兒乎 萬福之呼母, 雖鐵石心腸, 豈不摧裂耶 嗚呼痛哉 嗚呼痛哉

他日, 兩兒長成, 若問生母, 余將何語答之耶 言念及此, 五內如割, 余心如此, 爾懷何言 追惟疇昔, 便成一夢, 眞乎非乎 惝怳未醒, 臨終未訣, 襲斂未視, 此恨耿結, 死難䏃目, 西望故第, 涕淚如瀉, 歸見[대두]大宮, 白余平否 若知大恨之今日, 則略攄心懷, 替告[대두]大宮, 而此誠夢昧不得如心, 是亦余終天之恨也. 嗚呼痛哉 嗚呼痛哉

喪葬諸具, 盡其無憾, 叙余生平之情, 〔격〕英靈有知, 庶感余意, 昔日余所占宅兆, 今作爾永窆之地, 世間凡事, 誠難測知, 爾旣如此, 余年奚恃, 像想平昔, 余心伊何, 觸物傷感, 我懷如何 已乎此生, 慟矣其往, 幽明永隔, 音信難通, 聲呑一哀, 淚制流泉, 含悲製文, 咽不忍成, 燭下濡筆, 字未能精. 嗚呼痛哉 嗚呼痛哉

魂兮未遠, 鑒此哀情, 嗟吾道之窮, 非夫人之慟, 溫言朗聲, 何日復聞, 和容柔色, 奚時更見耶 事事增悲, 物物傷心, 方欲同居而偕老, 奈何旣合而復分, 日益傷悼, 此情難抑, 身後有托, 昭靈可倚, 吉宅有占, 余心可慰, 玆遣女官, 替奠泂酌, 靈有知乎 靈有知乎 今余此文, 訴余心曲, 豈忍飾辭過讚, 以負平日謹敕之心哉 靷期將臨, 更當替奠, 靈必不昧, 歆格余誠.

嗚呼痛哉 嗚呼痛哉 尙[대두]饗.
유셰신튝 십일월경삭 십구일병오 유세차 신축(1721, 경종 1) 11월 경자 삭 19일 병오
[대두]왕셰졔견샹궁니시. 이쳥쟉셰슈 젼우.[대두]쇼훈니시녕구디젼왈. 오호통. 셰간.긔무쳑지통이. 긔유여금일소조지호. 오호. 이완슌지셩. 유아지질. 냥가. 조셰입궁. 이지션입야. 여역년유. 긔유시. 기소쳐신. 딘유규도. 식여소이암탄쟈야. 디어.신거쇼실. 익익쇼심. 슉쇼경근. 여유과언. 쳡필규간. 여샹회오이지쟈. 시긔.인이연. 셩복.션심이연야. 명슈남녀. 의즉붕우. 디여심쟈. 이야. 디이심쟈. 여야. 경육규즁. 둉선선. 여샹왈. 젹션지인. 필유여경. 일후.닌지 딘딘지희. 필블디. 년위긔. 이향기복. 블의일질. 지경. 오호통. 왕세제가 상궁 이씨를 보내고 술과 여러 가지 음식[淸酌庶羞]을 가지고 소훈이씨의 영구 앞에서 전을 올리고 말합니다. 오호 애재라. 세상에 어찌 애통한 아픔이 없겠으리오마는 어찌 내가 오늘 당한 일과 같은 것이 있겠는가! 오호라! 婉順한 성품과 우아한 기질을 가지고 양가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蚤歲]에 입궁하였다.[1] 그대가 뽑혀 들어 왔을 때에 나 또한 나이가 어렸다.[2]이미 어렸을 때부터 처신하는 바가 규범과 법도[規度]가 있었으니 진실로 내가 남몰래 탄복한 바이다. 몸이 소실[첩]에 있을 때에[3] 조심조심하여[翼翼小心] 아침저녁으로 공경하고 삼가 하였다. 내가 허물이 있으면 문득 반드시 엿보고서 간하였는데, 내가 항상 뉘우쳐 그것(허물)을 고친 것이 어찌 사랑에 이끌려서 그런 것이겠는가! 선량한 마음에 지성으로 감복하여 그런 것이다. 명분은 비록 남자와 여자이지만 생각은 친구사이여서 나의 마음을 아는 자는 그대요 그대의 마음을 아는 자는 나였다. 규중에서 경사스럽게 자식을 낳아 길러 자손이 번성하였으니[4] 내가 일찍이 “선을 쌓은 사람은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으리니[5] 뒷날 자손이 번성[麟趾][6] 하는 기쁨은 반드시 여기에 그치지 않을 것이고 백년을 기한하여 그 복을 누릴 것이다” 라 하였는데, 뜻하지 않게 하나의 질병에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오호 통재라.
