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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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높이 약 4.8m, 폭 1.42m. 탑비는 [[귀부|귀부(龜趺)]], 비신(碑身), [[이수|이수(螭首)]]를 모두 갖춘 형태로, [[영암 도갑사|도갑사(道岬寺)]]의 부도전(浮屠田) 부근에 건립된 보호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ref>최인선,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5481 도갑사도선수미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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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높이 약 4.8m, 폭 1.42m. 탑비는 [[귀부|귀부(龜趺)]], 비신(碑身)<ref>비문을 새긴 비석의 몸체</ref>, [[이수|이수(螭首)]]를 모두 갖춘 형태로, [[영암 도갑사|도갑사(道岬寺)]]의 부도전(浮屠田) 부근에 건립된 보호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ref>최인선,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5481 도갑사도선수미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보통 비는 한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는데 반해 이 비는 비명이 [[도선|도선국사(道詵國師)]]와 [[수미| 수미선사(守眉禪師)]] 두 사람의 공동명의로 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은 주로 [[도선|도선국사]]에 관한 것이며, [[수미|수미선사]]에 대해서는 1457년에 [[영암 도갑사|도갑사]]를 중창한 내용이 전하고 있다.<ref>최인선,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5481 도갑사도선수미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보통 비는 한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는데 반해 이 비는 비명이 [[도선|도선국사(道詵國師)]]와 [[수미| 수미선사(守眉禪師)]] 두 사람의 공동명의로 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은 주로 [[도선|도선국사]]에 관한 것이며, [[수미|수미선사]]에 대해서는 1457년에 [[영암 도갑사|도갑사]]를 중창한 내용이 전하고 있다.<ref>최인선,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5481 도갑사도선수미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이 비는 1636년([[조선 인조|인조]] 14) 4월에 건립을 시작하여 17년 후인 1653년([[조선 효종|효종]] 4) 4월에 완료되었다. 비문에 따르면 본래 이곳에 [[도선|도선국사]]의 고비(古碑)가 있었는데 비바람으로 글자가 마멸되고 [[귀부]]의 머리가 결락되는 등 훼손이 심하여 다시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영암 도갑사|도갑사]]를 중창한 [[옥습|옥습대사(玉習大師)]]가 3년에 걸쳐 각 사찰에 다니면서 찬조를 구하는 한편, 신도들로부터 모금하고 한양까지 가서 비문을 청탁하였다. 비석에 사용된 돌은 전라도 관찰사의 도움으로 부역을 통해 여산(礪山)에서 운반해 왔으며, 돌이 도착한 이후 7개월 만에 공사가 완료되었다고 한다.<ref>최연식, "[http://yeongam.grandculture.net/Contents?local=yeongam&dataType=99&contents_id=GC04400622 영암 도갑사 도선 국사·수미 선사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영암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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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는 1636년([[조선 인조|인조]] 14) 4월에 건립을 시작하여 17년 후인 1653년([[조선 효종|효종]] 4) 4월에 완료되었다. 비문에 따르면 본래 이곳에 [[도선|도선국사]]의 고비(古碑)<ref>오래된 비석</ref>가 있었는데 비바람으로 글자가 마멸되고 [[귀부]]의 머리가 결락되는 등 훼손이 심하여 다시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영암 도갑사|도갑사]]를 중창한 [[옥습|옥습대사(玉習大師)]]가 3년에 걸쳐 각 사찰에 다니면서 찬조를 구하는 한편, 신도들로부터 모금하고 한양까지 가서 비문을 청탁하였다. 비석에 사용된 돌은 전라도 관찰사의 도움으로 부역을 통해 여산(礪山)<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6354 여산],<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에서 운반해 왔으며, 돌이 도착한 이후 7개월 만에 공사가 완료되었다고 한다.<ref>최연식, "[http://yeongam.grandculture.net/Contents?local=yeongam&dataType=99&contents_id=GC04400622 영암 도갑사 도선 국사·수미 선사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영암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귀부]]의 머리는 오른쪽으로 약간 튼 형태인데 입에는 상·하 8개의 이빨로 여의주를 꽉 물고 있는 형상이다. 등에는 전형적인 귀갑문 대신 평행 사선문(斜線紋)으로 정연하게 음각하였다. 비신은 [[귀부]]와 [[이수]]와는 달리 대리석으로 조성했다. 비신의 양 측면에는 운룡문(雲龍紋)이 가득 양각되었는데,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마치 살아 있는 쌍룡이 구름을 타고 승천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수]]에는 운문 위에 2마리의 용이 각각 [[이수]]의 양끝을 물고 있는 형상을 지니고 있다.<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13950000,36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ㆍ수미선사비]",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
 
