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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의 속성은 이씨(李氏)이고, 이름이 학일(學一), 자(字)가 봉거(逢渠)이며 서원(西原) 보안(保安) 출신이다. 아버지 응첨(應瞻)은 벼슬을 하지 않았으며, 어머니 이씨(李氏)가 어느 날 밤에 용이 집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하였다. 태어날 때에 …(결락)… 오랫동안 흩어지지 않았다. 국사는 젖먹이 때부터 하루에 한 번 이상 젖을 먹지 않았고, 나이 겨우 8살 때에 매운 채소와 고기를 먹지 않았다.
 
|국사의 속성은 이씨(李氏)이고, 이름이 학일(學一), 자(字)가 봉거(逢渠)이며 서원(西原) 보안(保安) 출신이다. 아버지 응첨(應瞻)은 벼슬을 하지 않았으며, 어머니 이씨(李氏)가 어느 날 밤에 용이 집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하였다. 태어날 때에 …(결락)… 오랫동안 흩어지지 않았다. 국사는 젖먹이 때부터 하루에 한 번 이상 젖을 먹지 않았고, 나이 겨우 8살 때에 매운 채소와 고기를 먹지 않았다.
|출처=한국금석문집성24, 조명제, 한국국학진흥원,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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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조명제, "운문사 원응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4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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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수행===
 
===출가수행===
[[학일]]은 1062년 11세에 출가하여 [[진장|진장(眞藏)]]의 제자가 되었고, 1064년 13세에 [[구족계|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혜함|혜함(惠含)]]의 문하에서 선지(禪旨)에 통달하였고, 경률론(經律論)에 대하여 깊이 연구했으며, 특히 『대반야경(大般若經)』에 박통하여 반야(般若) 삼매(三昧)의 경지에 도달했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의 질병까지 고쳐주었으므로 크게 존경을 받았다.<ref>향토문화전자대전, 디지털청도문화대전, "학일"</ref> 1084년에는 [[개성 광명사|광명사(廣明寺)]]에서 승과(僧科)에 급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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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일]]은 1062년 11세에 출가하여 [[진장|진장(眞藏)]]의 제자가 되었고, 1064년 13세에 [[구족계|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혜함|혜함(惠含)]]의 문하에서 선지(禪旨)에 통달하였고, 경률론(經律論)에 대하여 깊이 연구했으며, 특히 『대반야경(大般若經)』에 박통하여 반야(般若) 삼매(三昧)의 경지에 도달했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의 질병까지 고쳐주었으므로 크게 존경을 받았다.<ref>이종문, "[http://cheongdo.grandculture.net/Contents?local=cheongdo&dataType=99&contents_id=GC05501066 학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청도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1084년에는 [[개성 광명사|광명사(廣明寺)]]에서 승과(僧科)에 급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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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에 진장 선사에게 의탁하여 출가하였고, 13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후에 향수사(香水寺)의 혜함(惠含) 선사를 찾아뵈었다. 어느 날 혜함이 "어떤 승려가 장경(長慶) 선사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배우는 이가 출신(出身)할 길입니까?"라고 하니, 장경이 이르기를 '이것이 바로 네가 출신할 길이다'라고 하였다"라는 고칙을 들어 보이니, 국사가 이에 깨달은 바가 있었다. 이윽고 …(결락) … 선지(禪旨)에 밝았고, 또 경(經)·율(律)·론(論)에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대반야경(大般若經)』에 더욱 뛰어나 삼매력(三昧力)을 얻어 모든 사람의 질병을 귀하고 천한 사람인지 가리지 않고 모두 구제하였는데, 행하면 번번히 효험이 있었다. 종도들이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이 추앙하였다.
 
|11세에 진장 선사에게 의탁하여 출가하였고, 13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후에 향수사(香水寺)의 혜함(惠含) 선사를 찾아뵈었다. 어느 날 혜함이 "어떤 승려가 장경(長慶) 선사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배우는 이가 출신(出身)할 길입니까?"라고 하니, 장경이 이르기를 '이것이 바로 네가 출신할 길이다'라고 하였다"라는 고칙을 들어 보이니, 국사가 이에 깨달은 바가 있었다. 이윽고 …(결락) … 선지(禪旨)에 밝았고, 또 경(經)·율(律)·론(論)에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대반야경(大般若經)』에 더욱 뛰어나 삼매력(三昧力)을 얻어 모든 사람의 질병을 귀하고 천한 사람인지 가리지 않고 모두 구제하였는데, 행하면 번번히 효험이 있었다. 종도들이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이 추앙하였다.
 
우리 선종(宣宗) 2년이며 송 신종(神宗) 원풍(元豊) 7년 갑자(甲子)에 광명사(廣明寺) 선불장(選佛場)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우리 선종(宣宗) 2년이며 송 신종(神宗) 원풍(元豊) 7년 갑자(甲子)에 광명사(廣明寺) 선불장(選佛場)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출처=한국금석문집성, 15-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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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조명제, "운문사 원응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4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5-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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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활동===
1086년 [[의천|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이 송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천태종(天台宗)을 개창하자, 선종(禪宗)의 승려들 가운데 10명 중 6~7명은 천태종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학일]]은 [[의천]]의 수차례 요청에도 불구하고 선종의 승려로 남았다. 특히 1098년에 [[의천]]은 [[개성 홍원사|홍원사(弘圓寺)]]에서 [[원각경|원각경(圓覺經)]] 법회(法會)를 개최하여 [[학일]]을 법회의 부강(副講)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학일]]은 이를 사양하고 단지 청강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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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6년 [[의천|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이 송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천태종|천태종(天台宗)]]을 개창하자, [[선종|선종(禪宗)]]의 승려들 가운데 10명 중 6~7명은 천태종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학일]]은 [[의천]]의 수차례 요청에도 불구하고 선종의 승려로 남았다. 특히 1098년에 [[의천]]은 [[개성 홍원사|홍원사(弘圓寺)]]에서 [[원각경|원각경(圓覺經)]] 법회(法會)를 개최하여 [[학일]]을 법회의 부강(副講)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학일]]은 이를 사양하고 단지 청강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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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국사(大覺國師)가 송에 유학하여 화엄의(華嚴義)를 전수받고,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배웠다. 철종(哲宗)의 원우(元祐) 원년(元年) 병인(丙寅)에 돌아왔는데 지자(智者)를 존숭하여 따로 종파를 세웠다. 이때 총림납자 가운데 천태종에 경도된 자가 10에 6, 7이나 되었다. 국사는 조사의 도가 쇠락해진 것을 슬퍼하여, 확고하게 홀로 세우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대각국사가 사람을 보내 여러 차례 권유하였으나, 끝내 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중략… 우리 숙종(肅宗) 4년이며, 송 소성(紹聖) 5년 무인(戊寅)에 대각국사가 홍원사(弘圓寺)에서 원각경(圓覺經) 법회를 열고 국사를 부강(副講)으로 삼았으나, 국사가 사양하여 말하기를, "선(禪)과 강(講)이 서로 함부로 하는 것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고 다만 참석하여 …(결락)… 청강할 뿐이었다.
 
