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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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휘는 941년([[고려 태조|태조]] 24) 11월 26일에 입적하였으며, [[고려 태조|태조]]가 '법경대사(法鏡大師)'라는 시호(謚號)와 '자등(慈燈)'이라는 탑호(塔號)를 내렸다.
 
현휘는 941년([[고려 태조|태조]] 24) 11월 26일에 입적하였으며, [[고려 태조|태조]]가 '법경대사(法鏡大師)'라는 시호(謚號)와 '자등(慈燈)'이라는 탑호(塔號)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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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HST Jeongtosaji Beopgyeong stele.jpg|thumb|150px|right|[[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
 
{{Blockquote|천복(天福) 6년 11월 26일 이른 아침에 문인(門人)을 모아 놓고 이르되 “가고 머무는 것은 때가 있으나, 오고 감은 주(住)함이 없도다”하시고, 조용히 입적(入寂)하니, 주변에 있는 유물들은 모두 그대로였다. “너희는 힘써 유계(遺誡)를 봉행하여 종지(宗旨)를 무너뜨리지 않으므로써 나의 은혜를 갚으라”하였다. 열반(涅槃)에 들기 전날 저녁에 제자가 묻기를 “화상(和尙)께서 세상을 떠나시려는 마당에 법등(法燈)을 누구에게 부촉(付囑)하시렵니까”하니, 스님이 말씀하시길 “등등마다 스스로 동자(童子)가 있어 점화(點火)한다”하고 하였다. 다시 묻되 “저 동자(童子)는 어떻게 펴 보입니까”하니, 답하시되 “별이 청천(靑天)에 가득 포열(布列)되어 있으니, 어떻게 알 수 있을 것인가”라 하고 말씀이 끝나자마자 단정히 앉아 열반에 드시니, 속년(俗年)은 63세요, 승랍(僧臘)은 41이었다. 이 때 구름과 해는 처참하고, 바람과 샘물은 오열하며 산천이 진동하고, 새와 짐승들은 슬피 울며, 제천(諸天)이 창언(唱言)하되 사람마다 눈이 없어졌다하고 주변 열군(列郡)들의 군민은 한(恨)을 머금고 울먹였다. 세상은 공허하여 천인(天人)들마저 슬퍼하는 상심(傷心)을 가히 알 만하였다. 성감(聖感)과 영응(靈應)이 어찌 거짓이겠는가. 제자(弟子) 활행(闊行) 등 300여인이 울면서 유해(遺骸)를 받들고 3일 만인 그 달 28일 개천산(開天山) 북봉(北峰) 남쪽 기슭에 하관(下棺)하였으니, 이는 상교(像敎)를 준수한 것이다.<br/>  
 
{{Blockquote|천복(天福) 6년 11월 26일 이른 아침에 문인(門人)을 모아 놓고 이르되 “가고 머무는 것은 때가 있으나, 오고 감은 주(住)함이 없도다”하시고, 조용히 입적(入寂)하니, 주변에 있는 유물들은 모두 그대로였다. “너희는 힘써 유계(遺誡)를 봉행하여 종지(宗旨)를 무너뜨리지 않으므로써 나의 은혜를 갚으라”하였다. 열반(涅槃)에 들기 전날 저녁에 제자가 묻기를 “화상(和尙)께서 세상을 떠나시려는 마당에 법등(法燈)을 누구에게 부촉(付囑)하시렵니까”하니, 스님이 말씀하시길 “등등마다 스스로 동자(童子)가 있어 점화(點火)한다”하고 하였다. 다시 묻되 “저 동자(童子)는 어떻게 펴 보입니까”하니, 답하시되 “별이 청천(靑天)에 가득 포열(布列)되어 있으니, 어떻게 알 수 있을 것인가”라 하고 말씀이 끝나자마자 단정히 앉아 열반에 드시니, 속년(俗年)은 63세요, 승랍(僧臘)은 41이었다. 이 때 구름과 해는 처참하고, 바람과 샘물은 오열하며 산천이 진동하고, 새와 짐승들은 슬피 울며, 제천(諸天)이 창언(唱言)하되 사람마다 눈이 없어졌다하고 주변 열군(列郡)들의 군민은 한(恨)을 머금고 울먹였다. 세상은 공허하여 천인(天人)들마저 슬퍼하는 상심(傷心)을 가히 알 만하였다. 성감(聖感)과 영응(靈應)이 어찌 거짓이겠는가. 제자(弟子) 활행(闊行) 등 300여인이 울면서 유해(遺骸)를 받들고 3일 만인 그 달 28일 개천산(開天山) 북봉(北峰) 남쪽 기슭에 하관(下棺)하였으니, 이는 상교(像敎)를 준수한 것이다.<br/>  
 