[[귀부]]의 머리는 오른쪽으로 약간 튼 형태인데 입에는 상·하 8개의 이빨로 여의주를 꽉 물고 있는 형상이다. 등에는 전형적인 귀갑문 대신 평행 사선문(斜線紋)으로 정연하게 음각하였다. 비신은 [[귀부]]와 [[이수]]와는 달리 대리석으로 조성했다. 비신의 양 측면에는 운룡문(雲龍紋)이 가득 양각되었는데,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마치 살아 있는 쌍룡이 구름을 타고 승천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수]]에는 운문 위에 2마리의 용이 각각 [[이수]]의 양끝을 물고 있는 형상을 지니고 있다.<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13950000,36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ㆍ수미선사비]",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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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면의 상단에는 [[김시간|김시간(金時暕)]]이 쓴 '국사도선비음명(國師道詵碑陰銘)'이라는 전자(篆字) 글씨체의 제목이 있다. 그 아래로 [[정두경|정두경(鄭斗卿)]]이 찬하고 [[김비|김비(金棐)]]가 쓴 음기(陰記)가 있다. 음기 말미에 찬자(撰者), 서자(書者), 전서자(篆書者)의 직함과 성명이 병기되어 있으며, 끝에 '1636년 4월에 시작하여 1653년 4월에 세웠다(崇禎 丙子 四月日始 癸巳四月日立)'라는 건립연대가 있다. 이 아래쪽에는 음기와 다른 서체와 작은 글씨로 '길이가 18척 너비가 9척(長十八尺 廣九尺)'이라는 비석의 규모를 새겨 놓기도 했다. 음기의 내용은 전면의 [[이경석|이경석(李景奭)]]의 글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도선|도선국사(道詵國師)]]의 이야기만 담고 있을 뿐 [[수미|수미선사(守眉禪師)]]의 내용은 전혀 없다. 음기 옆으로는 [[인평대군|인평대군(麟坪大君)]]을 시작으로 당시 정치인들의 직함과 성명이 나열되어 있다. 음기와 [[인평대군|인평대군]] 등 관료 직함 아래로는 산중질(山中秩), 시주질(施主秩), 공장질(工匠秩) 등이 적혀 있다.<ref>김민규, 「〈도선국사·수미선사비〉의 제작 장인과 양식 연구」, 『문화재』48, 국립문화재연구소, 2015, 65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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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면의 상단에는 [[김시간|김시간(金時暕)]]이 쓴 '국사도선비음명(國師道詵碑陰銘)'이라는 전자(篆字)<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24462&cid=50826&categoryId=50826 전자]", 문화콘텐츠닷컴(문화원형 용어사전)<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글씨체의 제목이 있다. 그 아래로 [[정두경|정두경(鄭斗卿)]]이 찬하고 [[김비|김비(金棐)]]가 쓴 음기(陰記)가 있다. 음기 말미에 찬자(撰者), 서자(書者), 전서자(篆書者)의 직함과 성명이 병기되어 있으며, 끝에 '1636년 4월에 시작하여 1653년 4월에 세웠다(崇禎 丙子 四月日始 癸巳四月日立)'라는 건립연대가 있다. 이 아래쪽에는 음기와 다른 서체와 작은 글씨로 '길이가 18척 너비가 9척(長十八尺 廣九尺)'이라는 비석의 규모를 새겨 놓기도 했다. 음기의 내용은 전면의 [[이경석|이경석(李景奭)]]의 글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도선|도선국사(道詵國師)]]의 이야기만 담고 있을 뿐 [[수미|수미선사(守眉禪師)]]의 내용은 전혀 없다. 음기 옆으로는 [[인평대군|인평대군(麟坪大君)]]을 시작으로 당시 정치인들의 직함과 성명이 나열되어 있다. 음기와 [[인평대군|인평대군]] 등 관료 직함 아래로는 산중질(山中秩), 시주질(施主秩), 공장질(工匠秩) 등이 적혀 있다.<ref>김민규, 「〈도선국사·수미선사비〉의 제작 장인과 양식 연구」, 『문화재』48, 국립문화재연구소, 2015, 65쪽.</ref>
  