|대각국사(大覺國師)가 송에 유학하여 화엄의(華嚴義)를 전수받고,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배웠다. 철종(哲宗)의 원우(元祐) 원년(元年) 병인(丙寅)에 돌아왔는데 지자(智者)를 존숭하여 따로 종파를 세웠다. 이때 총림납자 가운데 천태종에 경도된 자가 10에 6, 7이나 되었다. 국사는 조사의 도가 쇠락해진 것을 슬퍼하여, 확고하게 홀로 세우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대각국사가 사람을 보내 여러 차례 권유하였으나, 끝내 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중략… 우리 숙종(肅宗) 4년이며, 송 소성(紹聖) 5년 무인(戊寅)에 대각국사가 홍원사(弘圓寺)에서 원각경(圓覺經) 법회를 열고 국사를 부강(副講)으로 삼았으나, 국사가 사양하여 말하기를, "선(禪)과 강(講)이 서로 함부로 하는 것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고 다만 참석하여 …(결락)… 청강할 뿐이었다.
|출처=한국금석문집성24,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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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조명제, "운문사 원응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4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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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의 네번째 아들이자 [[의천]]의 제자인 [[징엄|원명국사 징엄(圓明國師 澄儼)]]이 9살 때 병이 나자, [[의천]]은 [[학일]]에게 도움을 청하였는데, [[학일]]이 대반야(大般若)를 염(念)하자 왕자가 살아났고, 이에 [[의천]]은 더욱 존경하였으며, 숙종의 명에 의해 [[학일]]은 [[보은 법주사|법주사(法住寺)]]의 주지가 되었다.<ref>민백, 학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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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숙종|숙종]]의 네번째 아들이자 [[의천]]의 제자인 [[징엄|원명국사 징엄(圓明國師 澄儼)]]이 9살 때 병이 나자, [[의천]]은 [[학일]]에게 도움을 청하였는데, [[학일]]이 대반야(大般若)를 염(念)하자 왕자가 살아났고, 이에 [[의천]]은 더욱 존경하였으며, [[고려 숙종|숙종]]의 명에 의해 [[학일]]은 [[보은 법주사|법주사(法住寺)]]의 주지가 되었다.<ref>김상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 학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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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석자 가운데 왕자가 있었는데 나이가 9세였고, 곧 지금의 원명국사(圓明國師)이다. 어느 날 갑자기 죽어 온기가 모두 끊어졌다. 모인 사람들이 당황하여 구명할 방법을 알지 못하였다. 대각국사가 구해줄 것을 국사에게 청하니, 국사가 조용히 대반야(大般若)를 염송하였고 얼마 후에 왕자가 소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대각국사가 공경하는 마음이 더해졌다. 왕이 국사의 일을 자세히 듣고 …(결락)… 법주사(法住寺)에 머물도록 하였다.
 
|참석자 가운데 왕자가 있었는데 나이가 9세였고, 곧 지금의 원명국사(圓明國師)이다. 어느 날 갑자기 죽어 온기가 모두 끊어졌다. 모인 사람들이 당황하여 구명할 방법을 알지 못하였다. 대각국사가 구해줄 것을 국사에게 청하니, 국사가 조용히 대반야(大般若)를 염송하였고 얼마 후에 왕자가 소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대각국사가 공경하는 마음이 더해졌다. 왕이 국사의 일을 자세히 듣고 …(결락)… 법주사(法住寺)에 머물도록 하였다.
|출처=한국금석문집성24,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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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조명제, "운문사 원응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4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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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일]]은 1106년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어 [[가지사|가지사(迦智寺)]]에 주석하였고, 다시 [[개성 귀산사|귀산사(龜山寺)]]로 옮겨 갔다. 1108년 선사(禪師)가 되었으며, 1113년 [[개성 내제석원|내제석원(內帝釋院)]]에 주석하였다. 1114년 대선사(大禪師)가 되었으며, 1117년 [[개성 안화사|안화사(安和寺)]]에 주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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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일]]은 1106년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어 [[가지사|가지사(迦智寺)]]에 주석하였고, 다시 [[개성 귀산사|귀산사(龜山寺)]]로 옮겨 갔다. 1108년 [[선사|선사(禪師)]]가 되었으며, 1113년 [[개성 내제석원|내제석원(內帝釋院)]]에 주석하였다. 1114년 대선사(大禪師)가 되었으며, 1117년 [[개성 안화사|안화사(安和寺)]]에 주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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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예종(睿宗) 원년이며 송 숭녕(崇寧) 4년에 삼중대사(三重大師)를 더해주고 가지사(迦智寺)에 머물도록 하였다. 몇 달 지나지 않아 귀산사(龜山寺)로 옮겨 머물렀다. 송 도군(道君) 대관(大觀) 2년 무자(戊子)에 선사(禪師)를 더해 주었고, 정화(政和) 3년 계사(癸巳)에 내제석원(內帝釋院)에 머물렀다. 4년 갑오(甲午)에 대선사(大禪師)를 더하였고 7년 정유(丁酉)에 안화사(安和寺)에 머물렀다.
 