임종하시기 직전 왕에게 표(表)를 받들어 고하니, “노승(老僧)이 뜻하였던 바를 이룩하지 못하고 영원히 성상(聖上)을 하직하려 하여 인사에 대신한다”고 하였다. 임금이 표상(表狀)을 펼쳐 보시고 크게 애도하면서 시호(謚號)를 법경대사(法鏡大師), 탑명(塔名)을 자등지탑(慈燈之塔)이라고 추증(追贈)하였다. 임금으로서 스님을 존중(尊重)함이 작연(焯然)하면서도 멀리서나마 깊이 추모하는 예의(禮儀)를 갖추었음을 알겠다.
 
임종하시기 직전 왕에게 표(表)를 받들어 고하니, “노승(老僧)이 뜻하였던 바를 이룩하지 못하고 영원히 성상(聖上)을 하직하려 하여 인사에 대신한다”고 하였다. 임금이 표상(表狀)을 펼쳐 보시고 크게 애도하면서 시호(謚號)를 법경대사(法鏡大師), 탑명(塔名)을 자등지탑(慈燈之塔)이라고 추증(追贈)하였다. 임금으로서 스님을 존중(尊重)함이 작연(焯然)하면서도 멀리서나마 깊이 추모하는 예의(禮儀)를 갖추었음을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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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와 법경대사 현휘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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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43년 || [[최언위]]가 [[현휘]]를 위한 탑비의 비문을 완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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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43년 || [[현휘]]의 탑비인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가 [[충주 정토사]]에 건립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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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6일 (목) 22:46 기준 최신판

현휘(玄暉)
BHST Monk1.png
대표명칭 현휘
영문명칭 Hyeonhwi
한자 玄暉
생몰년 879(헌강왕 5)-941(태조 24)
시호 법경(法鏡)
현휘(玄暉)
탑호 자등(慈燈)
성씨 이씨(李氏)
본관 남원(南原)
출신지 남원(南原)
승탑비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



정의

고려 전기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법경대사 현휘(法鏡大師 玄暉)는 879년(헌강왕 5) 오늘날 전라북도 남원 지역의 육두품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당나라 출신 귀화인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이덕순(李德順), 어머니는 부씨(傅氏)이다.[1]

Quote-left.png 여기에 그러한 스님이 있으니, 법휘는 현휘(玄暉)이고, 속성은 이씨(李氏)다. 그의 선조는 주조(周朝) 때 비덕(閟德)인 주하사(柱下史) 벼슬을 지낸 노자(老子)의 후손이었다. 영고현(榮苦縣)을 도망쳐 나왔는데,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 하니, 마치 맹자(孟子)가 태어난 추향(鄒鄕)과 같았다. 하늘은 좋은 임금이 나타나 세상을 잘 다스리지 못함을 탄식한다고 하였으니, 공자(孔子)와 같은 사람이 아니면 이를 알 수가 있겠는가. 성당(聖唐)이 요동(遼東)을 원정(遠征)할 때 먼 조상이 종군(從軍)하여 여기까지 왔다가 고역(苦役)에 얽혀 되돌아가지 못하고 정착하였으니, 지금의 전주(全州) 남원(南原)이다. 아버지의 휘(諱)는 덕순(德順)이니, 특히 노자(老子)와 주역(周易)에 정통하였고, 거문고와 시(詩)를 좋아하였다. 백구(白駒)가 쓸쓸한 공곡(空谷)에 있는 것처럼 미처 재질(才質)이 알려지지 않아 조정의 부름을 받지 못하던 야인시절(野人時節)을 보냈으나, 학(鶴)이 울면 새끼는 보이지 않는 알 속에서 화명(和鳴)하여 부화할 때와 같이 명성(名聲)이 세상에 알려졌어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더욱 고상하게 살았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충주 정토사 법경대사 자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 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228-229쪽.


