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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5일 (수) 04:56 판
이긍익(李肯翊) | |
대표명칭 | 이긍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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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李肯翊 |
생몰년 | 1736-1806 |
본관 | 전주(全州). |
호 | 연려실(燃藜室), 완산(完山) |
자 | 장경(長卿) |
부 | 이광사(李匡師) |
정의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은 조선 후기의 역사학자이다.
내용
생애
이긍익의 가문은 전통적으로 소론에 속했으며, 경종대의 신임무옥사건과 1728년의 이인좌(李麟佐)의 난으로 크게 화를 당하였다. 그리고 20세 때 아버지 이광사가 나주괘서사건에 연루, 유배되어 그 곳에서 죽었다. 이때문에 벼슬을 단념한 채 일생을 야인으로 보냈다.[1]
사상 및 학문
이이(李珥)· 김장생(金長生)· 송시열(宋時烈) · 송준길(宋浚吉)· 최립(崔岦) 등 서인 계열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집안이 가학으로서 양명학(陽明學)을 내수(內修)해왔기 때문에 이긍익 역시 특히 양명학 계열에 속하였다. 양명학은 정제두(鄭齊斗)를 통해 이긍익에게 전해졌다. 아버지 이광사는 정제두의 학문을 접하기 위해 강화도로 이사했으며, 정제두의 손녀를 며느리로 맞기까지 하였다. 강화도에서 정제두를 중심으로 한 양명학파를 ‘강화학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양명학은 이광사 이후 5대에 걸쳐 이어져왔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