|우리 예종(睿宗) 원년이며 송 숭녕(崇寧) 4년에 삼중대사(三重大師)를 더해주고 가지사(迦智寺)에 머물도록 하였다. 몇 달 지나지 않아 귀산사(龜山寺)로 옮겨 머물렀다. 송 도군(道君) 대관(大觀) 2년 무자(戊子)에 선사(禪師)를 더해 주었고, 정화(政和) 3년 계사(癸巳)에 내제석원(內帝釋院)에 머물렀다. 4년 갑오(甲午)에 대선사(大禪師)를 더하였고 7년 정유(丁酉)에 안화사(安和寺)에 머물렀다.
|출처=16-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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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조명제, "운문사 원응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4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6-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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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년 예종이 [[학일]]을 왕사(王師)로 삼으려 하였으나 사양하였다. 예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한 뒤에야 명경전(明慶殿)에서 제자의 예를 행하고 왕사로 책봉되었다.<ref>청도향문, 학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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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년 [[고려 예종|예종]]이 [[학일]]을 [[왕사|왕사(王師)]]로 삼으려 하였으나 사양하였다. [[고려 예종|예종]]이 죽고 [[고려 인종|인종]]이 즉위한 뒤에야 명경전(明慶殿)에서 제자의 예를 행하고 [[왕사]]로 책봉되었다.<ref>이종문, "[http://cheongdo.grandculture.net/Contents?local=cheongdo&dataType=99&contents_id=GC05501066 학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청도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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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 4년에 …(결락)… 왕이 병으로 인하여 국사를 내전(內殿)으로 초빙하여 절하고 왕사(王師)로 삼고자 하였으나, 국사가 굳게 사양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중(侍中) 김인존(金仁存) 등이 국사에게 이르기를, "임금께서 신하로 대하는 예로 하지 않고 국사를 섬긴지 이미 오래인데, 국사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하므로, 국사가 어쩔 수 없이 왕명을 받아들였다. 이에 왕이 곧 국사에게 절하였으나, 책봉의 의식을 행하지 못하고 왕이 승하하였다. 4월 …(결락)… 인종이 즉위하여 선왕의 뜻에 따라 7월 7일에 중사(中使)를 보내 편지로써 뜻을 전달하고, 다음 날에도 똑같이 하였다. 국사가 장계(狀啓)를 갖추어 사양하였으나 두세 차례 사신이 이르니, 12일에 예의를 갖추어 왕사로 책봉되었다. 16일에 왕이 명경전(明慶殿)에 행차하여 제자의 예를 펴고, 백관들이 절하여 하례하였다.
 
|선화 4년에 …(결락)… 왕이 병으로 인하여 국사를 내전(內殿)으로 초빙하여 절하고 왕사(王師)로 삼고자 하였으나, 국사가 굳게 사양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중(侍中) 김인존(金仁存) 등이 국사에게 이르기를, "임금께서 신하로 대하는 예로 하지 않고 국사를 섬긴지 이미 오래인데, 국사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하므로, 국사가 어쩔 수 없이 왕명을 받아들였다. 이에 왕이 곧 국사에게 절하였으나, 책봉의 의식을 행하지 못하고 왕이 승하하였다. 4월 …(결락)… 인종이 즉위하여 선왕의 뜻에 따라 7월 7일에 중사(中使)를 보내 편지로써 뜻을 전달하고, 다음 날에도 똑같이 하였다. 국사가 장계(狀啓)를 갖추어 사양하였으나 두세 차례 사신이 이르니, 12일에 예의를 갖추어 왕사로 책봉되었다. 16일에 왕이 명경전(明慶殿)에 행차하여 제자의 예를 펴고, 백관들이 절하여 하례하였다.
|출처=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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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조명제, "운문사 원응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4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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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계묘(癸卯)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어 …(결락)… 국사가 옥촉정(玉燭亭)에서 대선사 득선(得善) 등과 함께 선지(禪旨)를 거양(擧揚)하였더니, 다음 날 큰 비가 내려 밭과 들이 해갈되었다. 그 후 홍수와 가뭄의 천재지변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면 효험이 없을 때가 없었다.
 
|5년 계묘(癸卯)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어 …(결락)… 국사가 옥촉정(玉燭亭)에서 대선사 득선(得善) 등과 함께 선지(禪旨)를 거양(擧揚)하였더니, 다음 날 큰 비가 내려 밭과 들이 해갈되었다. 그 후 홍수와 가뭄의 천재지변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면 효험이 없을 때가 없었다.
|출처=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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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조명제, "운문사 원응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4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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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년 [[학일]]은 [[청도 운문사|운문사(雲門寺)]]로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나, 인종은 이를 허락하는 대신 도성과 가까운 안남(安南) 경암사(瓊嵒寺)에 머물면서 왕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학일]]은 재차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며, 마침내 1129년 9월 19일 왕사(王師)의 직인(職印)을 반납하고 몰래 경암사를 출발하여 1129년 10월 19일 [[청도 운문사|운문사]]로 들어갔다. 인종은 소식을 듣자마자 신하를 통해 친서(親書)를 전달하고 왕사(王師)직인(職印)을 돌려보냈으며, [[학일]]의 가는 길을 살피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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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년 [[학일]]은 [[청도 운문사|운문사(雲門寺)]]로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나, [[고려 인종|인종]]은 이를 허락하는 대신 도성과 가까운 안남(安南) 경암사(瓊嵒寺)에 머물면서 왕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학일]]은 재차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며, 마침내 1129년 9월 19일 [[왕사|왕사(王師)]]의 직인(職印)을 반납하고 몰래 경암사를 출발하여 1129년 10월 19일 [[청도 운문사|운문사]]로 들어갔다. 인종은 소식을 듣자마자 신하를 통해 친서(親書)를 전달하고 [[왕사]]직인을 돌려보냈으며, [[학일]]의 가는 길을 살피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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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大金)의 천회(天會) 4년 병오(丙午)에 운문사(雲門寺)로 물러날 것을 청했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고 이르기를, "안남(安南) 경암사(瓊嵒寺)는 서울과 거리가 멀지 않으므로 국사가 주지를 겸하여 스스로 왕래하기에 편하도록 허락한다"라고 하였다. 6년에 …(결락)… 경암사로 돌아가서 차자(箚子)를 올려 다시 물러날 것을 청하였는데 그 뜻이 매우 굳었다. 왕이 편지를 보내 만류하여 이르기를, "짐이 근래에 내변(內變)을 만나거나 어린 아이가 상하였을 때에 국사의 도력에 힘입어 편안함을 얻었는데, 지금 과인을 버리고 돌아가고자 하니, 장차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라 하였다. 국사가 이르기를, "왕의 뜻이 간절하니 갑자기 떠날 수 없습니다만, 산승이 세간을 탐하여 늙었으면서도 …(결락)…"라고 하였다. 7년 을유(乙酉) 9월 19일에 왕사의 직인과 편지를 봉하여 조정에 바치고, 몰래 경암사를 나와 광주(廣州)에 이르렀다. 왕이 소식을 듣고 내신(內臣) 유필(庾弼)을 보내어 간곡한 정성을 전하게 하였다. 또 좌우가(左右街)에 명하여 국사가 지나가는 주와 군은 혜조국사(慧照國師)가 하산할 때의 예에 따라 영송(迎送)하게 하고, 인보(印寶)를 돌려보냈다.
 