유년기

현휘는 나면서부터 거룩한 자태가 있었고, 보통 아이들 놀음은 전혀 안하고 모래 위에 돌을 모아 불탑을 쌓아 올리는 놀이를 즐겨하였다.[2]

Quote-left.png 13개월 동안 모태 중에 있다가 건부(乾符) 6년[3] 1월 1일 오시(午時)에 탄생하였다. 스님은 선천적으로 성자(聖姿)를 지니고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아이들이 하는 장난은 하지 않았다. 불상이나 어른을 보면 합장(合掌)하고, 앉을 때는 가부좌(跏趺坐)를 맺고 앉으며, 땅과 담벽 등에는 불상(佛像)과 탑형(塔形)을 그렸다. 고기에 물을 먹여 살리고 벌레들에게는 먹이를 주어 구제하기도 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충주 정토사 법경대사 자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 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230쪽.


출가수행

현휘는 영동군 영각산사(靈覺山寺)의 심광대사에게 출가한 뒤, 무염화상(無染和尙)의 문하에서 선법(禪法)을 공부하였다.[4]

Quote-left.png 속가(俗家)에 살고 있는 것이 마치 소 발자국에 고인 적은 물에 사는 고기와 같아서 답답함을 느꼈으니, 넓고 깊은 망망대해에 놀고자 하여 진세(塵世)인 속가(俗家)를 버리고 입산(入山)할 것을 결심한 다음, 부모에게 허락해 주실 것을 간청하였다. 어버이는 창자를 자르는 듯한 아픔을 참고서 말하기를 “전일(前日)의 꿈을 생각하니 참으로 부처님과의 인연이 부합하는구나. 이미 숙세(宿世)부터 깊은 인연이었다고 생각하며 전세(前世)의 불연(佛緣)으로 나 또한 제도될 터이니, 갈 길을 너에게 맡기나 속히 불위(佛位)에 올라 삼계(三界)의 도사(導師)와 사생(四生)의 자부(慈父)되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스님은 영원히 진세(塵世)를 떠나 산을 찾고 고개를 넘어 동으로 길을 가다가 영각산사(靈覺山寺)에 이르게 되었다. 심광대사(深光大師)를 찾아 법문을 듣고 마음에 크게 얻은 바가 있었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충주 정토사 법경대사 자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 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230-231쪽.


20세가 되던 해인 898년(효공왕 2)에는 해인사(海印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5]

Quote-left.png 그 후로부터 스님의 덕은 날로 새로워지니 숙세(宿世)부터 선근(善根)을 심고 선천적으로 영성(靈性)을 갖춘 사람이 아니면 그 누가 능히 이와 같은 경지(境地)에 이를 수 있으리오. 건녕(乾寧) 5년 가야산사(伽倻山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부터는 계주(戒珠)가 다시 청정하였고 위의(威儀)가 더욱 엄전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충주 정토사 법경대사 자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 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232쪽.


한 번은 현휘가 10여 명과 함께 난리를 피하여 무주(武州)에 갔었는데, 도둑떼의 습격을 받아 함께 간 동행이 차례로 죽었다. 그의 차례가 되었는데도 죽음 앞에서 얼굴빛이 태연하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자, 도둑의 우두머리가 칼을 던지고 엎드려 절하면서 그를 스승으로 섬기기를 자원하였다고 한다.[6]

