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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 | {{blockquote | ||
|대각국사(大覺國師)가 송에 유학하여 화엄의(華嚴義)를 전수받고,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배웠다. 철종(哲宗)의 원우(元祐) 원년(元年) 병인(丙寅)에 돌아왔는데 지자(智者)를 존숭하여 따로 종파를 세웠다. 이때 총림납자 가운데 천태종에 경도된 자가 10에 6, 7이나 되었다. 국사는 조사의 도가 쇠락해진 것을 슬퍼하여, 확고하게 홀로 세우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대각국사가 사람을 보내 여러 차례 권유하였으나, 끝내 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중략… 우리 숙종(肅宗) 4년이며, 송 소성(紹聖) 5년 무인(戊寅)에 대각국사가 홍원사(弘圓寺)에서 원각경(圓覺經) 법회를 열고 국사를 부강(副講)으로 삼았으나, 국사가 사양하여 말하기를, "선(禪)과 강(講)이 서로 함부로 하는 것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고 다만 참석하여 …(결락)… 청강할 뿐이었다. | |대각국사(大覺國師)가 송에 유학하여 화엄의(華嚴義)를 전수받고,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배웠다. 철종(哲宗)의 원우(元祐) 원년(元年) 병인(丙寅)에 돌아왔는데 지자(智者)를 존숭하여 따로 종파를 세웠다. 이때 총림납자 가운데 천태종에 경도된 자가 10에 6, 7이나 되었다. 국사는 조사의 도가 쇠락해진 것을 슬퍼하여, 확고하게 홀로 세우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대각국사가 사람을 보내 여러 차례 권유하였으나, 끝내 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중략… 우리 숙종(肅宗) 4년이며, 송 소성(紹聖) 5년 무인(戊寅)에 대각국사가 홍원사(弘圓寺)에서 원각경(圓覺經) 법회를 열고 국사를 부강(副講)으로 삼았으나, 국사가 사양하여 말하기를, "선(禪)과 강(講)이 서로 함부로 하는 것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고 다만 참석하여 …(결락)… 청강할 뿐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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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고려 숙종|숙종]]의 네번째 아들이자 [[의천]]의 제자인 [[징엄|원명국사 징엄(圓明國師 澄儼)]]이 9살 때 병이 나자, [[의천]]은 [[학일]]에게 도움을 청하였는데, [[학일]]이 대반야(大般若)를 염(念)하자 왕자가 살아났고, 이에 [[의천]]은 더욱 존경하였으며, [[고려 숙종|숙종]]의 명에 의해 [[학일]]은 [[보은 법주사|법주사(法住寺)]]의 주지가 되었다.<ref>김상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 학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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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석자 가운데 왕자가 있었는데 나이가 9세였고, 곧 지금의 원명국사(圓明國師)이다. 어느 날 갑자기 죽어 온기가 모두 끊어졌다. 모인 사람들이 당황하여 구명할 방법을 알지 못하였다. 대각국사가 구해줄 것을 국사에게 청하니, 국사가 조용히 대반야(大般若)를 염송하였고 얼마 후에 왕자가 소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대각국사가 공경하는 마음이 더해졌다. 왕이 국사의 일을 자세히 듣고 …(결락)… 법주사(法住寺)에 머물도록 하였다. | |참석자 가운데 왕자가 있었는데 나이가 9세였고, 곧 지금의 원명국사(圓明國師)이다. 어느 날 갑자기 죽어 온기가 모두 끊어졌다. 모인 사람들이 당황하여 구명할 방법을 알지 못하였다. 대각국사가 구해줄 것을 국사에게 청하니, 국사가 조용히 대반야(大般若)를 염송하였고 얼마 후에 왕자가 소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대각국사가 공경하는 마음이 더해졌다. 왕이 국사의 일을 자세히 듣고 …(결락)… 법주사(法住寺)에 머물도록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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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일]]은 1106년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어 [[가지사|가지사(迦智寺)]]에 주석하였고, 다시 [[개성 귀산사|귀산사(龜山寺)]]로 옮겨 갔다. 1108년 선사(禪師)가 되었으며, 1113년 [[개성 내제석원|내제석원(內帝釋院)]]에 주석하였다. 