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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9년(숙종 15) 후궁 [[희빈 장씨|소의장씨(昭儀張氏)]] 소생을 원자로 정호(定號)하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장악한 정국(政局).
 
1689년(숙종 15) 후궁 [[희빈 장씨|소의장씨(昭儀張氏)]] 소생을 원자로 정호(定號)하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장악한 정국(政局).
 
=='''내용'''==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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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환국]]의 정치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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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붕당간의 견제를 유지하며 왕권을 안정시켜왔던 [[서인]]과 [[남인]]은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붕당정치 운영과정에서 첨예한 대립을 보여 왔다. [[예송논쟁]]에서 드러나듯이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표면화되자, [[조선 숙종|숙종(肅宗)]]은 강력한 왕권을 추구의 의지를 보였다. [[조선 숙종|숙종]]은 자신의 왕권 안정을 위해 지금까지의 당파연립 방식을 버리고, 붕당을 자주 교체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를 ‘환국’이라 하는데, 환국정치의 운영은 말하자면 군주가 내각을 자주 교체하여 신하들의 충성심을 경쟁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방법이었다. [[조선 숙종|숙종]] 초반은 2차 [[예송논쟁]]의 승리로 [[남인]]이 주도권을 잡던 시기였는데, 이에 대해 [[서인]]은 [[남인]]의 정적으로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조선 숙종|숙종]] 역시 [[남인]]의 집권이 계속되는 것에 대해서 경계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환국의 형태로 드러났는데, [[경신환국|경신환국(庚申換局)]], [[기사환국]], [[갑술환국|갑술환국(甲戌換局)]]이 그것이며, 그 주도 세력 역시 [[서인]]-[[남인]]-[[서인]]으로 변화되었다.<ref>이정민,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09 기사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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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환국]]의 전주곡, [[경신환국]]과 [[남인]]의 축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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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환국]]은 탁남의 대표인 [[허적]]을 중심으로 한 [[남인]]이 권력을 주도하는 것에 대해 위기감을 느낀 [[서인]]계열이 [[남인]]을 축출하기 위해 역모사건의 주동자로 [[허적]]의 아들인 [[허견|허견(許堅)]]을 지목하였다. 급기야 1680년 (숙종 5) [[김석주|김석주(金錫胄)]]의 밀객인 [[정원로|정원로(鄭元老)]]는 [[허견]]과 [[복선군|복선군(福善君)]]을 역모사건으로 고변하였다.[[복선군]]과 [[허견]]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였고, 이어 사건의 전모가 밝혀졌다. [[조선 숙종|숙종]]은 [[허견]]은 [[군기시|군기시(軍器寺)]] 앞길에서 능지처사(凌遲處死)하고 [[복선군]]은 종실의 예우를 갖추어 교수형(絞首刑)에 처한다고 발표하였다.  [[남인]]의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윤휴|윤휴(尹鑴)]] 역시 처형을 당하였으며 이 옥사가 완전히 마무리되는 5월까지 종친 세력과 연결된 100여 명이 넘는 [[남인]]은 갖가지 죄목으로 처벌되었다.<ref>이정민,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09 기사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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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환국]]의 단행, [[서인]]의 몰락과 [[남인]]의 재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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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빈 장씨]] 숙원에 책봉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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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숙종|숙종]]은 즉위한 뒤 [[김만기|김만기(金萬基)]]의 딸인 [[인경왕후|인경왕후(仁敬王后)]]를 왕비로 맞았지만, 1680년(숙종 7) 10월에 사망하자, 1681년(숙종 8) [[민유중|민유중(閔維重)]]의 딸인 [[인현왕후|인현왕후(仁顯王后)]]와 혼례를 치르고, 계비로 삼았다.  