Quote-left.png 이러한 때 남쪽 무주(武州)가 안전하다는 소문을 듣고 그 곳에 가서 피난하여 수도하면서 여생을 보내리라고 결심한 대사(大師)는 동려(同侶) 11인과 함께 망망한 먼 길을 따라 그 곳에 도착하니, 과연 많은 사람들이 모여 편안하게 살고 있었다. 얼마 지난 후 남해지방(南海地方)에 많은 사찰이 있다기에 다시 그곳으로 가서 마땅한 정처를 구하러 다니다가 홀연히 도적의 소굴을 만나게 되었다. 물건을 강탈한 후 방으로 끌고 가서 차례로 죽이고 스님의 차례가 되어 칼로 목을 치려하였으나, 스님은 신색(神色)이 태연할 뿐만 아니라, 청운(靑雲)의 눈빛은 더욱 빛나서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태연자약(泰然自若)하였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스님의 풍도(風度)가 늠름하며 말소리 또한 절절(切切)함을 보고는 크게 감격하여 칼을 버리고 함께 절을 하고는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간청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충주 정토사 법경대사 자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 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234쪽.


구법유학

28세 때인 906년(효공왕 10) 현휘는 당나라로 가서 구봉산(九峰山)의 도건(道乾)을 만나고, 입실(入室)[7]을 허락받아 참선을 시작했다.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심요(心要)[8]를 전해 받았다고 한다. 그 뒤 10여 년 동안 중국을 돌면서 성지들을 참배하고 선지식을 찾아보았다.[9][10]

Quote-left.png 그 후 스님은 “내가 여기에 머물게 되면 앞으로 나아갈 길이 막혀 버리리라”하시고, 천우(天祐) 3년[11] 해안(海岸)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우연히 당(唐)나라로 가는 배를 만나 편승(便乘)을 간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목적지인 피안(彼岸)에 도달하여 이리 저리 서상(西上)하다가, 길을 동양(東陽)으로 돌려 팽택(彭澤)을 지나 드디어 구봉산(九峯山)에 이르러 경건한 마음으로 도건대사[道乾(도건:道虔)大師]를 친견하게 되었다. 마침 대사(大師)가 뜰에 서 있었으니 절을 하고 엎드려 미처 일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대사(大師)가 스님을 보고 “도리(闍梨)는 머리가 희구려”하거늘, 스님이 대답하되 “현휘(玄暉)는 아무리 보아도 저 자신을 알 수 없나이다”하니, 다시 “무엇을 알지 못한다는 말인가”하였다. 대답하되 “저의 머리가 희다고 하신 말씀의 뜻입니다”라고 하였다. 대사는 “추억을 더듬어보니 너와 이별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지금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되었구나”하였다. 기꺼운 바는 승당(昇堂)하여 대사(大師)의 오묘한 경지(境地)를 보고 입실(入室)해서 참선(參禪)토록 하였는데, 겨우 10일이 되자마자 심요(心要)를 전해 받아 묵묵히 서로 계합(契合)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충주 정토사 법경대사 자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 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235-236쪽.


귀국 및 활동

고려가 건국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현휘는 당나라로 떠난 지 18년 만인 924년(태조 7)에 귀국하였고, 태조는 사신을 교외에 보내어 영접하고, 곧 궁중으로 맞아들여 국사(國師)의 대우를 하였다.[12]

Quote-left.png 동방(東方)으로부터 전하는 소식이, 지금 본국(本國)에는 전쟁의 안개가 걷히고 바다에는 점차 파도가 사라져서 외난(外難)은 모두 소멸되고 다시 중흥(中興)을 이루었다는 것이었다. 동광(同光) 2년(924)에 본국에 돌아오자 모든 국민이 서로 경하(慶賀)하여 환영하는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였으니, 마치 교지군(交趾郡)으로 달아났던 구슬이 다시 합포(合浦)로 돌아오고, 진(秦)나라로 팔려갔던 보벽(寶璧)이 무사히 조(趙)나라로 되돌아온 것과 같이 하였다. 이는 오직 우담발화가 한 번 나타나고, 마륵금(摩勒金)이 중중(重重)히 비추는 것과 같았다.

태조(太祖) 임금이 특사를 보내어 교외(郊外)에서 영접하게 하였으니, 융성한 총애의 영광(榮光)이 당시로는 으뜸이었다. 다음날 구중(九重)으로 맞아들여 3등의 품계를 내리고 지극한 마음으로 찬앙하여 국사(國師)로서 우대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충주 정토사 법경대사 자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 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237-238쪽.


