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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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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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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와 탄생===
 
===가계와 탄생===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지금의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소제(李少悌) 사이의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유관순의 집안은 개신교 신자였던 할아버지 유윤기(柳閏基)와 숙부 유중무(柳重武)로 인해 일찍이 개신교 집안이 되었고, 유관순도 자연스럽게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ref>민백</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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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지금의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소제|이소제(李少悌)]] 사이의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유관순의 집안은 개신교 신자였던 할아버지 [[유윤기|유윤기(柳閏基)]]와 숙부 [[유중무|유중무(柳重武)]]로 인해 일찍이 개신교 집안이 되었고, 유관순도 자연스럽게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ref>민백</ref>
  
 
===성장과정===
 
===성장과정===
유관순은 1916년 지령리 교회에 자주 들르던 샤프(Alice Hammond Sharp, 한국명 史愛理施)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교비 유학생으로 이화학당 보통과에 편입하였다. 유관순은 1918년 3월 18일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1일 고등과 1학년에 진학하였다. 이화학당에서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이문회(以文會)를 중심으로 오후 3시만 되면 모두 수업을 중단하고, 조국 독립을 기원하는 기도회와 시국토론회 및 외부인사초청 시국강연회 등을 개최하고 있었는데, 유관순도 회원으로 활발히 활동하였다.<ref>민백</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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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은 1916년 지령리 교회에 자주 들르던 [[샤프|샤프(Alice Hammond Sharp, 한국명 史愛理施)]]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교비 유학생으로 [[이화학당]] 보통과에 편입하였다. 유관순은 1918년 3월 18일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1일 고등과 1학년에 진학하였다. [[이화학당]]에서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이문회|이문회(以文會)]]를 중심으로 오후 3시만 되면 모두 수업을 중단하고, 조국 독립을 기원하는 기도회와 시국토론회 및 외부인사초청 시국강연회 등을 개최하고 있었는데, 유관순도 회원으로 활발히 활동하였다.<ref>민백</ref>
  
 
===독립운동===
 
===독립운동===
1919년 1월 22일, 고종이 서거하자 학생들은 자진해서 상복을 입고, 휴교에 들어갔으며, 2월 28일에는 정기모임을 통해 전교생이 적극적으로 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이화학당 학생인 신특실(申特實), 노예달(盧禮達) 등은 파고다공원에서 벌어진 3·1 만세운동에 직접 참여하였고, 당시 고등과 1학년인 유관순은 서명학·김복순·김희자·국현숙 등과 함께 ‘5인의 결사대’를 결성하여, 소복을 하고 기숙사를 빠져나와 대한문 앞에서 망곡(望哭)을 한 뒤, 남대문으로 향하는 시위 행렬에 합류하였다. 이후 3월 5일, 학생 연합 시위가 벌어졌는데, 유관순도 만세를 부르다가 일경에 붙잡혔으나 곧 석방되었다.<ref>민백</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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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월 22일, [[조선 고종|고종]]이 서거하자 학생들은 자진해서 상복을 입고, 휴교에 들어갔으며, 2월 28일에는 정기모임을 통해 전교생이 적극적으로 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이화학당]] 학생인 [[신특실|신특실(申特實)]], [[노예달|노예달(盧禮達)]] 등은 [[서울 탑골공원|파고다공원]]에서 벌어진 [[3.1.운동|3.1 만세운동]]에 직접 참여하였고, 당시 고등과 1학년인 유관순은 [[서명학]]·[[김복순]]·[[김희자]]·[[국현숙]] 등과 함께 ‘5인의 결사대’를 결성하여, 소복을 하고 기숙사를 빠져나와 [[대한문]] 앞에서 망곡(望哭)을 한 뒤, [[서울 숭례문|남대문]]으로 향하는 시위 행렬에 합류하였다. 이후 3월 5일, 학생 연합 시위가 벌어졌는데, 유관순도 만세를 부르다가 일경에 붙잡혔으나 곧 석방되었다.<ref>민백</ref>
  
