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윤씨"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내용) |
(→내용) |
||
23번째 줄: | 23번째 줄: | ||
==내용== | ==내용== | ||
===해남 입향과 부흥=== | ===해남 입향과 부흥=== | ||
− | 해남윤씨(海南尹氏)의 시조는 고려 중엽 때 인물인 윤존부(尹存富)로 알려져 있다. 해남 윤씨가 해남을 근거지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윤효정(尹孝貞)대로 이 시기 이후 본관으로 삼은 것으로 파악된다. 어초은(漁樵隱) 윤효정은 당대 거부였던 해남 정씨 정호장(鄭戶長)의 외동딸과 결혼해 정호장의 재산을 물려받고 일약 거부가 됐다고 한다. 그는 백성이 어려울 때 사재를 털어 구휼하고 죄인을 방면하는 등 선행을 베풀어 ‘적선지가(積善之家)’라는 칭송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그 이후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해남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로 기록되어 있다.<ref>김성희, "[http://www.segye.com/newsView/20130722023966 파평윤씨, 해남윤씨, 칠원윤씨]", 『세계일보』, 작성일: 2013년 02월 22일.<ref> | + | 해남윤씨(海南尹氏)의 시조는 고려 중엽 때 인물인 윤존부(尹存富)로 알려져 있다. 해남 윤씨가 해남을 근거지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윤효정(尹孝貞)대로 이 시기 이후 본관으로 삼은 것으로 파악된다. 어초은(漁樵隱) 윤효정은 당대 거부였던 해남 정씨 정호장(鄭戶長)의 외동딸과 결혼해 정호장의 재산을 물려받고 일약 거부가 됐다고 한다. 그는 백성이 어려울 때 사재를 털어 구휼하고 죄인을 방면하는 등 선행을 베풀어 ‘적선지가(積善之家)’라는 칭송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그 이후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해남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로 기록되어 있다.<ref>김성희, "[http://www.segye.com/newsView/20130722023966 파평윤씨, 해남윤씨, 칠원윤씨]", 『세계일보』, 작성일: 2013년 02월 22일.</ref> |
===윤선도와 윤두서=== | ===윤선도와 윤두서=== | ||
− | 윤효정이 바로 [[고산 윤선도 |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의 고조부이다. 윤선도는 윤의중의 손자로, 광해군 4년에 처음 관직에 진출하였으나 [[예송논쟁]]을 비롯한 각종 사화에 얽혀 긴 유배생활을 했다. 윤선도는 그보다 50년을 앞서 살았던 정철과 함께 ‘우리 문학의 쌍벽’을 이뤘는데, 현재 전해지는 그의 시조는 75수 정도이며 대부분 [[고산유고]]에 수록되어 있다. 이 중 대표적인 작품으로 ‘오우가’ ‘어부사시사’ 등이 있다. 윤선도는 병자호란 뒤 은둔지로 택한 보길도에서 저술활동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윤선도의 증손 [[윤두서]]는 숙종 때 극사실주의 화가로 유명하며 심사정·정선과 함께 3재로 일컬어졌다. 그의 [[윤두서 자화상 | 자화상]]은 국보 240호로이며, 그 외의 그림은 모두 보물 481호로 지정됐다.<ref>김성희, "[http://www.segye.com/newsView/20130722023966 파평윤씨, 해남윤씨, 칠원윤씨]", 『세계일보』, 작성일: 2013년 02월 22일.<ref> | + | 윤효정이 바로 [[고산 윤선도 |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의 고조부이다. 윤선도는 윤의중의 손자로, 광해군 4년에 처음 관직에 진출하였으나 [[예송논쟁]]을 비롯한 각종 사화에 얽혀 긴 유배생활을 했다. 윤선도는 그보다 50년을 앞서 살았던 정철과 함께 ‘우리 문학의 쌍벽’을 이뤘는데, 현재 전해지는 그의 시조는 75수 정도이며 대부분 [[고산유고]]에 수록되어 있다. 이 중 대표적인 작품으로 ‘오우가’ ‘어부사시사’ 등이 있다. 윤선도는 병자호란 뒤 은둔지로 택한 보길도에서 저술활동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윤선도의 증손 [[윤두서]]는 숙종 때 극사실주의 화가로 유명하며 심사정·정선과 함께 3재로 일컬어졌다. 그의 [[윤두서 자화상 | 자화상]]은 국보 240호로이며, 그 외의 그림은 모두 보물 481호로 지정됐다.<ref>김성희, "[http://www.segye.com/newsView/20130722023966 파평윤씨, 해남윤씨, 칠원윤씨]", 『세계일보』, 작성일: 2013년 02월 22일.</ref> |
2017년 11월 2일 (목) 01:40 판
해남 윤씨(해남 윤씨(海南尹氏)) | |
대표명칭 | 해남 윤씨 |
---|---|
한자표기 | 해남 윤씨(海南尹氏) |
유형 | 종가 |
창립자 | 윤존부(尹存富) |
창립시대 | 고려 |
정의
해남윤씨(海南尹氏)는 해남의 종가이다.
내용
해남 입향과 부흥
해남윤씨(海南尹氏)의 시조는 고려 중엽 때 인물인 윤존부(尹存富)로 알려져 있다. 해남 윤씨가 해남을 근거지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윤효정(尹孝貞)대로 이 시기 이후 본관으로 삼은 것으로 파악된다. 어초은(漁樵隱) 윤효정은 당대 거부였던 해남 정씨 정호장(鄭戶長)의 외동딸과 결혼해 정호장의 재산을 물려받고 일약 거부가 됐다고 한다. 그는 백성이 어려울 때 사재를 털어 구휼하고 죄인을 방면하는 등 선행을 베풀어 ‘적선지가(積善之家)’라는 칭송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그 이후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해남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로 기록되어 있다.[1]
윤선도와 윤두서
윤효정이 바로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의 고조부이다. 윤선도는 윤의중의 손자로, 광해군 4년에 처음 관직에 진출하였으나 예송논쟁을 비롯한 각종 사화에 얽혀 긴 유배생활을 했다. 윤선도는 그보다 50년을 앞서 살았던 정철과 함께 ‘우리 문학의 쌍벽’을 이뤘는데, 현재 전해지는 그의 시조는 75수 정도이며 대부분 고산유고에 수록되어 있다. 이 중 대표적인 작품으로 ‘오우가’ ‘어부사시사’ 등이 있다. 윤선도는 병자호란 뒤 은둔지로 택한 보길도에서 저술활동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윤선도의 증손 윤두서는 숙종 때 극사실주의 화가로 유명하며 심사정·정선과 함께 3재로 일컬어졌다. 그의 자화상은 국보 240호로이며, 그 외의 그림은 모두 보물 481호로 지정됐다.[2]- ↑ 김성희, "파평윤씨, 해남윤씨, 칠원윤씨", 『세계일보』, 작성일: 2013년 02월 22일.
- ↑ 김성희, "파평윤씨, 해남윤씨, 칠원윤씨", 『세계일보』, 작성일: 2013년 02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