현휘는 고려 태조의 권유로 충주 정토사(淨土寺)에서 주석하게 되었다. 현휘의 명성은 중앙의 관료들의 경우도 정토사를 방문하지 않은 것을 수치로 여길 정도로 대단히 높았다.[13]

Quote-left.png 임금의 불심(佛心)은 더욱 돈독해지고 스님을 자주 친견하려는 마음이 깊고 간절하여 가까운 곳인 중주(中州) 정토난야(淨土蘭若)에 주지(住持)토록 청하였다. 스님은 스스로 생각하되 “방금 입당유학(入唐遊學)을 마치고 창명(滄溟)을 헤쳐 귀국하여 항상 주석(住錫)할 만한 유곡(幽谷)을 생각하던 터이라 이를 버리고 다시 어디로 가리요”하고는 문득 행장(行裝)을 정돈하였다. 한광(漢廣)을 건너고 유유히 산을 넘어 그곳에 가서 주석하니, 주변이 매우 아름답고 산천(山泉)이 수려(秀麗)하였다. 중주(中州)에 소문을 듣고 기꺼운 마음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백천(百千)이나 되었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충주 정토사 법경대사 자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 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239쪽.


한편, 현휘는 정토사에 상주하면서 광평시중(廣評侍中)을 지낸 유권열(劉權說)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충주 호족 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중부 내륙지역민에 대한 교화에 힘씀으로써 다수의 호족 세력을 태조 왕건의 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이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14]

Quote-left.png 이 때 좌승(佐丞)인 유권열(劉權說)이란 신하가 있었는데, 이는 마치 은(殷)나라 고종(高宗)의 재상(宰相)인 부설(傅說)과 같았다. 나라의 충신이며 재가(在家)의 제자(弟子)였다. 니부(尼父)인 공자(孔子)를 찬양하는 선비이니 마치 안연(顔淵)의 무리와 같았고, 석가모니 부처님을 신봉(信奉)하였으니 아울러 아난(阿難)과 같은 류(類)라하겠다. 특히 선경(禪境)에 이르러 스님을 친견하고 문득 피석(避席)의 의례(儀禮)를 폈으며, 깊이 구의(摳衣)의 정성을 오롯하게 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충주 정토사 법경대사 자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 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239-240쪽.


입적

현휘는 941년(태조 24) 11월 26일에 입적하였으며, 태조가 '법경대사(法鏡大師)'라는 시호(謚號)와 '자등(慈燈)'이라는 탑호(塔號)를 내렸다.

Quote-left.png 천복(天福) 6년 11월 26일 이른 아침에 문인(門人)을 모아 놓고 이르되 “가고 머무는 것은 때가 있으나, 오고 감은 주(住)함이 없도다”하시고, 조용히 입적(入寂)하니, 주변에 있는 유물들은 모두 그대로였다. “너희는 힘써 유계(遺誡)를 봉행하여 종지(宗旨)를 무너뜨리지 않으므로써 나의 은혜를 갚으라”하였다. 열반(涅槃)에 들기 전날 저녁에 제자가 묻기를 “화상(和尙)께서 세상을 떠나시려는 마당에 법등(法燈)을 누구에게 부촉(付囑)하시렵니까”하니, 스님이 말씀하시길 “등등마다 스스로 동자(童子)가 있어 점화(點火)한다”하고 하였다. 다시 묻되 “저 동자(童子)는 어떻게 펴 보입니까”하니, 답하시되 “별이 청천(靑天)에 가득 포열(布列)되어 있으니, 어떻게 알 수 있을 것인가”라 하고 말씀이 끝나자마자 단정히 앉아 열반에 드시니, 속년(俗年)은 63세요, 승랍(僧臘)은 41이었다. 이 때 구름과 해는 처참하고, 바람과 샘물은 오열하며 산천이 진동하고, 새와 짐승들은 슬피 울며, 제천(諸天)이 창언(唱言)하되 사람마다 눈이 없어졌다하고 주변 열군(列郡)들의 군민은 한(恨)을 머금고 울먹였다. 세상은 공허하여 천인(天人)들마저 슬퍼하는 상심(傷心)을 가히 알 만하였다. 성감(聖感)과 영응(靈應)이 어찌 거짓이겠는가. 제자(弟子) 활행(闊行) 등 300여인이 울면서 유해(遺骸)를 받들고 3일 만인 그 달 28일 개천산(開天山) 북봉(北峰) 남쪽 기슭에 하관(下棺)하였으니, 이는 상교(像敎)를 준수한 것이다.