일본총독부의 학교휴교령으로 휴교에 들어가자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가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천안·연기(燕岐)·청주(淸州)·진천(鎭川) 등지의 학교와 교회 등을 방문하여 만세운동을 협의하고 음력 3월 1일 아우내[竝川] 장터에서 3,000여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시위를 주도하다가 출동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이때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씨(李氏)는 일본 헌병들이 쏜 총에 맞아 피살되고, 집마저 불탔으며, 자신은 공주 검사국으로 이송되었다.<Ref>[네이버 지식백과] 유관순 [柳寬順] (두산백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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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총독부]]의 학교휴교령으로 휴교에 들어가자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가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천안·연기(燕岐)·청주(淸州)·진천(鎭川) 등지의 학교와 교회 등을 방문하여 만세운동을 협의하고 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아우내[竝川] 장터]]에서 3,000여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시위를 주도하다가 출동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이때 아버지 [[유중권|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소제|이씨(李氏)]]는 일본 헌병들이 쏜 총에 맞아 피살되고, 집마저 불탔으며, 자신은 공주 검사국으로 이송되었다.<Ref>[네이버 지식백과] 유관순 [柳寬順] (두산백과)</ref>
  
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고문에 의한 방광파열로 순국하였다.<ref>두산</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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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고문에 의한 방광파열로 순국하였다.<ref>두산</ref>
  
 
===평가===
 
===평가===
10월 14일 이화학당 측은 정동교회 김종우 목사의 주례로 이태원 공동묘지에서 조촐히 장례를 지냈다. 이후 일제가 이태원 공동묘지를 군용기지로 개발하면서, 유관순의 묘는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되었으나 실전(失傳) 되었고, 현재 유관순 생가의 뒷산인 매봉산에 초혼묘(招魂墓)가 봉안되어 있다.<ref>민백</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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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4일 [[이화학당]] 측은 [[정동교회]] 김종우 목사의 주례로 이태원 공동묘지에서 조촐히 장례를 지냈다. 이후 일제가 이태원 공동묘지를 군용기지로 개발하면서, 유관순의 묘는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되었으나 실전(失傳) 되었고, 현재 유관순 생가의 뒷산인 매봉산에 초혼묘(招魂墓)가 봉안되어 있다.<ref>민백</ref>
  
 
1947년 유관순 열사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으며, 1951년 순국의열사 심사위원회에서 순국의열사로 선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72년에는 유관순이 생전에 살았던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에 추모각이 건립되었고, 1974년 서울 이화여자고등학교에 유관순 기념관이 준공되었다. 1991년 고향인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 생가가 복원되었으며, 1996년에는 이화여자고등학교 명예졸업장이 추서되었다.<ref>민백</ref>
 
1947년 유관순 열사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으며, 1951년 순국의열사 심사위원회에서 순국의열사로 선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72년에는 유관순이 생전에 살았던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에 추모각이 건립되었고, 1974년 서울 이화여자고등학교에 유관순 기념관이 준공되었다. 1991년 고향인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 생가가 복원되었으며, 1996년에는 이화여자고등학교 명예졸업장이 추서되었다.<ref>민백</ref>

2017년 10월 7일 (토) 17:06 판

유관순(柳寬順)
대표명칭 유관순
한자표기 柳寬順
영문명칭 Yu, Gwan-sun
생몰년 1902년-1920년
본관 고흥(高興)
출생지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
사망지 서대문형무소
시대 조선
유중권(柳重權)
이소제(李少悌)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성격 독립운동가
유형 인물



정의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

내용

가계와 탄생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지금의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소제(李少悌) 사이의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유관순의 집안은 개신교 신자였던 할아버지 유윤기(柳閏基)와 숙부 유중무(柳重武)로 인해 일찍이 개신교 집안이 되었고, 유관순도 자연스럽게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1]

성장과정

유관순은 1916년 지령리 교회에 자주 들르던 샤프(Alice Hammond Sharp, 한국명 史愛理施)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교비 유학생으로 이화학당 보통과에 편입하였다. 유관순은 1918년 3월 18일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1일 고등과 1학년에 진학하였다. 이화학당에서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이문회(以文會)를 중심으로 오후 3시만 되면 모두 수업을 중단하고, 조국 독립을 기원하는 기도회와 시국토론회 및 외부인사초청 시국강연회 등을 개최하고 있었는데, 유관순도 회원으로 활발히 활동하였다.[2]