그러나 이 무렵 즈음 [[조선 숙종|숙종]]은 궁중 나인이었던 [[희빈 장씨|장씨]]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이를 눈치 챈 대비 [[명성왕후|명성왕후(明聖王后)]]는 [[희빈 장씨|장씨]]를 궁 밖으로 쫒아냈지만 [[명성왕후]]가 사망한 뒤, 다시 궁중으로 돌아왔으며 [[조선 숙종|숙종]]의 총애를 바탕으로 교만하고 방자하게 굴었다. 급기야 1686년([[조선 숙종|숙종]] 12)에는 [[희빈 장씨|장씨]]를 숙원(淑媛)으로 책봉하였다.<ref>이정민,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09 기사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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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빈 장씨]]의 출신배경과 [[조선 숙종|숙종]]의 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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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숙종|숙종]]의 비인 [[인경왕후]], [[인현왕후]]는 모두 [[서인]] 노론계열 출신이었다. 그에 반해 [[희빈 장씨|장희빈]]의 가계는 [[남인]]과 연루되어있었다. [[희빈 장씨|장희빈]]은 [[남인]] 계열과 관련이 있었고, 이러한 [[희빈 장씨|장희빈]]의 존재는 [[서인]]계열에게는 위기로 다가왔다. 그러던 중 5년이 넘도록 후사를 보지 못하였던 [[인현왕후]] 대신 1688년(숙종 14) 10월 27일 [[희빈 장씨|장씨]]가 왕자를 낳았다. 왕자가 출생한지 채 석달도 되지 않은 시점에 왕자를 원자로 정하고자 한 것이 그것이었다. [[조선 숙종|숙종]]의 뜻밖의 발언에 대해 신료들은 [[인현왕후|중궁]]에게서 별 소식이 없다면 국본이 자연스럽게 정해질 것이니 서두르지 말고 몇 년을 기다릴 것을 청하였지만, [[조선 숙종|숙종]]은 세자가 정해지지 않으면 민심이 안정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대신들의 논의를 일축하였다. 그리고 5일 만에 왕자의 정호를 종묘사직에 고하고 [[희빈 장씨|장씨]]를 ‘희빈(禧嬪)’으로 승격하였다.<ref>이정민,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09 기사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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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의 상소와 [[서인]]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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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2월 1일 [[송시열]]이 국왕에게 올린 소는 정계에 큰 파란을 일으키게 된다. [[송시열]]은 후궁에게 왕자의 경사가 생긴 것은 매우 기쁜 일이지만, 원자로 정하는 것이 너무 이르다는 견해도 무시할 수 없다는 뜻을 피력하였다. 그러자 [[조선 숙종|숙종]]은 대명 황제는 황자를 낳은 지 4달 만에 봉호한 일이 있음을 언급하면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있다면 명나라의 예를 들어 국본을 일찍이 세우기를 청했어야 하는데, [[송시열]]의 소장은 불만이 가득하다고 분노하였다.[[조선 숙종|숙종]]은 승지 [[이현기|이현기(李玄紀)]] [[윤빈|윤빈(尹彬)]], 교리 [[남치훈|남치훈(南致熏)]], [[이익수|이익수(李益壽)]] 등과 의논하여 [[송시열]]의 관작을 삭탈하여 외지로 출송시켰다. 이어 [[조선 숙종|숙종]]과 [[남인]]들은 영의정 [[김수흥]]을 파직시켰고, [[권대운|권대운(權大運)]] [[목내선|목내선(睦來善)]], [[김덕원|김덕원(金德遠)]] 등 [[남인]]계 인사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ref>이정민,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09 기사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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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술환국]]과 [[남인]]의 몰락 [[서인]] 다시 재집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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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숙종|숙종]]은 기사환국 이후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였으며, [[남인]]들 역시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집권함은 물론 [[서인]]에게 보복하는 기회로 삼았다. [[조선 숙종|숙종]]은 원자정호 등의 일시적 의도는 실현하였지만 이런 과정에서 한 당파인 [[남인]]의 전권을 독점시켰기 때문에, 이를 조정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조처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5년 뒤 [[갑술환국]]이 일어나 [[남인]]은 몰락하고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된다.<ref>이정민,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09 기사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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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환국]]의 정치적 배경===
 