 
=='''지식관계망'''==
 
=='''지식관계망'''==

2017년 10월 6일 (금) 10:16 판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
(靈巖 道岬寺 道詵國師 守眉禪師碑)
BHST Dogapsa Doseon-Sumi stele.jpg
대표명칭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
영문명칭 Stele for State Preceptor Doseon and Master Sumi of Dogapsa Temple, Yeongam
한자 靈巖 道岬寺 道詵國師 守眉禪師碑
이칭 도갑사도선수미양대사비(道岬寺道詵守眉兩大師碑)
주소 전남 영암군 군서면 도갑사로 306, 도갑사 (도갑리)
문화재 지정번호 보물 제1395호
문화재 지정일 2004년 1월 26일
찬자 이경석(李景奭), 이수인(李壽仁), 정두경(鄭斗卿)
서자 김광욱(金光煜), 오준(吳竣), 김시간(金時暕), 김비(金棐)
각자 미상
서체 해서(楷書)
승려 도선(道詵), 수미(守眉)
건립연대 1653년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사(道岬寺)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선각국사 도선(先覺國師 道詵, 827-898)과 조선시대의 승려인 묘각화상 수미(妙覺和尙 守眉)탑비.

내용

개요

전체 높이 약 4.8m, 폭 1.42m. 탑비는 귀부(龜趺), 비신(碑身)[1], 이수(螭首)를 모두 갖춘 형태로, 도갑사(道岬寺)의 부도전(浮屠田) 부근에 건립된 보호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2]

보통 비는 한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는데 반해 이 비는 비명이 도선국사(道詵國師) 수미선사(守眉禪師) 두 사람의 공동명의로 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은 주로 도선국사에 관한 것이며, 수미선사에 대해서는 1457년에 도갑사를 중창한 내용이 전하고 있다.[3]

이 비는 1636년(인조 14) 4월에 건립을 시작하여 17년 후인 1653년(효종 4) 4월에 완료되었다. 비문에 따르면 본래 이곳에 도선국사의 고비(古碑)[4]가 있었는데 비바람으로 글자가 마멸되고 귀부의 머리가 결락되는 등 훼손이 심하여 다시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도갑사를 중창한 옥습대사(玉習大師)가 3년에 걸쳐 각 사찰에 다니면서 찬조를 구하는 한편, 신도들로부터 모금하고 한양까지 가서 비문을 청탁하였다. 비석에 사용된 돌은 전라도 관찰사의 도움으로 부역을 통해 여산(礪山)[5] 에서 운반해 왔으며, 돌이 도착한 이후 7개월 만에 공사가 완료되었다고 한다.[6]

귀부의 머리는 오른쪽으로 약간 튼 형태인데 입에는 상·하 8개의 이빨로 여의주를 꽉 물고 있는 형상이다. 등에는 전형적인 귀갑문 대신 평행 사선문(斜線紋)으로 정연하게 음각하였다. 비신은 귀부이수와는 달리 대리석으로 조성했다. 비신의 양 측면에는 운룡문(雲龍紋)이 가득 양각되었는데,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마치 살아 있는 쌍룡이 구름을 타고 승천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수에는 운문 위에 2마리의 용이 각각 이수의 양끝을 물고 있는 형상을 지니고 있다.[7]

1974년 5월 22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었고, 2004년 1월 26일에 보물 제1395호로 승격되었다.

비문

비문은 전면에 2개, 후면에 1개 등 모두 3개의 내용으로 구분되어 일반적인 비문과는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 세 부분의 명문이 모두 동일한 건립 연대를 나타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 부분의 찬자(撰者)와 서자(書者)가 모두 다른 것은 비석을 다시 세우기로 계획한 시점부터 모금 기간과 공사 기간을 합쳐 21년이라는 긴 기간이 걸렸기 때문으로 보인다.[8]

전면

전면의 상단에는 김광욱(金光煜)이 쓴 '월출산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 비명(月出山 道岬寺 道詵國師守眉大禪師碑銘)'이라는 전액(篆額)이 있다. 그 아래에 있는 '월출산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대선사 비명병서(月出山 道岬寺 道詵國師守眉大禪師碑銘幷序)'라는 제목의 글은 이경석(李景奭)이 짓고 오준(吳竣)이 쓴 것이다. 비문의 말미에 '1636년 4월에 시작하여 1653년 4월에 세웠다(崇禎 丙子 四月日始 癸巳四月日立)'라고 건립연대가 있다. 그 아래로 찬자(撰者), 서자(書者), 전서자(篆書者)의 직함이 있다. 비문의 내용은 도선국사(道詵國師)의 일생을 정리한 것이 대부분으로, 수미선사(守眉禪師)에 대한 내용은 기술되어 있지 않다.[9]