|대금(大金)의 천회(天會) 4년 병오(丙午)에 운문사(雲門寺)로 물러날 것을 청했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고 이르기를, "안남(安南) 경암사(瓊嵒寺)는 서울과 거리가 멀지 않으므로 국사가 주지를 겸하여 스스로 왕래하기에 편하도록 허락한다"라고 하였다. 6년에 …(결락)… 경암사로 돌아가서 차자(箚子)를 올려 다시 물러날 것을 청하였는데 그 뜻이 매우 굳었다. 왕이 편지를 보내 만류하여 이르기를, "짐이 근래에 내변(內變)을 만나거나 어린 아이가 상하였을 때에 국사의 도력에 힘입어 편안함을 얻었는데, 지금 과인을 버리고 돌아가고자 하니, 장차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라 하였다. 국사가 이르기를, "왕의 뜻이 간절하니 갑자기 떠날 수 없습니다만, 산승이 세간을 탐하여 늙었으면서도 …(결락)…"라고 하였다. 7년 을유(乙酉) 9월 19일에 왕사의 직인과 편지를 봉하여 조정에 바치고, 몰래 경암사를 나와 광주(廣州)에 이르렀다. 왕이 소식을 듣고 내신(內臣) 유필(庾弼)을 보내어 간곡한 정성을 전하게 하였다. 또 좌우가(左右街)에 명하여 국사가 지나가는 주와 군은 혜조국사(慧照國師)가 하산할 때의 예에 따라 영송(迎送)하게 하고, 인보(印寶)를 돌려보냈다.
|출처=17-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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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조명제, "운문사 원응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4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7-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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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일]]이 [[청도 운문사|운문사(雲門寺)]]에 머물자, 수많은 학자들이 찾아들었다. 학자들에게 [[학일]]은 '자기를 밝히는 일을 급무(急務)'로 삼도록 가르쳤다. [[청도 운문사|운문사]]에 주석하는 동안에 왕으로부터 갖가지 물품을 비롯하여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며, [[청도 운문사|운문사]]를 중흥시키는 데 큰 몫을 하였다.<ref>청도향문, 학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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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일]]이 [[청도 운문사|운문사(雲門寺)]]에 머물자, 수많은 학자들이 찾아들었다. 학자들에게 [[학일]]은 '자기를 밝히는 일을 급무(急務)'로 삼도록 가르쳤다. [[청도 운문사|운문사]]에 주석하는 동안에 왕으로부터 갖가지 물품을 비롯하여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며, [[청도 운문사|운문사]]를 중흥시키는 데 큰 몫을 하였다.<ref>이종문, "[http://cheongdo.grandculture.net/Contents?local=cheongdo&dataType=99&contents_id=GC05501066 학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청도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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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9일 운문사에 들어가니 …(결락)… 중국 보리달마의 현신이라 찬탄하며, 사방의 배우는 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국사가 그 무리들을 가르쳐 자기를 밝게 하는 것을 급한 임무로 삼아 엄격하게 단련하니, 묘법(妙法)을 비밀리에 전하였다고 이를 만하다. 선열(禪悅) 외에도 보시를 힘써 행하여 일체 사물을 아끼지 않았으니, 자비가 아마 천성에 근거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사가 비록 만 리 밖에 있으나, 왕이 공경하는 마음은 …(결락)… 특별히 자주 위문을 하였으며, 아울러 차, 향, 약제와 기타 물품을 보내지 않는 해가 없었으니, 그 은혜의 두터움은 모두 기록할 수 없다. 산문의 융성함이 근고 이래로 없었다.
 