===[[기사환국]]의 정치적 배경===
 
[[인조반정|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붕당간의 견제를 유지하며 왕권을 안정시켜왔던 [[서인]]과 [[남인]]은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붕당정치 운영과정에서 첨예한 대립을 보여 왔다. 대표적인 경우가 [[예송논쟁|예송(禮訟)]]이다. [[조선 현종|현종]] 즉위 초의 1659년(현종 1) 1차 [[예송논쟁]]은 [[조선 효종|효종]]의 사망 이후 [[조선 효종|효종]]에 대한 [[장렬왕후|장렬왕후(莊烈王后)]]의 복상문제가 화두가 된 것으로 [[허목|허목(許穆)]], [[윤휴|윤휴(尹鑴)]], [[윤선도|윤선도(尹善道)]] 등 [[남인]]은 3년상을, [[송시열|[[송시열]](宋時烈)]], [[송준길|송준길(宋浚吉)]]의 [[서인]]은 1년상을 주장함으로써 서로간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조선 현종|현종]]은 [[서인]]의 주장을 채택함으로써 [[남인]]은 실각하여 [[허적|허적(許積)]]을 비롯한 소수의 [[남인]]만이 참여하는 속에서 [[서인]]의 우세가 지속되었다. 1674년(현종 15)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인선왕후(仁宣王后)]]의 사망을 계기로 [[예송논쟁]]이 다시 일어났는데, [[송시열]] 등 [[서인]]은 [[조선 효종|효종]]의 어머니인 [[자의대비]]가 입어야 할 상복을 9개월로 주장했고, [[허목]] 등 [[남인]]은 1년 상복을 주장했다. 이 [[예송논쟁]]에서는 [[조선 현종|현종]]이 [[남인]]의 주장을 채택함으로써 [[남인]]이 정계에 대거 진출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예송논쟁]]에서 드러나듯이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표면화되자, [[조선 숙종|숙종(肅宗)]]은 강력한 왕권을 추구의 의지를 보였다. [[조선 숙종|숙종]]은 자신의 왕권 안정을 위해 지금까지의 당파연립 방식을 버리고, 붕당을 자주 교체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를 ‘환국’이라 하는데, 환국정치의 운영은 말하자면 군주가 내각을 자주 교체하여 신하들의 충성심을 경쟁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방법이었다. [[조선 숙종|숙종]] 초반은 2차 [[예송논쟁]]의 승리로 [[남인]]이 주도권을 잡던 시기였는데, 이에 대해 [[서인]]은 [[남인]]의 정적으로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조선 숙종|숙종]] 역시 [[남인]]의 집권이 계속되는 것에 대해서 경계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환국의 형태로 드러났는데, [[경신환국|경신환국(庚申換局)]], [[기사환국]], [[갑술환국|갑술환국(甲戌換局)]]이 그것이며, 그 주도 세력 역시 [[서인]]-[[남인]]-[[서인]]으로 변화되었다.<ref>이정민,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09 기사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인조반정|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붕당간의 견제를 유지하며 왕권을 안정시켜왔던 [[서인]]과 [[남인]]은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붕당정치 운영과정에서 첨예한 대립을 보여 왔다. 대표적인 경우가 [[예송논쟁|예송(禮訟)]]이다. [[조선 현종|현종]] 즉위 초의 1659년(현종 1) 1차 [[예송논쟁]]은 [[조선 효종|효종]]의 사망 이후 [[조선 효종|효종]]에 대한 [[장렬왕후|장렬왕후(莊烈王后)]]의 복상문제가 화두가 된 것으로 [[허목|허목(許穆)]], [[윤휴|윤휴(尹鑴)]], [[윤선도|윤선도(尹善道)]] 등 [[남인]]은 3년상을, [[송시열|[[송시열]](宋時烈)]], [[송준길|송준길(宋浚吉)]]의 [[서인]]은 1년상을 주장함으로써 서로간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조선 현종|현종]]은 [[서인]]의 주장을 채택함으로써 [[남인]]은 실각하여 [[허적|허적(許積)]]을 비롯한 소수의 [[남인]]만이 참여하는 속에서 [[서인]]의 우세가 지속되었다. 1674년(현종 15)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인선왕후(仁宣王后)]]의 사망을 계기로 [[예송논쟁]]이 다시 일어났는데, [[송시열]] 등 [[서인]]은 [[조선 효종|효종]]의 어머니인 [[자의대비]]가 입어야 할 상복을 9개월로 주장했고, [[허목]] 등 [[남인]]은 1년 상복을 주장했다. 이 [[예송논쟁]]에서는 [[조선 현종|현종]]이 [[남인]]의 주장을 채택함으로써 [[남인]]이 정계에 대거 진출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예송논쟁]]에서 드러나듯이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표면화되자, [[조선 숙종|숙종(肅宗)]]은 강력한 왕권을 추구의 의지를 보였다. [[조선 숙종|숙종]]은 자신의 왕권 안정을 위해 지금까지의 당파연립 방식을 버리고, 붕당을 자주 교체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를 ‘환국’이라 하는데, 환국정치의 운영은 말하자면 군주가 내각을 자주 교체하여 신하들의 충성심을 경쟁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방법이었다. [[조선 숙종|숙종]] 초반은 2차 [[예송논쟁]]의 승리로 [[남인]]이 주도권을 잡던 시기였는데, 이에 대해 [[서인]]은 [[남인]]의 정적으로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조선 숙종|숙종]] 역시 [[남인]]의 집권이 계속되는 것에 대해서 경계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환국의 형태로 드러났는데, [[경신환국|경신환국(庚申換局)]], [[기사환국]], [[갑술환국|갑술환국(甲戌換局)]]이 그것이며, 그 주도 세력 역시 [[서인]]-[[남인]]-[[서인]]으로 변화되었다.<ref>이정민,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09 기사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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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술환국]]과 [[남인]]의 몰락 [[서인]] 다시 재집권하다===
 
