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보가 이 진사에게 보낸 간찰"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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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문헌정보 |사진= |사진출처= |대표명칭= 박태보가 이진사에게 보낸 간찰 |한자표기= |영문명칭= |이칭= |유형= 간찰 |저자= 박태보 |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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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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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에서 [[강감찬|강감찬(姜邯贊)]]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ref>한양하,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dataType=99&contents_id=GC03401002 모기 없는 구시장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향토문화전자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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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보]]가 이진사에게 보낸 간찰 5점이다.
  
 
=='''내용'''==
 
=='''내용'''==
===설화의 내용===
 
'모기없는 구시장터 설화'는 [[강감찬]] 장군이 [[강민첨|강민첨(姜民瞻)]] 장군과 함께 하동을 지날 때 읍내 구시장(舊市場)터에 머물고서 잠을 자는데 모기가 너무 많아 모기에게 호통을 친 이후로 모기가 없어졌다는 [[이인담|이인담(異人談)]]이다.<ref>한양하,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dataType=99&contents_id=GC03401002 모기 없는 구시장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향토문화전자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br/>
 
대장군 [[강감찬]]이 진주가 고향인 [[강민첨]]과 함께 어느 날 하동을 지나게 되었다.<ref>하동군 옥종면은 행정구역상 원래 진주 지역이었다.</ref> 날이 어두워 오늘날의 읍내 구시장터에 머물고 잠을 자는데 밤에 모기가 너무 많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던 강감찬 장군은 벌떡 일어나 군사를 호령하듯, "요망한 모기들이 무엄하게 덤벼 잠을 잘 수 없구나. 썩 없어져라."고 기백 찬 호통을 치자 모기가 모두 도망을 가고 없어져 잠을 편히 잤다고 한다. 그때부터 구시장에는 모기가 없어졌다고 한다.<ref>한양하,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dataType=99&contents_id=GC03401002 모기 없는 구시장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향토문화전자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채록 및 수집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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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jsg.aks.ac.kr/cmm/fms/FileDown.do?fileSn=0&atchFileId=OLD_000000000001443]
1986년 [[하동문화원]]에서 간행한 『마을의 유래 및 사적전설』에 실려 있다. 또한 2004년 하동군 각지에서 채록·수집한 설화 자료를 중심으로 [[하동향토사연구위원회]]가 집필하여 2005년 [[하동문화원]]에서 발행한 『하동의 구전설화』의 59~60쪽에 수록되어 있다. 「모기 없는 구시장터」는 하동읍 조사위원 [[박용규가]] 현지에서 채록한 것이다.<ref>한양하,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dataType=99&contents_id=GC03401002 모기 없는 구시장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향토문화전자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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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계유묵]]』 하첩에는 [[박태보|박태보(1654~1689)]] 명의로 보낸 간찰 6점이 실려 있는데, 그 중 5점은 겉봉의 수신처가 ‘李進士’ 또는 ‘伯翼兄’이라 씌어있어 자가 백익(伯翼)인 이진사에게 보낸 간찰임을 알 수 있는데 인명은 자세하지 않다. [[행초]]로 씌어있는 5점은 부친 [[박세당]]의 영정을 그리는 일과 관련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간찰이라 회화사적으로 주목을 받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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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 제작에 들어가는 비용과 재료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과 함께 영정을 그릴 화사(畵師)를 당시 명성이 있던 평양화가 [[조세걸|조세걸(曺世傑, 1635~?)]]로 결정하려는 과정이 담겨있다. 그 내용에 따르면 수신인 이진사는 박태보에게 조세걸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며 영정제작에 관한 제반 사항을 주선한 인물로 보이는데, 그 인명이 명확하지 않은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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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사에게 보낸 5점의 간찰 중 앞의 2점은 유려한 행초로 씌어있다(도 8). 아버지 박세당의 행초 필적에 비해 둥글게 돌아가는 원필세의 흐름이 더욱 돋보인다. 이를 윤순거와 조속의 글씨와 비교하면 윤순거의 호방하고 자유분방한 필치와 조속의 깔끔하고 단아한 필치를 섞어놓은 듯한 운필을 보여 외가쪽으로부터 전승되어 온 서풍이 박태보의 글씨에 절충되어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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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지금까지 진행된 연구에 따르면 거주지가 평양이라는 점과 대대로 사환을 지속한 집안이라는 근거를 들어 이진사를 昌謙(1645~?)으로 추정한 사례가 있다(김학수, 2012, 앞의 논문, 29~30쪽 참조). 이러한 추정은 이창겸의 자가 ‘伯益’이라는 점이 전제된 것인데, 첫 번째 간찰 피봉에는 수신인이 伯翼兄이라고 씌어있고 다섯 번째 간찰에는 피봉이 아닌 편지 내용 중에 ‘伯益兄’이라고 되어 있어 동일인인지 여부가 의심된다. 다섯 번째의 간찰 내용 중 영정을 그리는 일이 현재 실마리가 잡혀가고 있다는 내용과 아울러 “이 일은 伯益兄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현재 편지를 보내는 상대방을 보고 伯益兄이라 부른 것이 아니라 제 삼자인 伯益兄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가 강하다. 따라서 이진사를 이창겸으로 보기위해서는 이러한 의문이 차제에 해결되어야 할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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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티프 분석===
 