|10월 19일 운문사에 들어가니 …(결락)… 중국 보리달마의 현신이라 찬탄하며, 사방의 배우는 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국사가 그 무리들을 가르쳐 자기를 밝게 하는 것을 급한 임무로 삼아 엄격하게 단련하니, 묘법(妙法)을 비밀리에 전하였다고 이를 만하다. 선열(禪悅) 외에도 보시를 힘써 행하여 일체 사물을 아끼지 않았으니, 자비가 아마 천성에 근거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사가 비록 만 리 밖에 있으나, 왕이 공경하는 마음은 …(결락)… 특별히 자주 위문을 하였으며, 아울러 차, 향, 약제와 기타 물품을 보내지 않는 해가 없었으니, 그 은혜의 두터움은 모두 기록할 수 없다. 산문의 융성함이 근고 이래로 없었다.
|출처=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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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조명제, "운문사 원응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4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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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2년 산불이 크게 나 대중들이 총동원되었으나 끄지 못했는데, [[학일]]이 산을 향해 축원하자 갑자기 비가 내려 불이 꺼졌다는 일화도 전한다. <ref>청도향문, 학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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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2년 산불이 크게 나 대중들이 총동원되었으나 끄지 못했는데, [[학일]]이 산을 향해 축원하자 갑자기 비가 내려 불이 꺼졌다는 일화도 전한다.<ref>이종문, "[http://cheongdo.grandculture.net/Contents?local=cheongdo&dataType=99&contents_id=GC05501066 학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청도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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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통(皇統) 2년 임술(壬戌)2월 8일에 산불이 크게 일어났는데, 대중이 끄려 하였으나 불길을 잡지 못하였다. 국사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산을 향하여 기원하니 비가 내려 불이 꺼졌다. 그 후에도 이와 같은 일이 …(결락)…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황통(皇統) 2년 임술(壬戌)2월 8일에 산불이 크게 일어났는데, 대중이 끄려 하였으나 불길을 잡지 못하였다. 국사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산을 향하여 기원하니 비가 내려 불이 꺼졌다. 그 후에도 이와 같은 일이 …(결락)…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출처=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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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조명제, "운문사 원응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4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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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9일 밤 오경(五更)에 삭발 목욕하고 법복을 정돈하고, 임종게(臨終偈)를 설하기를, "오음(五陰)의 구름 한 조각이 흩어지고 없어져 남은 것이 없도다. 오직 홀로 윤월(輪月)만이 있어 청광(淸光이 더욱 공허하도다"라고 하였다. 가부좌하여 손을 교차하고 단정히 앉아 움직이지 않으니 문인이 꿇어 앉아 모시고 있다가, 포시(哺時)에 이르러 흔들어 보니 이미 입적하였다. 지체가 살아있을 때와 같으며, 얼굴빛은 백옥과 같았다. …(결락)… 인근 군으로부터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마치 담장처럼 둘러쌓았다. 아! 생사의 경계를 상인, 전령과 같이 머물고자 하면 머물고, 떠나려고 하면 곧 떠나는 것과 같아서 조용하고 자재함이 이와 같으니, 비록 방온(龐蘊)도 미칠 수 없을 것이다.
 
12월 9일 밤 오경(五更)에 삭발 목욕하고 법복을 정돈하고, 임종게(臨終偈)를 설하기를, "오음(五陰)의 구름 한 조각이 흩어지고 없어져 남은 것이 없도다. 오직 홀로 윤월(輪月)만이 있어 청광(淸光이 더욱 공허하도다"라고 하였다. 가부좌하여 손을 교차하고 단정히 앉아 움직이지 않으니 문인이 꿇어 앉아 모시고 있다가, 포시(哺時)에 이르러 흔들어 보니 이미 입적하였다. 지체가 살아있을 때와 같으며, 얼굴빛은 백옥과 같았다. …(결락)… 인근 군으로부터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마치 담장처럼 둘러쌓았다. 아! 생사의 경계를 상인, 전령과 같이 머물고자 하면 머물고, 떠나려고 하면 곧 떠나는 것과 같아서 조용하고 자재함이 이와 같으니, 비록 방온(龐蘊)도 미칠 수 없을 것이다.
|출처=18-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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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조명제, "운문사 원응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4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8-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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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이 국사의 행적을 기록하여 비를 세우는 일을 왕에게 주청(奏請)하였다. 인종이 신 언이(彦頤)에게 비문을 지으라고 명하였다. 신은 도를 섭렵함이 넉넉하지 못하여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여 행적의 대략에 의거하여 …(결락)… 머리를 조아리고 억지로 서문을 쓰고 명(銘)을 짓는다.
 
문인이 국사의 행적을 기록하여 비를 세우는 일을 왕에게 주청(奏請)하였다. 인종이 신 언이(彦頤)에게 비문을 지으라고 명하였다. 신은 도를 섭렵함이 넉넉하지 못하여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여 행적의 대략에 의거하여 …(결락)… 머리를 조아리고 억지로 서문을 쓰고 명(銘)을 짓는다.
|출처=19-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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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조명제, "운문사 원응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4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9-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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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2년 || [[학일]]이 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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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8년 || [[학일]]이 선사(禪師)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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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4년 || [[학일]]이 대선사(大禪師)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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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년 || [[학일]]이 [[개성 안화사|안화사(安和寺)]]에 주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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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년 || 고려 인종은 [[학일]]을 왕사(王師)로 책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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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9년 || [[학일]]은 개경을 떠나 [[청도 운문사|운문사(雲門寺)]]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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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4년 12월 9일 || [[학일]]이 [[청도 운문사|운문사(雲門寺)]]에서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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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년 1월 24일 || 인종은 [[학일]]을 국사(國師)로 책봉하고 시호를 원응(圓應)이라 추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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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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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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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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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영, 「고려시대 迦智山門의 전개 양상과 불교사적 위상」, 『불교연구』32, 한국불교연구원, 2010, 87-132쪽.
 +
*이지관,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 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260-297쪽.
 +
*조명제, "운문사 원응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4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5-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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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0일 (월) 23:47 기준 최신판

학일(學一)
BHST Monk1.png
대표명칭 학일
한자 學一
생몰년 1052년(문종 6)-1144년(인종 22)
시호 원응(圓應)
봉거(逢渠)
성씨 이씨(李氏)
속명 학일(學一)
출신지 충청북도 서원(西原)
승탑비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



정의

고려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학일은 1052년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 지방인 서원(西原)에서 출생하였다. 속성은 이씨(李氏)이고, 아버지는 이응첨(李應瞻)으로 관직에 진출하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이씨(李氏)였으며, 용이 집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을 하였다고 한다.

Quote-left.png 국사의 속성은 이씨(李氏)이고, 이름이 학일(學一), 자(字)가 봉거(逢渠)이며 서원(西原) 보안(保安) 출신이다. 아버지 응첨(應瞻)은 벼슬을 하지 않았으며, 어머니 이씨(李氏)가 어느 날 밤에 용이 집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하였다. 태어날 때에 …(결락)… 오랫동안 흩어지지 않았다. 국사는 젖먹이 때부터 하루에 한 번 이상 젖을 먹지 않았고, 나이 겨우 8살 때에 매운 채소와 고기를 먹지 않았다. Quote-right.png
출처: 조명제, "운문사 원응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4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5쪽.