임종하시기 직전 왕에게 표(表)를 받들어 고하니, “노승(老僧)이 뜻하였던 바를 이룩하지 못하고 영원히 성상(聖上)을 하직하려 하여 인사에 대신한다”고 하였다. 임금이 표상(表狀)을 펼쳐 보시고 크게 애도하면서 시호(謚號)를 법경대사(法鏡大師), 탑명(塔名)을 자등지탑(慈燈之塔)이라고 추증(追贈)하였다. 임금으로서 스님을 존중(尊重)함이 작연(焯然)하면서도 멀리서나마 깊이 추모하는 예의(禮儀)를 갖추었음을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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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충주 정토사 법경대사 자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 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243-244쪽.


지식관계망

  •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와 법경대사 현휘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 현휘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 최언위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A ekc:writer B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 고려 태조 A는 B가 이름을 지었다 A dc:contributor B
심광 현휘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무염 현휘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무염 심광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도건 현휘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현휘 합천 해인사 A는 B에서 계를 받았다 A edm:isRelatedTo B
현휘 충주 정토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현휘 고려 태조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무염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현휘 유권열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879년 현휘가 태어남.
898년 현휘합천 해인사에서 구족계를 받음.
906년 현휘가 당나라로 유학을 떠남.
924년 현휘가 고려로 귀국함.
924년 현휘충주 정토사에 주석함.
941년 현휘가 입적함.
943년 최언위현휘를 위한 탑비의 비문을 완성함.
943년 현휘의 탑비인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충주 정토사에 건립됨.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주석

  1. 최규성, "법경대사", 『디지털충주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인명사전편찬위원회, 『인명사전』, 민중서관, 2002. 온라인 참조: "현휘", 인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3. 당(唐)의 희종연호(僖宗年號). 신라 제49대 헌강왕 5년(879).
  4. 최규성, "법경대사", 『디지털충주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최규성, "법경대사", 『디지털충주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강정만, "현휘", 『디지털남원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7. ① 수행자가 친히 스승의 지도를 받기 위해 그의 방에 들어감. ② 스승이 수행자를 자신의 방으로 불러들여 그의 수행 상태를 점검함. ③ 제자가 스승의 법맥(法脈)을 이어받음.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입실",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8. 마음의 가장 중요한 정수(精髓).
  9. 강정만, "현휘", 『디지털남원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0. 김상현, "현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1. 당(唐)의 애제연호(哀帝年號). 신라 제52대 효공왕 10년(906).
  12. 김상현, "현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3. 정성권, 「고려 태조 왕건을 보는 또 다른 시각 - 미술사와 고고학을 통하여」, 『동양학』 Vol.61,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2015, 167쪽.
  14. 최규성, "법경대사", 『디지털충주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강정만, "현휘", 『디지털남원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김두진, 「나말여초의 선종산문과 그 사상의 변화」, 『신라문화』Vol.27, 2006, 111-131쪽.
  • 김상현, "현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김혜완, 「나말려초 남한강 주변의 선종사원과 선사들의 활동 - 정치세력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연구』49, 2008, 257-292쪽.
  • 이인재, 「충주 정토사 현휘와 영월 흥녕사 절중 - 고려 혜종대 정변과 관련하여」, 『한국고대사연구』49, 2008, 293-321쪽.
  • 이지관, "충주 정토사 법경대사 자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 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210-248쪽.
  • 인명사전편찬위원회, 『인명사전』, 민중서관, 2002. 온라인 참조: "현휘", 인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최규성, "법경대사", 『디지털충주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