1114년 대선사(大禪師)가 되었으며, 1117년 [[개성 안화사|안화사(安和寺)]]에 주석하였다. | + | [[학일]]은 1106년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어 [[가지사|가지사(迦智寺)]]에 주석하였고, 다시 [[개성 귀산사|귀산사(龜山寺)]]로 옮겨 갔다. 1108년 [[선사|선사(禪師)]]가 되었으며, 1113년 [[개성 내제석원|내제석원(內帝釋院)]]에 주석하였다. 1114년 대선사(大禪師)가 되었으며, 1117년 [[개성 안화사|안화사(安和寺)]]에 주석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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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예종(睿宗) 원년이며 송 숭녕(崇寧) 4년에 삼중대사(三重大師)를 더해주고 가지사(迦智寺)에 머물도록 하였다. 몇 달 지나지 않아 귀산사(龜山寺)로 옮겨 머물렀다. 송 도군(道君) 대관(大觀) 2년 무자(戊子)에 선사(禪師)를 더해 주었고, 정화(政和) 3년 계사(癸巳)에 내제석원(內帝釋院)에 머물렀다. 4년 갑오(甲午)에 대선사(大禪師)를 더하였고 7년 정유(丁酉)에 안화사(安和寺)에 머물렀다. | |우리 예종(睿宗) 원년이며 송 숭녕(崇寧) 4년에 삼중대사(三重大師)를 더해주고 가지사(迦智寺)에 머물도록 하였다. 몇 달 지나지 않아 귀산사(龜山寺)로 옮겨 머물렀다. 송 도군(道君) 대관(大觀) 2년 무자(戊子)에 선사(禪師)를 더해 주었고, 정화(政和) 3년 계사(癸巳)에 내제석원(內帝釋院)에 머물렀다. 4년 갑오(甲午)에 대선사(大禪師)를 더하였고 7년 정유(丁酉)에 안화사(安和寺)에 머물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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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22년 | + | 1122년 [[고려 예종|예종]]이 [[학일]]을 [[왕사|왕사(王師)]]로 삼으려 하였으나 사양하였다. [[고려 예종|예종]]이 죽고 [[고려 인종|인종]]이 즉위한 뒤에야 명경전(明慶殿)에서 제자의 예를 행하고 [[왕사]]로 책봉되었다.<ref>이종문, "[http://cheongdo.grandculture.net/Contents?local=cheongdo&dataType=99&contents_id=GC05501066 학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청도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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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 4년에 …(결락)… 왕이 병으로 인하여 국사를 내전(內殿)으로 초빙하여 절하고 왕사(王師)로 삼고자 하였으나, 국사가 굳게 사양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중(侍中) 김인존(金仁存) 등이 국사에게 이르기를, "임금께서 신하로 대하는 예로 하지 않고 국사를 섬긴지 이미 오래인데, 국사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하므로, 국사가 어쩔 수 없이 왕명을 받아들였다. 이에 왕이 곧 국사에게 절하였으나, 책봉의 의식을 행하지 못하고 왕이 승하하였다. 4월 …(결락)… 인종이 즉위하여 선왕의 뜻에 따라 7월 7일에 중사(中使)를 보내 편지로써 뜻을 전달하고, 다음 날에도 똑같이 하였다. 국사가 장계(狀啓)를 갖추어 사양하였으나 두세 차례 사신이 이르니, 12일에 예의를 갖추어 왕사로 책봉되었다. 16일에 왕이 명경전(明慶殿)에 행차하여 제자의 예를 펴고, 백관들이 절하여 하례하였다. | |선화 4년에 …(결락)… 왕이 병으로 인하여 국사를 내전(內殿)으로 초빙하여 절하고 왕사(王師)로 삼고자 하였으나, 국사가 굳게 사양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중(侍中) 김인존(金仁存) 등이 국사에게 이르기를, "임금께서 신하로 대하는 예로 하지 않고 국사를 섬긴지 이미 오래인데, 국사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하므로, 국사가 어쩔 수 없이 왕명을 받아들였다. 이에 왕이 곧 국사에게 절하였으나, 책봉의 의식을 행하지 못하고 왕이 승하하였다. 4월 …(결락)… 인종이 즉위하여 선왕의 뜻에 따라 7월 7일에 중사(中使)를 보내 편지로써 뜻을 전달하고, 다음 날에도 똑같이 하였다. 국사가 장계(狀啓)를 갖추어 사양하였으나 두세 차례 사신이 이르니, 12일에 예의를 갖추어 왕사로 책봉되었다. 