출가수행

학일은 1062년 11세에 출가하여 진장(眞藏)의 제자가 되었고, 1064년 13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혜함(惠含)의 문하에서 선지(禪旨)에 통달하였고, 경률론(經律論)에 대하여 깊이 연구했으며, 특히 『대반야경(大般若經)』에 박통하여 반야(般若) 삼매(三昧)의 경지에 도달했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의 질병까지 고쳐주었으므로 크게 존경을 받았다.[1] 1084년에는 광명사(廣明寺)에서 승과(僧科)에 급제하였다.


Quote-left.png 11세에 진장 선사에게 의탁하여 출가하였고, 13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후에 향수사(香水寺)의 혜함(惠含) 선사를 찾아뵈었다. 어느 날 혜함이 "어떤 승려가 장경(長慶) 선사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배우는 이가 출신(出身)할 길입니까?"라고 하니, 장경이 이르기를 '이것이 바로 네가 출신할 길이다'라고 하였다"라는 고칙을 들어 보이니, 국사가 이에 깨달은 바가 있었다. 이윽고 …(결락) … 선지(禪旨)에 밝았고, 또 경(經)·율(律)·론(論)에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대반야경(大般若經)』에 더욱 뛰어나 삼매력(三昧力)을 얻어 모든 사람의 질병을 귀하고 천한 사람인지 가리지 않고 모두 구제하였는데, 행하면 번번히 효험이 있었다. 종도들이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이 추앙하였다.

우리 선종(宣宗) 2년이며 송 신종(神宗) 원풍(元豊) 7년 갑자(甲子)에 광명사(廣明寺) 선불장(選佛場)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조명제, "운문사 원응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4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5-16쪽.


활동

1086년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이 송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천태종(天台宗)을 개창하자, 선종(禪宗)의 승려들 가운데 10명 중 6~7명은 천태종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학일의천의 수차례 요청에도 불구하고 선종의 승려로 남았다. 특히 1098년에 의천홍원사(弘圓寺)에서 원각경(圓覺經) 법회(法會)를 개최하여 학일을 법회의 부강(副講)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학일은 이를 사양하고 단지 청강만하였다.

Quote-left.png 대각국사(大覺國師)가 송에 유학하여 화엄의(華嚴義)를 전수받고,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배웠다. 철종(哲宗)의 원우(元祐) 원년(元年) 병인(丙寅)에 돌아왔는데 지자(智者)를 존숭하여 따로 종파를 세웠다. 이때 총림납자 가운데 천태종에 경도된 자가 10에 6, 7이나 되었다. 국사는 조사의 도가 쇠락해진 것을 슬퍼하여, 확고하게 홀로 세우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대각국사가 사람을 보내 여러 차례 권유하였으나, 끝내 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중략… 우리 숙종(肅宗) 4년이며, 송 소성(紹聖) 5년 무인(戊寅)에 대각국사가 홍원사(弘圓寺)에서 원각경(圓覺經) 법회를 열고 국사를 부강(副講)으로 삼았으나, 국사가 사양하여 말하기를, "선(禪)과 강(講)이 서로 함부로 하는 것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고 다만 참석하여 …(결락)… 청강할 뿐이었다. Quote-right.png
출처: 조명제, "운문사 원응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4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6쪽.


숙종의 네번째 아들이자 의천의 제자인 원명국사 징엄(圓明國師 澄儼)이 9살 때 병이 나자, 의천학일에게 도움을 청하였는데, 학일이 대반야(大般若)를 염(念)하자 왕자가 살아났고, 이에 의천은 더욱 존경하였으며, 숙종의 명에 의해 학일법주사(法住寺)의 주지가 되었다.[2]

Quote-left.png 참석자 가운데 왕자가 있었는데 나이가 9세였고, 곧 지금의 원명국사(圓明國師)이다. 어느 날 갑자기 죽어 온기가 모두 끊어졌다. 모인 사람들이 당황하여 구명할 방법을 알지 못하였다. 대각국사가 구해줄 것을 국사에게 청하니, 국사가 조용히 대반야(大般若)를 염송하였고 얼마 후에 왕자가 소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대각국사가 공경하는 마음이 더해졌다. 왕이 국사의 일을 자세히 듣고 …(결락)… 법주사(法住寺)에 머물도록 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조명제, "운문사 원응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4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6쪽.


학일은 1106년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어 가지사(迦智寺)에 주석하였고, 다시 귀산사(龜山寺)로 옮겨 갔다. 1108년 선사(禪師)가 되었으며, 1113년 내제석원(內帝釋院)에 주석하였다. 1114년 대선사(大禪師)가 되었으며, 1117년 안화사(安和寺)에 주석하였다.

Quote-left.png 우리 예종(睿宗) 원년이며 송 숭녕(崇寧) 4년에 삼중대사(三重大師)를 더해주고 가지사(迦智寺)에 머물도록 하였다. 몇 달 지나지 않아 귀산사(龜山寺)로 옮겨 머물렀다. 송 도군(道君) 대관(大觀) 2년 무자(戊子)에 선사(禪師)를 더해 주었고, 정화(政和) 3년 계사(癸巳)에 내제석원(內帝釋院)에 머물렀다. 4년 갑오(甲午)에 대선사(大禪師)를 더하였고 7년 정유(丁酉)에 안화사(安和寺)에 머물렀다. Quote-right.png
출처: 조명제, "운문사 원응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4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6-17쪽.


1122년 예종학일왕사(王師)로 삼으려 하였으나 사양하였다. 예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한 뒤에야 명경전(明慶殿)에서 제자의 예를 행하고 왕사로 책봉되었다.[3]

Quote-left.png 선화 4년에 …(결락)… 왕이 병으로 인하여 국사를 내전(內殿)으로 초빙하여 절하고 왕사(王師)로 삼고자 하였으나, 국사가 굳게 사양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중(侍中) 김인존(金仁存) 등이 국사에게 이르기를, "임금께서 신하로 대하는 예로 하지 않고 국사를 섬긴지 이미 오래인데, 국사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하므로, 국사가 어쩔 수 없이 왕명을 받아들였다. 이에 왕이 곧 국사에게 절하였으나, 책봉의 의식을 행하지 못하고 왕이 승하하였다. 4월 …(결락)… 인종이 즉위하여 선왕의 뜻에 따라 7월 7일에 중사(中使)를 보내 편지로써 뜻을 전달하고, 다음 날에도 똑같이 하였다. 국사가 장계(狀啓)를 갖추어 사양하였으나 두세 차례 사신이 이르니, 12일에 예의를 갖추어 왕사로 책봉되었다. 16일에 왕이 명경전(明慶殿)에 행차하여 제자의 예를 펴고, 백관들이 절하여 하례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조명제, "운문사 원응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4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7쪽.


