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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한기(1803-1877)의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지로(芝老), 호는 혜강(惠岡)·패동(浿東)·명남루(明南樓)·기화당(氣和堂) 등 다수이다. 아버지는 최치현(崔致鉉)이며, 어머니는 청주 한씨(淸州韓氏)이다. 평생 학문에 진력하였고, 부인 반남 박씨(潘南朴氏)와의 사이에 2남 5녀를 두었다. 큰아들 최병대(崔柄大)는 1862년 문과에 급제하여 | + | 최한기(1803-1877)의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지로(芝老), 호는 혜강(惠岡)·패동(浿東)·명남루(明南樓)·기화당(氣和堂) 등 다수이다. 아버지는 [[최치현|최치현(崔致鉉)]]이며, 어머니는 청주 한씨(淸州韓氏)이다. 평생 학문에 진력하였고, 부인 반남 박씨(潘南朴氏)와의 사이에 2남 5녀를 두었다. 큰아들 [[최병대|최병대(崔柄大)]]는 1862년 문과에 급제하여 [[조선 고종|고종]]의 시종을 지냈으나 후손의 존재는 알려져 있지 않다. <ref>박성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7736 최한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개성 출신이지만, 대부분 서울에서 살았다. 본가와 외가는 여러 대에 걸쳐 개성에서 거주한 집안이었고, 최한기 또한 개성에서 출생하였다고 전한다. <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1285&cid=59015&categoryId=59015 최한기]", 인물한국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 | 부친인 | + | 부친인 [[최치현]]은 효성이 지극하고 글을 잘해 영락한 삭녕 최씨 가문을 일으킬 재목으로 일찍이 촉망받았다. 그러나 과거 응시에 번번이 낙방하여 출사가 좌절되면서 그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벼슬길과는 인연이 멀었지만, 개성 지역에서는 나름대로 문명(文名)이었다. [[최치현]]과 장인인 [[한경리]]는 사위와 장인 관계를 넘어 제자와 스승관계였다. 그러나 부친인 [[최치현]]은 최한기가 10세 때인 1812년 27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부친의 사망 당시 [[최한기]]는 큰집 종숙부인 [[최광현]]의 양자로 이미 입양된 상태였다.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던 본가에 비해 양가는 무과 집안이었다. 양부 [[최광현]]은 1800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지방 군수를 지내기도 했다. 많은 책을 소장하고 거문고도 켤 줄 아는 교양있는 인물이었던 [[최광현]]은 최한기의 외조부인 [[한경리]]를 비롯하여 [[한경의]]·[[김천복]]·[[김헌기]] 등 개성 지역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최한기의 학문적 바탕은 친부와 양부 모두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1285&cid=59015&categoryId=59015 최한기]", 인물한국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 | 최한기는 잘나가는 양반 자제들과 어울리지 않고(현실적으로도 쉽지는 않았겠지만) 자신과 생각이 비슷한 인물들과 어울렸다. | + | 최한기는 잘나가는 양반 자제들과 어울리지 않고(현실적으로도 쉽지는 않았겠지만) 자신과 생각이 비슷한 인물들과 어울렸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는 [[최한기]]가 벗이라 부른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자기와 뜻을 같이하는 [[이규경]], [[김정호]] 등과 학문 토론을 하였다. <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1285&cid=59015&categoryId=59015 최한기]", 인물한국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최한기는 이들과 함께 중국에서 나온 세계지도를 대추나무에 새겼었고, 1834년 [[김정호]]가 『[[청구도|청구도(靑丘圖)]]』를 만들자 최한기는 여기에 제를 써주기도 하였다.<ref>박성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7736 최한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 최한기의 학문세계는 유교적 전통에서는 극히 드물게 강한 경험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의 경험론적 방법론이 얼마나 서양의 영향을 받아 성립된 것인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으나, 그는 서양의 역산(曆算)과 기학(氣學)을 크게 중요시하면서 서양의 과학기술 도입에 적극적이었다. 