16일에 왕이 명경전(明慶殿)에 행차하여 제자의 예를 펴고, 백관들이 절하여 하례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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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26년 [[학일]]은 [[청도 운문사|운문사(雲門寺)]]로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나, | + | 1126년 [[학일]]은 [[청도 운문사|운문사(雲門寺)]]로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나, [[고려 인종|인종]]은 이를 허락하는 대신 도성과 가까운 안남(安南) 경암사(瓊嵒寺)에 머물면서 왕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학일]]은 재차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며, 마침내 1129년 9월 19일 [[왕사|왕사(王師)]]의 직인(職印)을 반납하고 몰래 경암사를 출발하여 1129년 10월 19일 [[청도 운문사|운문사]]로 들어갔다. 인종은 소식을 듣자마자 신하를 통해 친서(親書)를 전달하고 [[왕사]]의 직인을 돌려보냈으며, [[학일]]의 가는 길을 살피도록 명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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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大金)의 천회(天會) 4년 병오(丙午)에 운문사(雲門寺)로 물러날 것을 청했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고 이르기를, "안남(安南) 경암사(瓊嵒寺)는 서울과 거리가 멀지 않으므로 국사가 주지를 겸하여 스스로 왕래하기에 편하도록 허락한다"라고 하였다. 6년에 …(결락)… 경암사로 돌아가서 차자(箚子)를 올려 다시 물러날 것을 청하였는데 그 뜻이 매우 굳었다. 왕이 편지를 보내 만류하여 이르기를, "짐이 근래에 내변(內變)을 만나거나 어린 아이가 상하였을 때에 국사의 도력에 힘입어 편안함을 얻었는데, 지금 과인을 버리고 돌아가고자 하니, 장차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라 하였다. 국사가 이르기를, "왕의 뜻이 간절하니 갑자기 떠날 수 없습니다만, 산승이 세간을 탐하여 늙었으면서도 …(결락)…"라고 하였다. 7년 을유(乙酉) 9월 19일에 왕사의 직인과 편지를 봉하여 조정에 바치고, 몰래 경암사를 나와 광주(廣州)에 이르렀다. 왕이 소식을 듣고 내신(內臣) 유필(庾弼)을 보내어 간곡한 정성을 전하게 하였다. 또 좌우가(左右街)에 명하여 국사가 지나가는 주와 군은 혜조국사(慧照國師)가 하산할 때의 예에 따라 영송(迎送)하게 하고, 인보(印寶)를 돌려보냈다. | |대금(大金)의 천회(天會) 4년 병오(丙午)에 운문사(雲門寺)로 물러날 것을 청했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고 이르기를, "안남(安南) 경암사(瓊嵒寺)는 서울과 거리가 멀지 않으므로 국사가 주지를 겸하여 스스로 왕래하기에 편하도록 허락한다"라고 하였다. 6년에 …(결락)… 경암사로 돌아가서 차자(箚子)를 올려 다시 물러날 것을 청하였는데 그 뜻이 매우 굳었다. 왕이 편지를 보내 만류하여 이르기를, "짐이 근래에 내변(內變)을 만나거나 어린 아이가 상하였을 때에 국사의 도력에 힘입어 편안함을 얻었는데, 지금 과인을 버리고 돌아가고자 하니, 장차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라 하였다. 국사가 이르기를, "왕의 뜻이 간절하니 갑자기 떠날 수 없습니다만, 산승이 세간을 탐하여 늙었으면서도 …(결락)…"라고 하였다. 7년 을유(乙酉) 9월 19일에 왕사의 직인과 편지를 봉하여 조정에 바치고, 몰래 경암사를 나와 광주(廣州)에 이르렀다. 왕이 소식을 듣고 내신(內臣) 유필(庾弼)을 보내어 간곡한 정성을 전하게 하였다. 또 좌우가(左右街)에 명하여 국사가 지나가는 주와 군은 혜조국사(慧照國師)가 하산할 때의 예에 따라 영송(迎送)하게 하고, 인보(印寶)를 돌려보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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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45년 1월 24일 || 인종은 [[학일]]을 국사(國師)로 책봉하고 시호를 원응(圓應)이라 추증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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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 =='''시각자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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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참고문헌'''== | ||
+ | *김상영, 「고려시대 迦智山門의 전개 양상과 불교사적 위상」, 『불교연구』32, 한국불교연구원, 2010, 87-132쪽. | ||