1123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지속되었는데, 이때 학일이 기도하여 비를 내렸다는 신이(神異)한 행적이 전해진다.

Quote-left.png 5년 계묘(癸卯)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어 …(결락)… 국사가 옥촉정(玉燭亭)에서 대선사 득선(得善) 등과 함께 선지(禪旨)를 거양(擧揚)하였더니, 다음 날 큰 비가 내려 밭과 들이 해갈되었다. 그 후 홍수와 가뭄의 천재지변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면 효험이 없을 때가 없었다. Quote-right.png
출처: 조명제, "운문사 원응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4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7쪽.


1126년 학일운문사(雲門寺)로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나, 인종은 이를 허락하는 대신 도성과 가까운 안남(安南) 경암사(瓊嵒寺)에 머물면서 왕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학일은 재차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며, 마침내 1129년 9월 19일 왕사(王師)의 직인(職印)을 반납하고 몰래 경암사를 출발하여 1129년 10월 19일 운문사로 들어갔다. 인종은 소식을 듣자마자 신하를 통해 친서(親書)를 전달하고 왕사의 직인을 돌려보냈으며, 학일의 가는 길을 살피도록 명하였다.

Quote-left.png 대금(大金)의 천회(天會) 4년 병오(丙午)에 운문사(雲門寺)로 물러날 것을 청했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고 이르기를, "안남(安南) 경암사(瓊嵒寺)는 서울과 거리가 멀지 않으므로 국사가 주지를 겸하여 스스로 왕래하기에 편하도록 허락한다"라고 하였다. 6년에 …(결락)… 경암사로 돌아가서 차자(箚子)를 올려 다시 물러날 것을 청하였는데 그 뜻이 매우 굳었다. 왕이 편지를 보내 만류하여 이르기를, "짐이 근래에 내변(內變)을 만나거나 어린 아이가 상하였을 때에 국사의 도력에 힘입어 편안함을 얻었는데, 지금 과인을 버리고 돌아가고자 하니, 장차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라 하였다. 국사가 이르기를, "왕의 뜻이 간절하니 갑자기 떠날 수 없습니다만, 산승이 세간을 탐하여 늙었으면서도 …(결락)…"라고 하였다. 7년 을유(乙酉) 9월 19일에 왕사의 직인과 편지를 봉하여 조정에 바치고, 몰래 경암사를 나와 광주(廣州)에 이르렀다. 왕이 소식을 듣고 내신(內臣) 유필(庾弼)을 보내어 간곡한 정성을 전하게 하였다. 또 좌우가(左右街)에 명하여 국사가 지나가는 주와 군은 혜조국사(慧照國師)가 하산할 때의 예에 따라 영송(迎送)하게 하고, 인보(印寶)를 돌려보냈다. Quote-right.png
출처: 조명제, "운문사 원응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4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7-18쪽.


학일운문사(雲門寺)에 머물자, 수많은 학자들이 찾아들었다. 학자들에게 학일은 '자기를 밝히는 일을 급무(急務)'로 삼도록 가르쳤다. 운문사에 주석하는 동안에 왕으로부터 갖가지 물품을 비롯하여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며, 운문사를 중흥시키는 데 큰 몫을 하였다.[4]

Quote-left.png 10월 19일 운문사에 들어가니 …(결락)… 중국 보리달마의 현신이라 찬탄하며, 사방의 배우는 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국사가 그 무리들을 가르쳐 자기를 밝게 하는 것을 급한 임무로 삼아 엄격하게 단련하니, 묘법(妙法)을 비밀리에 전하였다고 이를 만하다. 선열(禪悅) 외에도 보시를 힘써 행하여 일체 사물을 아끼지 않았으니, 자비가 아마 천성에 근거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사가 비록 만 리 밖에 있으나, 왕이 공경하는 마음은 …(결락)… 특별히 자주 위문을 하였으며, 아울러 차, 향, 약제와 기타 물품을 보내지 않는 해가 없었으니, 그 은혜의 두터움은 모두 기록할 수 없다. 산문의 융성함이 근고 이래로 없었다. Quote-right.png
출처: 조명제, "운문사 원응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4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8쪽.


1142년 산불이 크게 나 대중들이 총동원되었으나 끄지 못했는데, 학일이 산을 향해 축원하자 갑자기 비가 내려 불이 꺼졌다는 일화도 전한다.[5]

Quote-left.png 황통(皇統) 2년 임술(壬戌)2월 8일에 산불이 크게 일어났는데, 대중이 끄려 하였으나 불길을 잡지 못하였다. 국사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산을 향하여 기원하니 비가 내려 불이 꺼졌다. 그 후에도 이와 같은 일이 …(결락)…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Quote-right.png
출처: 조명제, "운문사 원응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4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8쪽.


입적

학일은 1144년 10월 발병하여 입적에 이르렀으나, 신이(神異)한 행적을 보이며 스스로 입적을 늦추었다. 이후 11월에 다시 한번 병세를 보여 왕에게 올리는 유언장을 작성하였고, 12월 9일 임종게(臨終偈)를 설하고, 가부좌(跏趺坐)하며 단정히 앉아 입적하였다. 세속의 나이는 93세이며, 승랍은 82세였다.

Quote-left.png 4년 갑자(甲子) 10월 21일에 병이 들었다. 28일에 국사가 직접 진맥하고 시의(侍醫)에게 이르기를, "삼부(三部)의 맥(脈)이 끊어졌으니 입적할 때에 이르렀다"라고 하니 시의도 역시 그렇다고 하였다. 국사는 세수와 양치질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가부좌로 단정히 앉아 향을 피우고 축원한 후에 문하의 제자들에게 교시하기를, "너희들은 오로지 도력을 쌓고 명리를 욕심내어 구하지 말라. …(결락)… 시방에 두루하며, 시방이 하나로 합쳐지니, 나타났다가 숨는 것이 본래 같은 빛이라"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 거의 입적하려 하였다.