념이지. 언역참의. 칠년지. 년조거창. 최마미. 거이쟝셔. 어셰. 위낙. 언지의. 지통의. 평일조심. 유이.졍벽쳐. 블원.명니지영욕. 샹샹획쟈. 여긔부디 이.긔슈기쟉. 당유.녀즉. 결블가인.외졔. 부득이..지입쳐궐.. 금즁번요지디. 비이소심. 고.공구. 젼익블편. 둉지어침아난 의지경. 시슈지구. 실여지티야. 츄회하급. 오호통의. 그대의 일을 생각하면 말하기도 비참하도다. 7년 안에 큰 상[巨愴]을 계속해서 당해[7] 衰麻服을 벗기도 전에 갑자기 멀리 가버리니 이 세상에 태어나서 즐거워했던 것이 무엇과 같겠는가! 말문이 막히고 마음이 아프다. 평소 조심해서 오직 외진 곳에 조용히 있으면서 명예와 이익[名利]의 영욕을 원하지 않고 항상 일찍이 自劃[분수에 맞게 절제하는 것]하는 것을 내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이미 그 작위[소훈]을 받고 집에 자녀가 있어서는 결코 그대로 궁궐 밖 집[外第]에 있을 수 없어서 부득이 그대로 하여금 궐내에 들어와 살게 하였다. 禁中은 번거롭고 어지러운 장소이니 그대의 평소 마음에 맞지 않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매번 스스로 두려워하여 갈수록 더욱 불편해하다가 끝내 깊은 병으로 고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으니 누구의 허물이겠는가! 실로 나의 탓이로다. 후회한들 어디에 미치겠는가! 오호라 아프다.
됴즉여이언. 셕즉.침이블어. 이일.경샹지참졀. 긔인언. 긔인언. 시내명야. 비명야. 위이명야즉. 방년습팔. 긔비쳥츈. 우이비명야즉. 복셩화음지니. 과안. 슈블념급어여. 독블념급어유하냥호. 만복지호모. 슈.쳘셕심쟝.긔블최녈야. 오호통. 오호통. 아침에는 나를 대면하여 말을 하였는데 저녁에는 병이 심하여 말하지 못하였으니 그 날 광경[景象]의 참혹함을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 이것이 곧 운명인가? 운명이 아닌가? 운명이라고 말한다면 방년 스물여덟이 어찌 청춘이 아니겠으며, 운명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착한 이에게 복을 주고 간사한 이에게 화를 내리는 이치는[8] 과연 어디에 있는가? 비록 나에게 생각이 미치지 않더라도 유독 젖먹이 두 아이[9]에게는 생각이 미치지 않는가? 만복[효장세자]이가 어미를 부른다면 아무리 철석같은 심장이라도 어찌 찢어지지 않겠는가? 오호라. 통재라. 오호 통재라.
타일. 냥쟝셩. 약문모. 여쟝하어답지야. 언념급. 오여할. 여심여. 이회하언. 츄유듀셕. □□□□ □□□□ 당황미셩. 님둉미결. 습념미시. 경결. 난명목 셔망고졔. 쳬누여샤. 구현[대두]대궁. 여평부. 약디.대지금일즉. 냑터심회. 쳬고[대두]대궁이.셩몽부득여심. 시역여.둉텬지야. 오호통. 오호통. 다른 날에 두 아이가 장성하여 만약 생모를 묻는다면 내가 장차 무슨 말로 답하겠는가? 말과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오장을 도려내는 듯하다. 내 마음이 이와 같은데, 그대의 정회는 어찌 말하겠는가? 옛날을 생각해 보면 문득 꿈을 꾼 것 같으니, 진실인가. 거짓인가. 아득하여 깨워나질 못한다. 임종할 때에 영결하지 못하고 염습할 때에 보지 못하였으니 이 한이 맺혀 있어 죽어서도 눈을 감기 어렵다. 서쪽으로 옛 집을 바라보니[10] 눈물이 물 흐르듯 하다. 돌아가서 대궁[숙빈 최씨]을 뵈옵거든[11] 나의 안부를 아뢸 때 만약 오늘의 큰 한을 안다면 심회를 대략 말하고 대궁께 대신 고하도록 하겠다. 하지만 이것은 진실로 몽매하여 마음대로 하지 못하니 이 역시 내가 죽을 때까지의 한이다. 오호 통재라. 오호 통재라.