*이지관,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 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260-297쪽. | *이지관,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 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260-297쪽. | ||
*조명제, "운문사 원응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4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5-23쪽. | *조명제, "운문사 원응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4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5-23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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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0일 (월) 23:47 기준 최신판
학일(學一) | |
대표명칭 | 학일 |
---|---|
한자 | 學一 |
생몰년 | 1052년(문종 6)-1144년(인종 22) |
시호 | 원응(圓應) |
자 | 봉거(逢渠) |
성씨 | 이씨(李氏) |
속명 | 학일(學一) |
출신지 | 충청북도 서원(西原) |
승탑비 |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 |
목차
정의
고려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학일은 1052년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 지방인 서원(西原)에서 출생하였다. 속성은 이씨(李氏)이고, 아버지는 이응첨(李應瞻)으로 관직에 진출하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이씨(李氏)였으며, 용이 집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을 하였다고 한다.
출가수행
학일은 1062년 11세에 출가하여 진장(眞藏)의 제자가 되었고, 1064년 13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혜함(惠含)의 문하에서 선지(禪旨)에 통달하였고, 경률론(經律論)에 대하여 깊이 연구했으며, 특히 『대반야경(大般若經)』에 박통하여 반야(般若) 삼매(三昧)의 경지에 도달했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의 질병까지 고쳐주었으므로 크게 존경을 받았다.[1] 1084년에는 광명사(廣明寺)에서 승과(僧科)에 급제하였다.
활동
1086년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이 송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천태종(天台宗)을 개창하자, 선종(禪宗)의 승려들 가운데 10명 중 6~7명은 천태종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학일은 의천의 수차례 요청에도 불구하고 선종의 승려로 남았다. 특히 1098년에 의천은 홍원사(弘圓寺)에서 원각경(圓覺經) 법회(法會)를 개최하여 학일을 법회의 부강(副講)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학일은 이를 사양하고 단지 청강만하였다.
숙종의 네번째 아들이자 의천의 제자인 원명국사 징엄(圓明國師 澄儼)이 9살 때 병이 나자, 의천은 학일에게 도움을 청하였는데, 학일이 대반야(大般若)를 염(念)하자 왕자가 살아났고, 이에 의천은 더욱 존경하였으며, 숙종의 명에 의해 학일은 법주사(法住寺)의 주지가 되었다.[2]
학일은 1106년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어 가지사(迦智寺)에 주석하였고, 다시 귀산사(龜山寺)로 옮겨 갔다. 1108년 선사(禪師)가 되었으며, 1113년 내제석원(內帝釋院)에 주석하였다. 1114년 대선사(大禪師)가 되었으며, 1117년 안화사(安和寺)에 주석하였다.
1122년 예종이 학일을 왕사(王師)로 삼으려 하였으나 사양하였다. 예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한 뒤에야 명경전(明慶殿)에서 제자의 예를 행하고 왕사로 책봉되었다.[3]
1123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지속되었는데, 이때 학일이 기도하여 비를 내렸다는 신이(神異)한 행적이 전해진다.
1126년 학일은 운문사(雲門寺)로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나, 인종은 이를 허락하는 대신 도성과 가까운 안남(安南) 경암사(瓊嵒寺)에 머물면서 왕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학일은 재차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며, 마침내 1129년 9월 19일 왕사(王師)의 직인(職印)을 반납하고 몰래 경암사를 출발하여 1129년 10월 19일 운문사로 들어갔다. 인종은 소식을 듣자마자 신하를 통해 친서(親書)를 전달하고 왕사의 직인을 돌려보냈으며, 학일의 가는 길을 살피도록 명하였다.