그의 학문방법을 설명한 | + | 최한기의 학문세계는 유교적 전통에서는 극히 드물게 강한 경험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의 경험론적 방법론이 얼마나 서양의 영향을 받아 성립된 것인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으나, 그는 서양의 역산(曆算)과 기학(氣學)을 크게 중요시하면서 서양의 과학기술 도입에 적극적이었다. 그의 학문방법을 설명한 『[[추측록|추측록(推測錄)]]』·『[[신기통|신기통(神氣通)]]』이 이미 많은 서양과학의 예를 들어 그의 논지를 펴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뒤의 저술이 모두 서양학문을 소개하려는 노력으로 일관되어 있다.<ref>박성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7736 최한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 1857년의 | + | 1857년의 『[[지구전요|지구전요(地球典要)]]』에서 최한기는 세계 각국의 지리·역사·물산·학문 등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미 중국에서 나온 위원(魏源)의 『[[해국도지|해국도지(海國圖志)]]』와 [[서계여|서계여(徐繼畲)]]의 『[[영환지략|영환지략(瀛環志略)]]』을 바탕으로 요약한 것이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내세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비롯하여 적지않은 서양과학의 내용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서양천문학에 관하여서는 1867년에 간행된 『[[성기운화|성기운화(星氣運化)]]』가 있는데, 이는 영국의 유명한 천문학자 허셜(Herschel,W.)이 쓴 중국 번역본 『[[담천|담천(談天)]]』을 번안해 놓은 것이다. 그는 특히 서양의학의 소개에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1866년에 지은 그의 『[[신기천험|신기천험(身機踐驗)]]』은 인체를 신기가 운화(運化)하는 기계 같은 것으로 보고 서양의학의 대강을 소개한 것이다. 동양의학에 비하여 해부학이 크게 앞서 있고 병리학도 더 발달되어 있다고 지적한 그의 『[[신기천험]]』은 영국인 선교의사 홉슨(Hobson, B., 중국 이름 合信)의 서양의학서적을 ‘편수’하여 만든 것이다.<ref>박성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7736 최한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최한기의 저술을 연대순으로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 + |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최한기의 저술을 연대순으로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농정회요|농정회요(農政會要)]]』(1830), 『[[육해법|육해법(陸海法)]]』(1834), 『[[청구도제|청구도제(靑丘圖題)]]』(1834), 『[[만국경위지구도|만국경위지구도(萬國經緯地球圖)]]』(1834, 현존 미상), 『[[추측록]]』(1836), 『[[강관론|강관론(講官論)]]』(1836), 『[[신기통]]』(1836), 『[[기측체의|기측체의(氣測體義)]]』(1836, 추측록과 신기통을 합본한 것), 『[[감평|감평(鑑枰)]]』(1838, 뒤에 人政에 포함됨), 『[[의상이수|의상이수(儀象理數)]]』(1839), 『[[심기도설|심기도설(心器圖說)]]』(1842), 『[[소차유찬|소차유찬(疏箚類纂)]]』(1843), 『[[습산진벌|습산진벌(習算津筏)]]』(1850), 『[[우주책|우주책(宇宙策)]]』(연대 미상), 『[[지구전요]]』(1857), 『[[기학|기학(氣學)]]』(1857), 『[[운화측험|운화측험(運化測驗)]]』(1860), 『[[인정|인정(人政)]]』(1860), 『[[신기천험]]』(1866), 『[[성기운화]]』(1867), 『[[명남루수록|명남루수록(明南樓隨錄)]]』(연대 미상) 등이다.<ref>박성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7736 최한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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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0일 (월) 17:28 판
최한기(崔漢綺) | |
대표명칭 | 최한기 |
---|---|
한자표기 | 崔漢綺 |
생몰년 | 1803-1877 |
본관 | 삭녕(朔寧) |
호 | 혜강(惠岡), 패동(浿東), 명남루(明南樓), 기화당(氣和堂) |
자 | 지로(芝老) |
시대 | 조선 |
대표저서 | 농정회요, 육해법, 청구도제, 만국경위지구도 |
배우자 | 반남 박씨(潘南朴氏) |
부 | 최치현(崔致鉉) |
모 | 청주 한씨(淸州韓氏) |
자녀 | 최병대(崔柄大) |
성격 | 문신, 학자 |
유형 | 인물 |
정의
조선 후기의 실학자·과학사상가.
