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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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32년 청나라 고증학자 유희해(劉喜海)가 우리나라 금석물을 모아 편집한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의 기록에는 이 탑 비신(碑身)의 높이 5.2척, 너비 3척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비신이 깨져 오른쪽 상부와 하부가 결실된 잔편이 귀부(龜趺)와 이수(螭首) 사이에 놓여져 있으나 마멸이 심하여 판독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비문은 손소(孫紹)가 지었으며 쓴 사람은 불명이다.<ref>[네이버 지식백과]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谷城泰安寺廣慈大師塔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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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탑비는 입적한 지 5년 후인 950년(광종 1)에 세웠으며, 조형은 목이 짧은 귀부와 귀두(龜頭) 및 앞면의 구성이 사실적이고 조문(彫文)은 유려하며 귀배비좌(龜背碑座)의 네 둘레에는 연속와(連續渦)무늬를 장식하였다. 그리고 이수의 네 모서리에는 반룡(蟠龍)을, 제액(題額) 상부 중심에는 가릉빈가(迦陵頻伽:극락조)를 부각(浮刻)하였다. 이는 종전의 석비 기본형식에다 일찍이 미약하게 다루어진 부분의 장식과 장엄함을 더해 다양화한 새로운 예이다.<ref>[네이버 지식백과] 대안사 광자대사비 [大安寺廣慈大師碑] (두산백과)</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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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문의 글씨는 줄을 친 후 새겨 놓았는데, 전체적으로 건강한 힘이 느껴지고 은은한 기운이 감돌고 있어 통일신라에 비하여 서예가 훨씬 발전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ref>문화재청</ref> | ||
2017년 2월 22일 (수) 22:56 판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谷城 泰安寺 廣慈大師塔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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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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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谷城 泰安寺 廣慈大師塔碑 |
이칭 | 대안사광자대사비(大安寺廣慈大師碑) |
주소 | 전남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산18-1 |
문화재 지정번호 | 보물 제275호 |
문화재 지정일 | 1963.01.21 |
찬자 | 손소(孫紹) |
서자 | 미상 |
각자 | 문민(文旻) |
승려 | 윤다(允多) |
승탑 |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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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태안사(泰安寺)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고승 광자대사 윤다(廣慈大師 允多)의 탑비.
탑비
전체 높이 158cm, 너비 91cm, 두께 22cm.
1832년 청나라 고증학자 유희해(劉喜海)가 우리나라 금석물을 모아 편집한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의 기록에는 이 탑 비신(碑身)의 높이 5.2척, 너비 3척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비신이 깨져 오른쪽 상부와 하부가 결실된 잔편이 귀부(龜趺)와 이수(螭首) 사이에 놓여져 있으나 마멸이 심하여 판독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비문은 손소(孫紹)가 지었으며 쓴 사람은 불명이다.[1]
탑비는 입적한 지 5년 후인 950년(광종 1)에 세웠으며, 조형은 목이 짧은 귀부와 귀두(龜頭) 및 앞면의 구성이 사실적이고 조문(彫文)은 유려하며 귀배비좌(龜背碑座)의 네 둘레에는 연속와(連續渦)무늬를 장식하였다. 그리고 이수의 네 모서리에는 반룡(蟠龍)을, 제액(題額) 상부 중심에는 가릉빈가(迦陵頻伽:극락조)를 부각(浮刻)하였다. 이는 종전의 석비 기본형식에다 일찍이 미약하게 다루어진 부분의 장식과 장엄함을 더해 다양화한 새로운 예이다.[2]
비문의 글씨는 줄을 친 후 새겨 놓았는데, 전체적으로 건강한 힘이 느껴지고 은은한 기운이 감돌고 있어 통일신라에 비하여 서예가 훨씬 발전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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