학일이 운문사(雲門寺)에 머물자, 수많은 학자들이 찾아들었다. 학자들에게 학일은 '자기를 밝히는 일을 급무(急務)'로 삼도록 가르쳤다. 운문사에 주석하는 동안에 왕으로부터 갖가지 물품을 비롯하여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며, 운문사를 중흥시키는 데 큰 몫을 하였다.[4]
1142년 산불이 크게 나 대중들이 총동원되었으나 끄지 못했는데, 학일이 산을 향해 축원하자 갑자기 비가 내려 불이 꺼졌다는 일화도 전한다.[5]
황통(皇統) 2년 임술(壬戌)2월 8일에 산불이 크게 일어났는데, 대중이 끄려 하였으나 불길을 잡지 못하였다. 국사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산을 향하여 기원하니 비가 내려 불이 꺼졌다. 그 후에도 이와 같은 일이 …(결락)…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 ||
출처: 조명제, "운문사 원응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4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8쪽. |
입적
학일은 1144년 10월 발병하여 입적에 이르렀으나, 신이(神異)한 행적을 보이며 스스로 입적을 늦추었다. 이후 11월에 다시 한번 병세를 보여 왕에게 올리는 유언장을 작성하였고, 12월 9일 임종게(臨終偈)를 설하고, 가부좌(跏趺坐)하며 단정히 앉아 입적하였다. 세속의 나이는 93세이며, 승랍은 82세였다.
학일이 입적하자, 인종은 1145년 1월 24일에 학일을 국사(國師)로 책봉하고 시호를 원응(圓應)이라 추증하였다. 학일의 문인들은 그의 행적을 기리는 비의 건립을 왕에게 청하였고. 윤언이(尹彦頤)가 왕명에 의하여 비문을 지었다.
지식관계망
- 원응국사 학일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 | 학일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A ekc:isSteleOf B |
학일 | 가지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학일 | 청도 운문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학일 | 보은 법주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학일 | 개성 귀신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학일 | 개성 내제석원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학일 | 개성 안화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학일 | 개성 광명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학일 | 의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학일 | 징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학일 | 왕사 | A의 유형은 B이다 | A dcterms:type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052년 | 학일이 출생하였다. |
1062년 | 학일이 11세의 나이로 출가하여, 진장(眞藏)의 제자가 되었다. |
1064년 | 학일이 13세의 나이에 구족계를 받았다. |
1084년 | 학일이 광명사(廣明寺)에서 승과(僧科)에 급제하였다. |
1098년 | 의천이 홍원사(弘圓寺)에서 원각경(圓覺經) 법회를 개최하자 학일이 청강하였다. |
1098년 | 학일이 징엄의 병을 고쳐주었다. |
1106년 | 학일이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어 가지사(迦智寺)에 주석하였다. |
1108년 | 학일이 선사(禪師)가 되었다. |
1113년 | 학일이 내제석원(內帝釋院)에 주석하였다. |
1114년 | 학일이 대선사(大禪師)가 되었다. |
1117년 | 학일이 안화사(安和寺)에 주석하였다. |
1122년 | 고려 인종은 학일을 왕사(王師)로 책봉하였다. |
1129년 | 학일은 개경을 떠나 운문사(雲門寺)로 갔다. |
1144년 12월 9일 | 학일이 운문사(雲門寺)에서 입적하였다. |
1145년 1월 24일 | 인종은 학일을 국사(國師)로 책봉하고 시호를 원응(圓應)이라 추증하였다.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 ↑ 이종문, "학일",
『디지털청도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상현, "학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종문, "학일",
『디지털청도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종문, "학일",
『디지털청도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종문, "학일",
『디지털청도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김상영, 「고려시대 迦智山門의 전개 양상과 불교사적 위상」, 『불교연구』32, 한국불교연구원, 2010, 87-132쪽.
- 이지관,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 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260-297쪽.
- 조명제, "운문사 원응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4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5-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