내용
최한기(1803-1877)의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지로(芝老), 호는 혜강(惠岡)·패동(浿東)·명남루(明南樓)·기화당(氣和堂) 등 다수이다. 아버지는 최치현(崔致鉉)이며, 어머니는 청주 한씨(淸州韓氏)이다. 평생 학문에 진력하였고, 부인 반남 박씨(潘南朴氏)와의 사이에 2남 5녀를 두었다. 큰아들 최병대(崔柄大)는 1862년 문과에 급제하여 고종의 시종을 지냈으나 후손의 존재는 알려져 있지 않다. [1] 개성 출신이지만, 대부분 서울에서 살았다. 본가와 외가는 여러 대에 걸쳐 개성에서 거주한 집안이었고, 최한기 또한 개성에서 출생하였다고 전한다. [2]
부친인 최치현은 효성이 지극하고 글을 잘해 영락한 삭녕 최씨 가문을 일으킬 재목으로 일찍이 촉망받았다. 그러나 과거 응시에 번번이 낙방하여 출사가 좌절되면서 그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벼슬길과는 인연이 멀었지만, 개성 지역에서는 나름대로 문명(文名)이었다. 최치현과 장인인 한경리는 사위와 장인 관계를 넘어 제자와 스승관계였다. 그러나 부친인 최치현은 최한기가 10세 때인 1812년 27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부친의 사망 당시 최한기는 큰집 종숙부인 최광현의 양자로 이미 입양된 상태였다.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던 본가에 비해 양가는 무과 집안이었다. 양부 최광현은 1800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지방 군수를 지내기도 했다. 많은 책을 소장하고 거문고도 켤 줄 아는 교양있는 인물이었던 최광현은 최한기의 외조부인 한경리를 비롯하여 한경의·김천복·김헌기 등 개성 지역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최한기의 학문적 바탕은 친부와 양부 모두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3]
최한기는 잘나가는 양반 자제들과 어울리지 않고(현실적으로도 쉽지는 않았겠지만) 자신과 생각이 비슷한 인물들과 어울렸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는 최한기가 벗이라 부른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자기와 뜻을 같이하는 이규경, 김정호 등과 학문 토론을 하였다. [4] 최한기는 이들과 함께 중국에서 나온 세계지도를 대추나무에 새겼었고, 1834년 김정호가 『청구도(靑丘圖)』를 만들자 최한기는 여기에 제를 써주기도 하였다.[5]
최한기의 학문세계는 유교적 전통에서는 극히 드물게 강한 경험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의 경험론적 방법론이 얼마나 서양의 영향을 받아 성립된 것인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으나, 그는 서양의 역산(曆算)과 기학(氣學)을 크게 중요시하면서 서양의 과학기술 도입에 적극적이었다. 그의 학문방법을 설명한 『추측록(推測錄)』·『신기통(神氣通)』이 이미 많은 서양과학의 예를 들어 그의 논지를 펴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뒤의 저술이 모두 서양학문을 소개하려는 노력으로 일관되어 있다.[6]
1857년의 『지구전요(地球典要)』에서 최한기는 세계 각국의 지리·역사·물산·학문 등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미 중국에서 나온 위원(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志)』와 서계여(徐繼畲)의 『영환지략(瀛環志略)』을 바탕으로 요약한 것이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내세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비롯하여 적지않은 서양과학의 내용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서양천문학에 관하여서는 1867년에 간행된 『성기운화(星氣運化)』가 있는데, 이는 영국의 유명한 천문학자 허셜(Herschel,W.)이 쓴 중국 번역본 『담천(談天)』을 번안해 놓은 것이다. 그는 특히 서양의학의 소개에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1866년에 지은 그의 『신기천험(身機踐驗)』은 인체를 신기가 운화(運化)하는 기계 같은 것으로 보고 서양의학의 대강을 소개한 것이다. 동양의학에 비하여 해부학이 크게 앞서 있고 병리학도 더 발달되어 있다고 지적한 그의 『신기천험』은 영국인 선교의사 홉슨(Hobson, B., 중국 이름 合信)의 서양의학서적을 ‘편수’하여 만든 것이다.[7]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최한기의 저술을 연대순으로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농정회요(農政會要)』(1830), 『육해법(陸海法)』(1834), 『청구도제(靑丘圖題)』(1834), 『만국경위지구도(萬國經緯地球圖)』(1834, 현존 미상), 『추측록』(1836), 『강관론(講官論)』(1836), 『신기통』(1836), 『기측체의(氣測體義)』(1836, 추측록과 신기통을 합본한 것), 『감평(鑑枰)』(1838, 뒤에 人政에 포함됨), 『의상이수(儀象理數)』(1839), 『심기도설(心器圖說)』(1842), 『소차유찬(疏箚類纂)』(1843), 『습산진벌(習算津筏)』(1850), 『우주책(宇宙策)』(연대 미상), 『지구전요』(1857), 『기학(氣學)』(1857), 『운화측험(運化測驗)』(1860), 『인정(人政)』(1860), 『신기천험』(1866), 『성기운화』(1867), 『명남루수록(明南樓隨錄)』(연대 미상) 등이다.[8]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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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필 | 이항복 | A는 B의 후손이다 | A ekc:hasDescendant B |
송시열 | 이세필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악원고사 | 이세필 | A는 B가 저술하였다 | A dcterms:creator B |
이세필 | 이태좌 | A는 B의 아버지이다 | A ekc:hasSon B |
이세필 | 영광 백산서원 | A는 B에 제향되었다 | A ekc:isEnshrinedIn B |
이세필 | 김제 용암서원 | A는 B에 제향되었다 | A ekc:isEnshrinedIn B |
박문수 | 이세필 | A는 B의 사위이다 | A ekc:isSonInLawOf B |
이세필 | 박세채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주석
- ↑ 박성래, "최한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최한기", 인물한국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최한기", 인물한국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최한기", 인물한국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박성래, "최한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박성래, "최한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박성래, "최한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박성래, "최한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더 읽을 거리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편집부, 『국역 국조인물고 1』,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9. 온라인 참조: "이세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