===[[갑술환국]]과 [[남인]]의 몰락 [[서인]] 다시 재집권하다===
 
[[조선 숙종|숙종]]은 기사환국 이후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였으며, [[남인]]들 역시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집권함은 물론 [[서인]]에게 보복하는 기회로 삼았다. [[조선 숙종|숙종]]은 원자정호 등의 일시적 의도는 실현하였지만 이런 과정에서 한 당파인 [[남인]]의 전권을 독점시켰기 때문에, 이를 조정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조처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5년 뒤 [[갑술환국]]이 일어나 [[남인]]은 몰락하고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된다.<ref>이정민,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09 기사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조선 숙종|숙종]]은 기사환국 이후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였으며, [[남인]]들 역시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집권함은 물론 [[서인]]에게 보복하는 기회로 삼았다. [[조선 숙종|숙종]]은 원자정호 등의 일시적 의도는 실현하였지만 이런 과정에서 한 당파인 [[남인]]의 전권을 독점시켰기 때문에, 이를 조정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조처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5년 뒤 [[갑술환국]]이 일어나 [[남인]]은 몰락하고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된다.<ref>이정민,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09 기사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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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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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5일 (목) 16:45 판

기사환국(己巳換局)
이정민, "기사환국",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대표명칭 기사환국
한자표기 己巳換局
유형 사건
시대 조선시대
날짜 1689년
관련인물 후궁장씨(장희빈) 인현왕후
관련단체 서인, 남인



정의

1689년(숙종 15) 후궁 소의장씨(昭儀張氏) 소생을 원자로 정호(定號)하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장악한 정국(政局).

내용

기사환국의 정치적 배경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붕당간의 견제를 유지하며 왕권을 안정시켜왔던 서인남인은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붕당정치 운영과정에서 첨예한 대립을 보여 왔다. 예송논쟁에서 드러나듯이 서인남인의 대립이 표면화되자, 숙종(肅宗)은 강력한 왕권을 추구의 의지를 보였다. 숙종은 자신의 왕권 안정을 위해 지금까지의 당파연립 방식을 버리고, 붕당을 자주 교체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를 ‘환국’이라 하는데, 환국정치의 운영은 말하자면 군주가 내각을 자주 교체하여 신하들의 충성심을 경쟁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방법이었다. 숙종 초반은 2차 예송논쟁의 승리로 남인이 주도권을 잡던 시기였는데, 이에 대해 서인남인의 정적으로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숙종 역시 남인의 집권이 계속되는 것에 대해서 경계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환국의 형태로 드러났는데, 경신환국(庚申換局), 기사환국, 갑술환국(甲戌換局)이 그것이며, 그 주도 세력 역시 서인-남인-서인으로 변화되었다.[1]

기사환국의 전주곡, 경신환국남인의 축출

경신환국은 탁남의 대표인 허적을 중심으로 한 남인이 권력을 주도하는 것에 대해 위기감을 느낀 서인계열이 남인을 축출하기 위해 역모사건의 주동자로 허적의 아들인 허견(許堅)을 지목하였다. 급기야 1680년 (숙종 5) 김석주(金錫胄)의 밀객인 정원로(鄭元老)허견복선군(福善君)을 역모사건으로 고변하였다.복선군허견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였고, 이어 사건의 전모가 밝혀졌다. 숙종허견군기시(軍器寺) 앞길에서 능지처사(凌遲處死)하고 복선군은 종실의 예우를 갖추어 교수형(絞首刑)에 처한다고 발표하였다. 남인의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윤휴(尹鑴) 역시 처형을 당하였으며 이 옥사가 완전히 마무리되는 5월까지 종친 세력과 연결된 100여 명이 넘는 남인은 갖가지 죄목으로 처벌되었다.[2]