독립운동

1919년 1월 22일, 고종이 서거하자 학생들은 자진해서 상복을 입고, 휴교에 들어갔으며, 2월 28일에는 정기모임을 통해 전교생이 적극적으로 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이화학당 학생인 신특실(申特實), 노예달(盧禮達) 등은 파고다공원에서 벌어진 3.1 만세운동에 직접 참여하였고, 당시 고등과 1학년인 유관순은 서명학·김복순·김희자·국현숙 등과 함께 ‘5인의 결사대’를 결성하여, 소복을 하고 기숙사를 빠져나와 대한문 앞에서 망곡(望哭)을 한 뒤, 남대문으로 향하는 시위 행렬에 합류하였다. 이후 3월 5일, 학생 연합 시위가 벌어졌는데, 유관순도 만세를 부르다가 일경에 붙잡혔으나 곧 석방되었다.[3]

일본총독부의 학교휴교령으로 휴교에 들어가자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가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천안·연기(燕岐)·청주(淸州)·진천(鎭川) 등지의 학교와 교회 등을 방문하여 만세운동을 협의하고 음력 3월 1일 아우내[竝川] 장터에서 3,000여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시위를 주도하다가 출동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이때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씨(李氏)는 일본 헌병들이 쏜 총에 맞아 피살되고, 집마저 불탔으며, 자신은 공주 검사국으로 이송되었다.[4]

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고문에 의한 방광파열로 순국하였다.[5]

평가

10월 14일 이화학당 측은 정동교회 김종우 목사의 주례로 이태원 공동묘지에서 조촐히 장례를 지냈다. 이후 일제가 이태원 공동묘지를 군용기지로 개발하면서, 유관순의 묘는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되었으나 실전(失傳) 되었고, 현재 유관순 생가의 뒷산인 매봉산에 초혼묘(招魂墓)가 봉안되어 있다.[6]

1947년 유관순 열사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으며, 1951년 순국의열사 심사위원회에서 순국의열사로 선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72년에는 유관순이 생전에 살았던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에 추모각이 건립되었고, 1974년 서울 이화여자고등학교에 유관순 기념관이 준공되었다. 1991년 고향인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 생가가 복원되었으며, 1996년에는 이화여자고등학교 명예졸업장이 추서되었다.[7]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유관순 이화학당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유관순 3.1운동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유관순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 A는 B를 주도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유관순 서대문형무소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유관순 천안 유관순 열사 유적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유관순 표준영정 유관순 A는 B를 묘사하였다 A ekc:depicts B
유관순 표준영정 윤여환 A는 B에 의해 그려졌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민백
  2. 민백
  3. 민백
  4. [네이버 지식백과] 유관순 [柳寬順] (두산백과)
  5. 두산
  6. 민백
  7. 민백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더 읽을거리

  • 김기창, 「교과서에 수록된 유관순 전기문」, 『유관순 연구』 17, 백석대학교 유관순연구소, 2012, 5-32쪽.
  • 김해연, 「유관순 순국(殉國)에 대한 교회사적 의미조명 - 한국근대사와 병행하여 -」, 『유관순 연구』 2, 백석대학교 유관순연구소, 2003, 187-205쪽.
  • 김호연, 「유관순 열사 이미지 제고를 위한 시고」, 『유관순 연구』 16, 백석대학교 유관순연구소, 2011, 59-73쪽.
  • 김호일, 「인류평화와 유관순」, 『유관순 연구』 15, 백석대학교 유관순연구소, 2010, 7-23쪽.
  • 나달숙, 「유관순 열사와 전통문화유산의 재조명」, 『유관순 연구』 13, 백석대학교 유관순연구소, 2008, 5-58쪽.
  • 나달숙, 「유관순의 저항과 재판에 관한 법적 고찰」, 『유관순 연구』 15, 백석대학교 유관순연구소, 2010, 53-85쪽
  • 신광철, 「영화를 통해 재현된 유관순의 삶」, 『유관순 연구』 3, 백석대학교 유관순연구소, 2004, 33-55쪽.
  • 이웅규, 「미래 통일한국의 위대한 여성 지도자상 연구를 위한 유관순 열사 연구」, 『유관순 연구』 17, 2012, 백석대학교 유관순연구소, 61-103쪽.
  • 이정은, 『유관순: 3 1 운동의 얼』, 역사공간, 2010.
  • 임명순, 「유관순열사가 해방 후에 발굴되는 배경」, 『유관순 연구』 19, 백석대학교 유관순연구소, 2014, 291-298쪽.
  • 전영택, 『순국처녀 유관순전』, 늘봄,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