상장졔구. 딘기무감. 셔여평지졍. 〔격〕영녕유디. 셔감여의. 셕일.여.소졈됴. 금작.이.영폄지디. 셰간범. 셩난측디. 이긔여. 여년시. 샹샹평셕. 여심이하. 쵹믈샹감. 아회여하. 이호. 통의기왕. 유명영격. 음신난통. 셩일. 누졔뉴텬. 함비졔문. 열블인셩. 쵹하유필. 미능졍. 오호통. 오호통. 상장의 도구들을 후회가 없도록 극진히 하여 내 평생의 정을 폈으니 영령은 지각이 있거든 이미 나의 마음을 감응할 것이다. 옛날에 내가 점지해둔 묘지[宅兆]는 이제 그대가 묻힐 무덤이 되었다. 세상 모든 일이 진실로 예측하기 어려워서 그대가 이미 이와 같은데 내 살 날을 어찌 믿겠는가! 평소 생활을 회상해 보면 나의 마음은 어떠하며, 물건을 접촉할 때마다 감정을 손상시키니 나의 정회가 어떠하겠는가? 이 삶은 끝났으니, 가는 것이 애통하다. 저승과 이승이 영원이 갈라져 소식이 서로 통하기가 어렵고, 소리를 머금고 슬퍼하니 눈물이 흐르는 시내를 이루었으며, 슬픔을 품고 제문을 지으니 목메어 차마 못 짓겠네. 촛불 아래에서 붓을 적시니 글자가 제대로 써지지 못하였다. 오호통재라. 오호통재라.
혼혜미원. 감졍. 차.오도지궁. 비.부인지통. 온언낭셩. 하일부문. 화용유. 시견야. 증비. 믈믈샹심. 방욕동거이노. 내하긔합이부분. 일익샹도. 졍난억. 신후유탁.[격] 쇼녕가의. 길유졈. 여심가위. 견녀관. 쳬젼형쟉. 녕유디호. 녕유디호. 금여문. 소여심곡. 긔인.식과찬. 이부.평일근칙지심. 인긔쟝님. 당쳬젼. 녕필블. 흠격여셩. 오호통. 오호통. 샹[대두]향. 영혼이여! 멀리 가지 않았으면, 이 슬픈 정을 살펴다오. 아! 나의 도가 다하도다![12] 내가 이 사람이 아니면 누구를 위해서 통곡하겠는가![13] 온화한 말과 낭낭한 소리를 어느 날에 다시 듣고, 온화한 얼굴과 부드러운 낯빛을 어느 때에 다시 보겠는가? 매사 슬픔이 더해지고 물건마다 마음이 상하니 바야흐로 함께 살면서 해로하고자 했는데 어찌하여 합하였다가는 다시 이별하게 되었는가! 날마다 더욱 애달파서 이 정을 억제하기 어렵구나. 죽은 후에 의탁할 곳이 있으니 밝은 혼령에 의지할 것이다. 길택을 정하였으니 나의 마음이 위로된다. 이에 여관을 보내어 泂酌[14] 을 대신 드리게 하니 영혼은 아느냐? 영혼은 아느냐? 지금 내 이 글은 나의 심곡[간절하고 애틋한 마음]을 하소연하는 것이니 어찌 차마 글을 꾸미고 지나치게 칭찬하여 평소 삼가고 경계하는 마음을 저버리겠는가! 발인할 시기가 임박하면 다시 대신 잔을 올리게 할 것이다. 영혼이 반드시 어둡지 않다면 나의 정성을 헤아릴 것이다. 오호 통재라. 오호 통재라. 흠향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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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양가에서 태어나……나이에 입궁하였다: 1701년(숙종 27) 8세에 정식 궁인 선발에 응시하여 뽑혔는데(「有明朝鮮國靖嬪含城李氏墓誌」(장서각 소장 K2-3990), 양인 집안의 딸이 입궁한 것은 한미하고 쇠락한 집안 형편에 투탁한 것으로 추측된다.