전면의 좌측에 위치한 추기(追記)는 홍문관 부수찬인 이수인(李壽仁)이 짓고, 진사 김시간(金時暕)이 쓴 것으로 연대는 없다. 추기의 내용은 비석 건립 과정이 전반부를 차지하고 후반부는 도선국사의 생애를 간단하게 서술하고 있다.[10]

후면

후면의 상단에는 김시간(金時暕)이 쓴 '국사도선비음명(國師道詵碑陰銘)'이라는 전자(篆字)[11] 글씨체의 제목이 있다. 그 아래로 정두경(鄭斗卿)이 찬하고 김비(金棐)가 쓴 음기(陰記)가 있다. 음기 말미에 찬자(撰者), 서자(書者), 전서자(篆書者)의 직함과 성명이 병기되어 있으며, 끝에 '1636년 4월에 시작하여 1653년 4월에 세웠다(崇禎 丙子 四月日始 癸巳四月日立)'라는 건립연대가 있다. 이 아래쪽에는 음기와 다른 서체와 작은 글씨로 '길이가 18척 너비가 9척(長十八尺 廣九尺)'이라는 비석의 규모를 새겨 놓기도 했다. 음기의 내용은 전면의 이경석(李景奭)의 글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도선국사(道詵國師)의 이야기만 담고 있을 뿐 수미선사(守眉禪師)의 내용은 전혀 없다. 음기 옆으로는 인평대군(麟坪大君)을 시작으로 당시 정치인들의 직함과 성명이 나열되어 있다. 음기와 인평대군 등 관료 직함 아래로는 산중질(山中秩), 시주질(施主秩), 공장질(工匠秩) 등이 적혀 있다.[12]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 영암 도갑사 A는 B에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 도선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 수미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 이경석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A ekc:writer B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 이수인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A ekc:writer B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 정두경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A ekc:writer B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 김광욱 A는 B가 비문을 썼다 A ekc:calligrapher B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 오준 A는 B가 비문을 썼다 A ekc:calligrapher B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 김시간 A는 B가 비문을 썼다 A ekc:calligrapher B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 김비 A는 B가 비문을 썼다 A ekc:calligrapher B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1. 비문을 새긴 비석의 몸체
  2. 최인선, "도갑사도선수미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최인선, "도갑사도선수미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오래된 비석
  5. "여산,『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최연식, "영암 도갑사 도선 국사·수미 선사비",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7.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ㆍ수미선사비",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문화재청.
  8. 최연식, "영암 도갑사 도선 국사·수미 선사비",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9. 김민규, 「〈도선국사·수미선사비〉의 제작 장인과 양식 연구」, 『문화재』48, 국립문화재연구소, 2015, 63-65쪽.
  10. 김민규, 「〈도선국사·수미선사비〉의 제작 장인과 양식 연구」, 『문화재』48, 국립문화재연구소, 2015, 65쪽.
  11. "전자", 문화콘텐츠닷컴(문화원형 용어사전)『네이버지식백과』online.
  12. 김민규, 「〈도선국사·수미선사비〉의 제작 장인과 양식 연구」, 『문화재』48, 국립문화재연구소, 2015, 65쪽.

참고문헌

  • 김민규, 「〈도선국사·수미선사비〉의 제작 장인과 양식 연구」, 『문화재』48, 국립문화재연구소, 2015, 62-79쪽.
  • 박준형, 「나의 첫 탁본 여행인 도갑사의 《월출산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와 《수미왕사비》의 탁본을 다녀와서…」, 『전라금석문연구』창간호, 전라금석문연구회, 2003, 5-6쪽.
  • 이영숙, 「영암 도갑사 도선·수미비의 조성배경에 대한 고찰」, 『문화사학』32, 한국문화사학회, 2009, 173-193쪽.
  • 이지관, "영암 도갑사 도선 수미 양대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400-455쪽.
  • "도갑사도선수미양대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 최인선, "도갑사도선수미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최연식, "영암 도갑사 도선 국사·수미 선사비",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ㆍ수미선사비",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