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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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개요'''==
귀부 위에 비신을 세우고 비신 위에 마리 용으로 장식된 [[이수|이수(螭首)]]를 씌우는 것이 보통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용의 모습 외에 해태 모습을 한 것도 있고, 사실적인 거북 모양에서 점차 변형되어 장중한 것, 패기에 넘치는 것, 우아한 것 등 형태를 달리한 것이 많다.<ref>"귀부", 두산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68446&cid=40942&categoryId=33058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인용.</ref> 현존하는 귀부 중 가장 오래된 것은 661년에 세워진 신라태종무열왕릉비(국보 제25호)의 귀부로서, 목을 앞으로 쭉 뻗고 눈을 크게 뜬 채 입을 다문 거북의 모습이 사실적이면서도 박진감 넘치는 수법으로 조각되어 있다.<ref>"귀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0397&cid=46656&categoryId=46656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인용.</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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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螭)'자는 본래 뿔이 없는 용, 혹은 교룡(蛟龍)을 가리키는 글자로서, [[이수|이수(螭首)]]는 뿔이 달리지 않은 가상적인 동물인 용 마리가 서로 어울려 있는 것이다. [[이수|이수(螭首)]]라는 용어는 일찍이 중국에서부터 사용한 것으로, 본래는 이기(彛器:나라의 의식에 쓰이는 그릇)·비액(碑額)·석주(石柱)·석계(石階)·인장(印章)·종(鐘)·정(鼎) 등의 표면과 머리 부분에 뿔 없는 용의 형체를 조각하여 장식한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조형물 중에서도 [[이수|이수(螭首)]]의 형체나 크기로 보아 가장 크고도 뚜렷하며, 웅장한 형용을 보이는 것은 비액의 정상부에 장식한 [[이수|이수(螭首)]]이므로, 오늘날의 일반적인 개념은 위에 장식된 [[이수|이수(螭首)]]를 말하고 있다.<ref>"이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42407&cid=46656&categoryId=46656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인용.</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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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당나라 때에 와서 지금의 이수와 비신, 방부(方趺)·귀부(龜趺)를 가진 석비양식과 수법의 기본형이 등장하고, 이것이 한국에 전해져 고려시대까지 한국 석비의 기본양식이 되기도 하였다. 당나라 때에 완성된 이수의 특색은 둥근머리의 형태에 좌우 2∼3마리의 반룡(蟠龍)들이 서로 얽힌 모습으로 나타나면서, 반룡의 머리만을 나란히 하여 석비를 물고 비신을 일제히 들어올리는 듯한 형상으로 조각되어 있는 점이다. 이러한 당대(唐代) 석비의 양식이 통일신라시대에 수용되어 한국의 석비에서도 귀부와 이수가 갖춰지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초기에는 당비의 이수의 특징을 그대로 갖추고 있으나, 9세기 후반기에 가면 둥근 머리형에서 관형(冠形) 또는 개형(蓋形)으로 변화되어 간다. 고려 초기까지 이러한 형식이 이어지다가 12세기 말에는 이수 없는 비신 위에 우진각 지붕형으로 된 규두형(圭頭形) 석비가 나타나고, 14세기 말에는 옥개풍(屋蓋風)의 지붕형 이수를 가진 또다른 형식이 출현한다. 그러다 조선 초기에는 다시 당송시대의 이수를 가진 석비양식이 보이기도 하다가 15세기 말경부터는 고려 말의 옥개형 석비형식을 기본으로 하는 간략한 양식이 주조를 이룬다.<ref>"이수", 두산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34935&cid=40942&categoryId=33058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인용.</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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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2017년 3월 1일 (수) 17:14 판


정의

용의 모양을 새긴 비석 머릿돌.


개요

'이(螭)'자는 본래 뿔이 없는 용, 혹은 교룡(蛟龍)을 가리키는 글자로서, 이수(螭首)는 뿔이 달리지 않은 가상적인 동물인 용 두 마리가 서로 어울려 있는 것이다. 이수(螭首)라는 용어는 일찍이 중국에서부터 사용한 것으로, 본래는 이기(彛器:나라의 의식에 쓰이는 그릇)·비액(碑額)·석주(石柱)·석계(石階)·인장(印章)·종(鐘)·정(鼎) 등의 표면과 머리 부분에 뿔 없는 용의 형체를 조각하여 장식한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조형물 중에서도 이수(螭首)의 형체나 크기로 보아 가장 크고도 뚜렷하며, 웅장한 형용을 보이는 것은 비액의 정상부에 장식한 이수(螭首)이므로, 오늘날의 일반적인 개념은 위에 장식된 이수(螭首)를 말하고 있다.[1]

중국 당나라 때에 와서 지금의 이수와 비신, 방부(方趺)·귀부(龜趺)를 가진 석비양식과 수법의 기본형이 등장하고, 이것이 한국에 전해져 고려시대까지 한국 석비의 기본양식이 되기도 하였다. 당나라 때에 완성된 이수의 특색은 둥근머리의 형태에 좌우 2∼3마리의 반룡(蟠龍)들이 서로 얽힌 모습으로 나타나면서, 반룡의 머리만을 나란히 하여 석비를 물고 비신을 일제히 들어올리는 듯한 형상으로 조각되어 있는 점이다. 이러한 당대(唐代) 석비의 양식이 통일신라시대에 수용되어 한국의 석비에서도 귀부와 이수가 갖춰지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초기에는 당비의 이수의 특징을 그대로 갖추고 있으나, 9세기 후반기에 가면 둥근 머리형에서 관형(冠形) 또는 개형(蓋形)으로 변화되어 간다. 고려 초기까지 이러한 형식이 이어지다가 12세기 말에는 이수 없는 비신 위에 우진각 지붕형으로 된 규두형(圭頭形) 석비가 나타나고, 14세기 말에는 옥개풍(屋蓋風)의 지붕형 이수를 가진 또다른 형식이 출현한다. 그러다 조선 초기에는 다시 당송시대의 이수를 가진 석비양식이 보이기도 하다가 15세기 말경부터는 고려 말의 옥개형 석비형식을 기본으로 하는 간략한 양식이 주조를 이룬다.[2]


갤러리


참고문헌

주석

  1. "이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인용.
  2. "이수",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