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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국제적인 교역뿐만 아니라 외국으로 나가거나 국내로 들어오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고려의 관문적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국내에서도 벽란도는 국도인 개성으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나루터였다. 특히, 중국에서 육로로 오는 도로상에 있어 유동인구도 많았던 교통의 요지였다.<ref>이혜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2829 벽란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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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시대에 중요한 무역항이며 국제항이자 교통의 요지였던 벽란도의 기능은 조선시대에 들면서 점차 그 역할이 감소되었다. 더구나 철도교통을 비롯하여 육상교통이 발달하고 다른 항구들이 개항을 하게 되자 | + | 고려 시대에 중요한 무역항이며 국제항이자 교통의 요지였던 벽란도의 기능은 조선시대에 들면서 점차 그 역할이 감소되었다. 더구나 철도교통을 비롯하여 육상교통이 발달하고 다른 항구들이 개항을 하게 되자 역할이 더욱 축소되었으며 마침내는 이름만 항일 뿐 항구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하였다. 그러나 주변의 경치가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ref>이혜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2829 벽란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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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사전편찬회, 『한국고중세사사전』, 가람기획, 2007.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18582&cid=42957&categoryId=42957 벽란도]", 한국고중세사사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 #* 한국사사전편찬회, 『한국고중세사사전』, 가람기획, 2007.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18582&cid=42957&categoryId=42957 벽란도]", 한국고중세사사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 ||
#*"[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699432 벽란도]",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 | #*"[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699432 벽란도]",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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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8일 (토) 12:47 판
벽란도(碧瀾渡) | |
대표명칭 | 벽란도 |
---|---|
한자표기 | 碧瀾渡 |
이칭 | 예성항 |
주소 | 경기도 개풍군 서면 |
관련장소 | 예성강 |
목차
정의
고려 시대 예성강 하류에 위치해 있었던 고려 때의 국제 무역항이다.[1]
내용
근처 언덕에 있었던 벽란정(碧瀾亭)이라는 관사(館舍)의 이름을 따 벽란도라고 불렀다. 중국 송나라의 사신 일행이 도착하였을 때와 떠나기 전에 벽란정에서 묵었다고 한다. 벽란도 이전에는 예성강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예성항(禮成港)이라 불렀다.[2]
고려 시대
벽란도는 고려 시대 제일의 하항이자 실질적인 유일의 국제 항구로서 발전하였다. 물이 깊어 선박이 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었으며 고려 시대의 국도(國都)였던 개성과 가까이 위치하였기 때문이다. 고려 시대에는 중국의 송나라 상인뿐만 아니라 일본을 비롯하여 멀리 남양지방(南洋地方)과 서역지방(西域地方)의 해상들까지 자주 드나들며 교역을 하였던 곳이다.
국제적인 교역뿐만 아니라 외국으로 나가거나 국내로 들어오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고려의 관문적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국내에서도 벽란도는 국도인 개성으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나루터였다. 특히, 중국에서 육로로 오는 도로상에 있어 유동인구도 많았던 교통의 요지였다.[3]
고려 시대 이후
고려 시대에 중요한 무역항이며 국제항이자 교통의 요지였던 벽란도의 기능은 조선시대에 들면서 점차 그 역할이 감소되었다. 더구나 철도교통을 비롯하여 육상교통이 발달하고 다른 항구들이 개항을 하게 되자 역할이 더욱 축소되었으며 마침내는 이름만 항일 뿐 항구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하였다. 그러나 주변의 경치가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4]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벽란도 | 예성강 | A는 B에 있었다 | A ekc:formerLocation B |
박성환-예성강도 | 예성강 | A는 B를 배경으로 한다 | A ekc:depicts B |
박성환-예성강도 | 벽란도 |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 A ekc:depicts B |
예성강도 | 예성강 |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 A ekc:depicts B |
예성강곡 | 예성강 |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 A ekc:depicts B |
예성강도 | 이녕 | A는 B가 그렸다 | A dcterms:creator B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 ↑ 이혜은, "벽란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혜은, "벽란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혜은, "벽란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혜은, "벽란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