기사환국의 단행, 서인의 몰락과 남인의 재등장

희빈 장씨 숙원에 책봉되다

숙종은 즉위한 뒤 김만기(金萬基)의 딸인 인경왕후(仁敬王后)를 왕비로 맞았지만, 1680년(숙종 7) 10월에 사망하자, 1681년(숙종 8) 민유중(閔維重)의 딸인 인현왕후(仁顯王后)와 혼례를 치르고, 계비로 삼았다. 그러나 이 무렵 즈음 숙종은 궁중 나인이었던 장씨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이를 눈치 챈 대비 명성왕후(明聖王后)장씨를 궁 밖으로 쫒아냈지만 명성왕후가 사망한 뒤, 다시 궁중으로 돌아왔으며 숙종의 총애를 바탕으로 교만하고 방자하게 굴었다. 급기야 1686년(숙종 12)에는 장씨를 숙원(淑媛)으로 책봉하였다.[3]

희빈 장씨의 출신배경과 숙종의 총애

숙종의 비인 인경왕후, 인현왕후는 모두 서인 노론계열 출신이었다. 그에 반해 장희빈의 가계는 남인과 연루되어있었다. 장희빈남인 계열과 관련이 있었고, 이러한 장희빈의 존재는 서인계열에게는 위기로 다가왔다. 그러던 중 5년이 넘도록 후사를 보지 못하였던 인현왕후 대신 1688년(숙종 14) 10월 27일 장씨가 왕자를 낳았다. 왕자가 출생한지 채 석달도 되지 않은 시점에 왕자를 원자로 정하고자 한 것이 그것이었다. 숙종의 뜻밖의 발언에 대해 신료들은 중궁에게서 별 소식이 없다면 국본이 자연스럽게 정해질 것이니 서두르지 말고 몇 년을 기다릴 것을 청하였지만, 숙종은 세자가 정해지지 않으면 민심이 안정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대신들의 논의를 일축하였다. 그리고 5일 만에 왕자의 정호를 종묘사직에 고하고 장씨를 ‘희빈(禧嬪)’으로 승격하였다.[4]

송시열의 상소와 서인의 몰락

그해 2월 1일 송시열이 국왕에게 올린 소는 정계에 큰 파란을 일으키게 된다. 송시열은 후궁에게 왕자의 경사가 생긴 것은 매우 기쁜 일이지만, 원자로 정하는 것이 너무 이르다는 견해도 무시할 수 없다는 뜻을 피력하였다. 그러자 숙종은 대명 황제는 황자를 낳은 지 4달 만에 봉호한 일이 있음을 언급하면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있다면 명나라의 예를 들어 국본을 일찍이 세우기를 청했어야 하는데, 송시열의 소장은 불만이 가득하다고 분노하였다.숙종은 승지 이현기(李玄紀) 윤빈(尹彬), 교리 남치훈(南致熏), 이익수(李益壽) 등과 의논하여 송시열의 관작을 삭탈하여 외지로 출송시켰다. 이어 숙종남인들은 영의정 김수흥을 파직시켰고, 권대운(權大運) 목내선(睦來善), 김덕원(金德遠)남인계 인사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5]

갑술환국남인의 몰락 서인 다시 재집권하다

숙종은 기사환국 이후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였으며, 남인들 역시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집권함은 물론 서인에게 보복하는 기회로 삼았다. 숙종은 원자정호 등의 일시적 의도는 실현하였지만 이런 과정에서 한 당파인 남인의 전권을 독점시켰기 때문에, 이를 조정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조처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5년 뒤 갑술환국이 일어나 남인은 몰락하고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된다.[6]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기사환국 경신환국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89년
기사환국 갑술환국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89년
예송논쟁 기사환국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59년, 1674년
기사환국 숙종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89년
기사환국 인현왕후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89년
기사환국 희빈 장씨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89년
기사환국 송시열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89년
기사환국 서인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89년
기사환국 남인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89년
허적 허견 A는 B의 아버지다
남인 희빈 장씨 A는 B와 관련이 있다
남인 복선군 A는 B와 관련이 있다
남인 복창군 A는 B와 관련이 있다
서인 인현왕후 A는 B와 관련이 있다
서인 송시열 A는 B를 포함한다
서인 김수흥 A는 B를 포함한다
서인 오두인 A는 B를 포함한다
서인 박태보 A는 B를 포함한다
서인 이세화 A는 B를 포함한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689년 기사환국이 일어났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이정민, "기사환국",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2. 이정민, "기사환국",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3. 이정민, "기사환국",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4. 이정민, "기사환국",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5. 이정민, "기사환국",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6. 이정민, "기사환국",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박광용, 「숙종대 기사환국에 대한 검토<당론서 기록에 대한 비교 분석을 중심으로>」, 『東洋學』, Vol 17, 1999, 137-158쪽.

유용한 정보

이정민, "기사환국",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