  2. 그대가 뽑혀……왔을 때에: 정빈이씨가 아기나인이 된 해는 1701년(숙종 27)이므로, 당시 영조(1694~1776) 나이 8세였고 그녀와 동년배였다.
  3. 몸이 소실에 있을 때에: 1717년(숙종 43) 4월 22일 요절한 장녀 和憶翁主가 태어났음을 감안한다면, 적어도 1년 전 1716년(숙종 42) 23살 때에 승은을 입었을 것이다. 1721년(경종 1) 10월 3일, 세자궁 소속 종5품 昭訓에 봉작되기 전까지 사실상 왕자군의 첩이었다.
  4. 규중에서 경사스럽게……자손이 번성하였으니[慶毓閨中, 螽斯詵詵]: 『시경』「周南」“螽斯羽詵詵兮”
  5. 선을 쌓은……경사가 있으리니[積善之人, 必有餘□]: 『주역』「坤卦」에는 ‘선(善)을 쌓은 집에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는 말이 있다.
  6. 인지(麟趾): 『시경』「周南」. 文王의 后妃가 仁厚하여, 그 자손이 번성하기를 빈 것임.
  7. 7년 안에……계속해서 당해: 모친 숙빈최씨(1670~1718), 장녀 和憶翁主(1717~1718, 정빈이씨 소생), 경종비 단의왕후(1686~1718), 이복동생 연령군(1699~1719, 명빈 박씨 소생), 숙종(1674~1720) 등 5명의 상장례를 치렀다.
  8. 착한 이에게……내리는 이치는: 사마천 『사기』“福善禍淫 是眞得嗎”
  9. 젖먹이 두 아이: 1남 2녀를 낳았으나, 장녀 和憶翁主(1717~1718)는 요절하였으므로, 당시 1719년(숙종 45)에 태어난 효장세자와 1720년(숙종 46)에 태어난 화순옹주만을 두고 있었다.
  10. 서쪽으로 옛집을 바라보니: 1724년(영조 즉위) 8월 창덕궁 인정전에서 즉위한 영조는 연잉군 시절에 彰義宮에서 살았다. 창의궁은 한성부 북부 順化坊에 위치한 자신의 잠저로, 오늘날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의동 35번지 및 그 부근이다. 이곳은 창덕궁에서 보면, 서쪽에 위치하였다.
  11. 돌아가서 대궁을 뵈옵거든: 정빈이씨의 무덤[綏吉園]은 양주 高嶺洞 瓮場里[현재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있는데, 숙빈 최씨의 무덤[昭寧園] 옆에 위치한다. 여기에서 大宮은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 자신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를 가리킨다.
  12. 나의 도가 다하였노라[吾道之窮]: 魯 哀公 14년 봄에 공자가 聖王의 상서인 기린이 난세에 잘못 나와 잡혀 죽은 것을 보고 이에 몹시 傷心한 나머지 흐르는 눈물을 옷소매로 닦으면서 이르기를, “나의 도가 곤궁하도다[吾道窮矣].”라고 하고, 마침내『春秋』를 지으면서 “14년 봄에 서쪽으로 순수하여 기린을 얻다[十有四年春,西狩獲麟].”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春秋公羊傳』哀公 14年).
  13. 내가 이……위해서 통곡하는가[非夫人之慟]: 공자가 안연의 죽음을 두고 매우 슬퍼하여 모시던 자가 슬픔이지나침을 말하자, 공자가 “이런 사람을 위해서 애통해 하지 않는다면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하겠는가[非夫人之爲慟而誰爲].”라 하였다(『논어』「先進」).
  14. 泂酌: 『시경』「大雅」生民之什 형작장(洞酌章)임. 멀리서 물을 떠와서 큰 그릇에 붓고 다시 그것을 작은그릇에 옮겨 부은 다음, 그것으로 제수용 음식이나 술을 빚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