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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기념비.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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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선조 31) 9월 [[이순신]]이 [[원균]](元均)의 무고로 통제사에서 물러났다가 원균의 패전으로 다시 기용되어 진도 벽파진(碧波津)으로 우수영(右水營)을 옮기고, 몰려오는 133척의 왜적 함대를 불과 12척의 전선(戰船)으로 명량에 유인하여 무찌른 대첩을 기념하는 내용의 비이다.<br/>
 
1597년(선조 31) 9월 [[이순신]]이 [[원균]](元均)의 무고로 통제사에서 물러났다가 원균의 패전으로 다시 기용되어 진도 벽파진(碧波津)으로 우수영(右水營)을 옮기고, 몰려오는 133척의 왜적 함대를 불과 12척의 전선(戰船)으로 명량에 유인하여 무찌른 대첩을 기념하는 내용의 비이다.<br/>
 
비문에 의하면 [[명량대첩]]은 [[이순신]]이 재기한 직후 큰 기적을 올린 대회전(大會戰)으로, 충무공이 세운 전공의 중흥이라 일컬으며 충무공의 용병과 지리(地利)에 뛰어남은 귀신도 감동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또 [[이순신]]이 난을 당하여 적을 토벌함에 있어 책략 결정이 특출함은 옛 명장들도 이에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충의의 분발은 해와 달을 꿰뚫는다고 하였다.<br/>
 
비문에 의하면 [[명량대첩]]은 [[이순신]]이 재기한 직후 큰 기적을 올린 대회전(大會戰)으로, 충무공이 세운 전공의 중흥이라 일컬으며 충무공의 용병과 지리(地利)에 뛰어남은 귀신도 감동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또 [[이순신]]이 난을 당하여 적을 토벌함에 있어 책략 결정이 특출함은 옛 명장들도 이에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충의의 분발은 해와 달을 꿰뚫는다고 하였다.<br/>

2017년 10월 26일 (목) 23:19 판

해남 명량대첩비
(海南 鳴梁大捷碑)
해남 명량대첩비 01.jpg
대표명칭 해남 명량대첩비
한자표기 海南 鳴梁大捷碑
유형 기념비
시대 조선
지정번호 보물 제503호
지정일 1969년 6월 16일
소장처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우수영안길 34(동외리)
관련인물 이순신
관련장소 명량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기념비.

내용

1597년(선조 31) 9월 이순신원균(元均)의 무고로 통제사에서 물러났다가 원균의 패전으로 다시 기용되어 진도 벽파진(碧波津)으로 우수영(右水營)을 옮기고, 몰려오는 133척의 왜적 함대를 불과 12척의 전선(戰船)으로 명량에 유인하여 무찌른 대첩을 기념하는 내용의 비이다.
비문에 의하면 명량대첩이순신이 재기한 직후 큰 기적을 올린 대회전(大會戰)으로, 충무공이 세운 전공의 중흥이라 일컬으며 충무공의 용병과 지리(地利)에 뛰어남은 귀신도 감동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또 이순신이 난을 당하여 적을 토벌함에 있어 책략 결정이 특출함은 옛 명장들도 이에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충의의 분발은 해와 달을 꿰뚫는다고 하였다.
'통제사충무이공명량대첩비(統制使忠武李公鳴梁大捷碑)'의 12자 전액(篆額)은 김만중(金萬重)의 전서(篆書)이고 문장은 이민서(李敏敍), 글씨는 이정영(李正英)의 해서이다. 비문은 1686년(숙종 14)에 쓰여졌으나, 비는 2년 뒤인 1688년 3월 전라우도수군절도사 박신주(朴新胄)에 의하여 세워졌다.

시각자료

갤러리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자원
  • 민족기록화팀(2017년 4월 26일 촬영)
  • 민족기록화팀(2017년 4월 26일 촬영)
  • 민족기록화팀(2017년 4월 26일 촬영)
  • 민족기록화팀(2017년 4월 26일 촬영)
  • 민족기록화팀(2017년 4월 26일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