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의의)
58번째 줄: 58번째 줄:
 
==주석==
 
==주석==
 
<references/>
 
<references/>
 
 
  
 
[[분류 : 한글고문서]]
 
[[분류 : 한글고문서]]
 
[[분류 : 인물]]
 
[[분류 : 인물]]

2017년 10월 17일 (화) 10:59 판


이언적(李彦迪)
대표명칭 이언적
한자표기 李彦迪
생몰년 1491-1553
본관 여강[驪江, 여주(驪州
이칭 이적(李迪)
회재(晦齋), 자계옹(紫溪翁)
복고(復古),
이번(李蕃)
손소(孫昭)의 딸 경주손씨



정의

이언적(李彦迪)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내용

생애

1545년(명종 즉위년)좌찬성이 되었는데 이 때 윤원형(尹元衡)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선비들을 심문하는 추관(推官)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명종 2)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저술을 남긴 후 세상을 떠났다.[1]

학문과 저작활동

이언적은 1517년 영남지방 유생들 사이에 토론되었던 무극태극논쟁(無極太極論爭)에 뛰어들었고, 주희의 주리론적 견해를 바탕으로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밝혔는데, 이 논쟁에서 밝힌 그의 학설은 이황(李滉)에게로 계승되는 영남학파의 성리설에 선구가 되었다. 이언적은 만년에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구인록(求仁錄)』(1550)·『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1549)·『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1553)·『봉선잡의(奉先雜儀)』(1550) 등의 중요한 저술을 남겼다.[2]

의의

이언적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인물로서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주희(朱熹)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여 이황(李滉)에게 전해주었다.[3] 또한 사림의 조종으로서, 경주 고향 마을 옆에 그를 향사하는 서원이 건립되었다.. 옥산서원(玉山書院)의 뒤편에는 이언적이 권신 김안로의 전횡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거처하였다는 독락당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4]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이언적 이언적의 처 경주손씨 A는 B의 남편이다
손소 이언적의 처 경주손씨 A는 딸 B를 두었다
이언적 여주이씨 독락당 A는 B와 관련이 있다

주석

  1. 금장태, "이언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금장태, "이언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금장태, "이언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정경희, "이언적",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