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희방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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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3년(선덕여왕 12)에 [[두운|두운(杜雲)]]이 창건하였으며, <ref>김위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6094 희방사(喜方寺)]",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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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건설화===
 
===창건설화===
 
호랑이에 얽힌 창건설화가 전하고 있다. [[두운]]은 태백산 심원암(深源庵)에서 이곳의 천연동굴로 옮겨 수도하던 중, 겨울밤에 호랑이가 찾아 들어 앞발을 들고 고개를 저으며 무엇인가를 호소하였다. 살펴보니 목에 여인의 비녀가 꽂혀 있었으므로 뽑아주었다. 그 뒤의 어느 날 소리가 나서 문을 열어보니 어여쁜 처녀가 호랑이 옆에 정신을 잃고 있었다. 처녀를 정성껏 간호하고 원기를 회복시킨 다음 사연을 물으니, 그녀는 계림(鷄林)의 호장(戶長) [[유석|유석(留石)]]의 무남독녀로서, 그날 혼인을 치르고 신방에 들려고 하는데 별안간 불이 번쩍 하더니 몸이 공중에 떴고, 그 뒤 정신을 잃었다고 하였다. 두운은 굴속에 싸리나무 울타리를 만들어 따로 거처하며 겨울을 넘긴 뒤 처녀를 집으로 데리고 갔다. [[유석|유호장]]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동굴 앞에 절을 짓고 농토를 마련해주었으며, 무쇠로 수철교(水鐵橋)를 놓아 도를 닦는 데 어려움이 없게 하였다.<ref>김위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6094 희방사(喜方寺)]",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호랑이에 얽힌 창건설화가 전하고 있다. [[두운]]은 태백산 심원암(深源庵)에서 이곳의 천연동굴로 옮겨 수도하던 중, 겨울밤에 호랑이가 찾아 들어 앞발을 들고 고개를 저으며 무엇인가를 호소하였다. 살펴보니 목에 여인의 비녀가 꽂혀 있었으므로 뽑아주었다. 그 뒤의 어느 날 소리가 나서 문을 열어보니 어여쁜 처녀가 호랑이 옆에 정신을 잃고 있었다. 처녀를 정성껏 간호하고 원기를 회복시킨 다음 사연을 물으니, 그녀는 계림(鷄林)의 호장(戶長) [[유석|유석(留石)]]의 무남독녀로서, 그날 혼인을 치르고 신방에 들려고 하는데 별안간 불이 번쩍 하더니 몸이 공중에 떴고, 그 뒤 정신을 잃었다고 하였다. 두운은 굴속에 싸리나무 울타리를 만들어 따로 거처하며 겨울을 넘긴 뒤 처녀를 집으로 데리고 갔다. [[유석|유호장]]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동굴 앞에 절을 짓고 농토를 마련해주었으며, 무쇠로 수철교(水鐵橋)를 놓아 도를 닦는 데 어려움이 없게 하였다.<ref>김위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6094 희방사(喜方寺)]",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2017년 10월 30일 (월) 03:08 판

희방사
(喜方寺)
"희방사(喜方寺)", 『두산백과』online, 네이버 지식백과.
대표명칭 희방사
한자표기 喜方寺
유형 절, 사찰
시대 643년(선덕여왕 연간), 1568년(조선 세조)
관련유물유적 월인석보


정의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 소백산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1]

내용

창건자

643년에 두운(杜雲)이 창건하였으며, [2]

창건설화

호랑이에 얽힌 창건설화가 전하고 있다. 두운은 태백산 심원암(深源庵)에서 이곳의 천연동굴로 옮겨 수도하던 중, 겨울밤에 호랑이가 찾아 들어 앞발을 들고 고개를 저으며 무엇인가를 호소하였다. 살펴보니 목에 여인의 비녀가 꽂혀 있었으므로 뽑아주었다. 그 뒤의 어느 날 소리가 나서 문을 열어보니 어여쁜 처녀가 호랑이 옆에 정신을 잃고 있었다. 처녀를 정성껏 간호하고 원기를 회복시킨 다음 사연을 물으니, 그녀는 계림(鷄林)의 호장(戶長) 유석(留石)의 무남독녀로서, 그날 혼인을 치르고 신방에 들려고 하는데 별안간 불이 번쩍 하더니 몸이 공중에 떴고, 그 뒤 정신을 잃었다고 하였다. 두운은 굴속에 싸리나무 울타리를 만들어 따로 거처하며 겨울을 넘긴 뒤 처녀를 집으로 데리고 갔다. 유호장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동굴 앞에 절을 짓고 농토를 마련해주었으며, 무쇠로 수철교(水鐵橋)를 놓아 도를 닦는 데 어려움이 없게 하였다.[3]

근세 및 근현대 역사

1850년(철종 1) 화재로 소실되어 강월(江月)이 중창하였으나 6·25 때 4동 20여 칸의 당우와 사찰에 보관되어오던 『월인석보』권1과 권2의 판본(版本)도 함께 소실되었다. 그러나 주존불(主尊佛)만은 무사하여 두운이 기거하던 천연동굴 속에 봉안하였다가 1953년에 주지 안대근(安大根)이 중건한 뒤 대웅전에 봉안하였다.[4]

부속 문화재 및 특징

문화재로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26호인 동종(銅鍾)과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높이 1.5m와 1.3m의 부도 2기가 있다. 동종은 1742년(영조 18)에 제작되었는데, 특히 은은한 종소리가 유명하다.[5]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희방사 월인석보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주석

  1. 김위석, "희방사(喜方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김위석, "희방사(喜方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김위석, "희방사(喜方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김위석, "희방사(喜方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김위석, "희방사(喜方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저서
    • 권상로, 『韓國寺刹全書』, 東國大學校出版部, 1979
    • 文化財硏究所 編, 『文化遺蹟總覽』, 文化財硏究所 編, 1977

더 읽을 거리

  • 논문
    • 高永根, 「희방사 창건설화와 '池叱方(寺)'의 해독에 대하여」, 『지명학』, 한국지명학회, Vol.14 No.-, 2008, 5-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