「모기 없는 구시장터」의 주요 모티프는 '모기에게 호통을 쳐서 모기를 사라지게 한 [[강감찬]] 장군의 높은 기백'이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에 대한 일화는 전국에 전한다. 그 지역을 지나면서 있었던 사건으로 하여금 위인의 기개와 업적을 드러낸다. 이렇게 위인들의 특이한 행적을 보여 주는 것을 인물전설([[이인담]]·[[고승담]])이라고 한다. 모기를 쫓으며 군사들에게 호령하듯 하니 모기들이 놀라 모두 없어졌다고 하는 데서 [[강감찬]] 장군의 기개를 알 수 있으며, 모기가 없어진 구시장은 좀 더 살기 좋아질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ref>한양하,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dataType=99&contents_id=GC03401002 모기 없는 구시장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향토문화전자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지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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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8일 (토) 02:39 판

박태보가 이진사에게 보낸 간찰()
대표명칭 박태보가 이진사에게 보낸 간찰
유형 간찰
저자 박태보
시대 조선
수량 5점
표기문자 행초


정의

박태보가 이진사에게 보낸 간찰 5점이다.

내용

[1]


서계유묵』 하첩에는 박태보(1654~1689) 명의로 보낸 간찰 6점이 실려 있는데, 그 중 5점은 겉봉의 수신처가 ‘李進士’ 또는 ‘伯翼兄’이라 씌어있어 자가 백익(伯翼)인 이진사에게 보낸 간찰임을 알 수 있는데 인명은 자세하지 않다. 행초로 씌어있는 5점은 부친 박세당의 영정을 그리는 일과 관련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간찰이라 회화사적으로 주목을 받는 자료이다.

영정 제작에 들어가는 비용과 재료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과 함께 영정을 그릴 화사(畵師)를 당시 명성이 있던 평양화가 조세걸(曺世傑, 1635~?)로 결정하려는 과정이 담겨있다. 그 내용에 따르면 수신인 이진사는 박태보에게 조세걸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며 영정제작에 관한 제반 사항을 주선한 인물로 보이는데, 그 인명이 명확하지 않은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25)

이진사에게 보낸 5점의 간찰 중 앞의 2점은 유려한 행초로 씌어있다(도 8). 아버지 박세당의 행초 필적에 비해 둥글게 돌아가는 원필세의 흐름이 더욱 돋보인다. 이를 윤순거와 조속의 글씨와 비교하면 윤순거의 호방하고 자유분방한 필치와 조속의 깔끔하고 단아한 필치를 섞어놓은 듯한 운필을 보여 외가쪽으로부터 전승되어 온 서풍이 박태보의 글씨에 절충되어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25) 지금까지 진행된 연구에 따르면 거주지가 평양이라는 점과 대대로 사환을 지속한 집안이라는 근거를 들어 이진사를 昌謙(1645~?)으로 추정한 사례가 있다(김학수, 2012, 앞의 논문, 29~30쪽 참조). 이러한 추정은 이창겸의 자가 ‘伯益’이라는 점이 전제된 것인데, 첫 번째 간찰 피봉에는 수신인이 伯翼兄이라고 씌어있고 다섯 번째 간찰에는 피봉이 아닌 편지 내용 중에 ‘伯益兄’이라고 되어 있어 동일인인지 여부가 의심된다. 다섯 번째의 간찰 내용 중 영정을 그리는 일이 현재 실마리가 잡혀가고 있다는 내용과 아울러 “이 일은 伯益兄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현재 편지를 보내는 상대방을 보고 伯益兄이라 부른 것이 아니라 제 삼자인 伯益兄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가 강하다. 따라서 이진사를 이창겸으로 보기위해서는 이러한 의문이 차제에 해결되어야 할 것 이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박태보 박세당 A는 아버지 B가 있다 A ekc:hasFather B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 자원

더 읽을거리

  1. 장덕순·조동일·서대석·조희웅 공저, 『구비문학개설』, 일조각,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