이때 문인들이 서로 말하기를, "오늘은 중일(重日)이므로, 세속에서는 크게 꺼리는 날이니, 만약 입적하시면 …(결락)… 어떻게 하나?"라고 중론(衆論)이 분분하였다. 국사가 입적하려고 할 때에 이를 듣고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라고 하니, 문인이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국사가 말하기를, "산문에는 해도 없고 날도 없으며, …(결락)… 만약 꺼리는 날로 여긴다면 내가 『섬자경(睒子經)』 중에 설한 제석천(帝釋天)에게 수명을 늘려 줄 것을 청하리라"라고 하였다. 이에 미륵상품(彌勒相品)을 염송하다가 얼마 후 문인에게 이르기를, "내가 미륵품을 염송함에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으니, 마침내 맥박과 호흡이 평정하다. 오늘 죽지 않고, 너희들의 청에 부합하도록 하겠다"라고 하고, 식사하고 기거하는 것이 평일과 같았다.

11월 15일에 다시 병세를 보여 …(결락)… 왕에게 올리는 유언장을 지었는데, 그 내용이 매우 측은하였다. …(결락)…

12월 9일 밤 오경(五更)에 삭발 목욕하고 법복을 정돈하고, 임종게(臨終偈)를 설하기를, "오음(五陰)의 구름 한 조각이 흩어지고 없어져 남은 것이 없도다. 오직 홀로 윤월(輪月)만이 있어 청광(淸光이 더욱 공허하도다"라고 하였다. 가부좌하여 손을 교차하고 단정히 앉아 움직이지 않으니 문인이 꿇어 앉아 모시고 있다가, 포시(哺時)에 이르러 흔들어 보니 이미 입적하였다. 지체가 살아있을 때와 같으며, 얼굴빛은 백옥과 같았다. …(결락)… 인근 군으로부터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마치 담장처럼 둘러쌓았다. 아! 생사의 경계를 상인, 전령과 같이 머물고자 하면 머물고, 떠나려고 하면 곧 떠나는 것과 같아서 조용하고 자재함이 이와 같으니, 비록 방온(龐蘊)도 미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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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명제, "운문사 원응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4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8-19쪽.


학일이 입적하자, 인종은 1145년 1월 24일에 학일을 국사(國師)로 책봉하고 시호를 원응(圓應)이라 추증하였다. 학일의 문인들은 그의 행적을 기리는 비의 건립을 왕에게 청하였고. 윤언이(尹彦頤)가 왕명에 의하여 비문을 지었다.

Quote-left.png 문인이 유언장, 인보(印寶)와 입적할 때의 사정을 기록하여 역마를 타고 가서 아뢰었다. 왕이 부고를 듣고 크게 애도하며 경탄(敬歎)하여 3일간 조회를 파하였다. 내신(內臣)인 김경원(金景元)과 …(결락)… 을 보내어 장사를 감호(監護)하게 하였다. 다음 해 정월 24일에 사신을 보내 예를 갖추어 국사로 책봉하고 시호를 원응(圓應)이라 추증하였다. 또 사신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27일에 문도들이 좌신(坐身)을 들것으로 매고, 청도군 지곡사(池谷寺)의 동쪽 산기슭에서 화장하였다. 30일에 유골을 수습하니 머리에는 중골(重骨)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못처럼 꼬여져 이어졌는데 오색이 선명하였다. 2월 …(결락)… 자인현(慈仁縣) 판악산(板岳山) 남쪽으로 …(결락)… 처음 입적할 때부터 화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40 …(결락)… 일 동안 앉은 몸이 조금도 기울지 않았고, 오물의 누설도 없었다. 세수는 93세이며, 법랍은 82세였다.

문인이 국사의 행적을 기록하여 비를 세우는 일을 왕에게 주청(奏請)하였다. 인종이 신 언이(彦頤)에게 비문을 지으라고 명하였다. 신은 도를 섭렵함이 넉넉하지 못하여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여 행적의 대략에 의거하여 …(결락)… 머리를 조아리고 억지로 서문을 쓰고 명(銘)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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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명제, "운문사 원응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4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9-20쪽.


지식관계망

  • 원응국사 학일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 학일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학일 가지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학일 청도 운문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학일 보은 법주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학일 개성 귀신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학일 개성 내제석원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학일 개성 안화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학일 개성 광명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학일 의천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학일 징엄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학일 왕사 A의 유형은 B이다 A dcterms:type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052년 학일이 출생하였다.
1062년 학일이 11세의 나이로 출가하여, 진장(眞藏)의 제자가 되었다.
1064년 학일이 13세의 나이에 구족계를 받았다.
1084년 학일광명사(廣明寺)에서 승과(僧科)에 급제하였다.
1098년 의천홍원사(弘圓寺)에서 원각경(圓覺經) 법회를 개최하자 학일이 청강하였다.
1098년 학일징엄의 병을 고쳐주었다.
1106년 학일이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어 가지사(迦智寺)에 주석하였다.
1108년 학일이 선사(禪師)가 되었다.
1113년 학일내제석원(內帝釋院)에 주석하였다.
1114년 학일이 대선사(大禪師)가 되었다.
1117년 학일안화사(安和寺)에 주석하였다.
1122년 고려 인종은 학일을 왕사(王師)로 책봉하였다.
1129년 학일은 개경을 떠나 운문사(雲門寺)로 갔다.
1144년 12월 9일 학일운문사(雲門寺)에서 입적하였다.
1145년 1월 24일 인종은 학일을 국사(國師)로 책봉하고 시호를 원응(圓應)이라 추증하였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1. 이종문, "학일", 『디지털청도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김상현, "학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이종문, "학일", 『디지털청도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이종문, "학일", 『디지털청도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이종문, "학일", 『디지털청도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김상영, 「고려시대 迦智山門의 전개 양상과 불교사적 위상」, 『불교연구』32, 한국불교연구원, 2010, 87-132쪽.
  • 이지관,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 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260-297쪽.
  • 조명제, "운문사 원응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4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5-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