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정씨 우복종택"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내용) |
(→내용) |
||
37번째 줄: | 37번째 줄: | ||
<!--===우복종택의 구조=== | <!--===우복종택의 구조=== | ||
우산동천 좌측편 넓은 산등성의 중턱에 동향으로 앉아 있다. 1988년에 복원한 5칸 대문채 가운데 나 있는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 건너편에 사랑채 · 안채 · 행랑채가 "튼 ㅁ"자를 이루면서 앉아있고 그 뒷편 오른쪽에 우복 정경세 선생을 모신 불천위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사랑채는 앞쪽에 네벌대 석축을 쌓고 뒤로 조금 물린 곳에 다시 네벌대 기단을 축조하여 앉혔기 때문에 이색적으로 높다. 사랑채에서 대문채 너머 뛰어난 경관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어 『산수헌』이라 했다. <ref>한국학자료센터 온라인 참조 '[http://archive.kostma.net/Family/T2/html/sub4_1.aspx?fid=B061a&clsA=01 우복종택]', <html><online style="color:purple">상주 우산 진주정씨 산수원<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우산동천 좌측편 넓은 산등성의 중턱에 동향으로 앉아 있다. 1988년에 복원한 5칸 대문채 가운데 나 있는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 건너편에 사랑채 · 안채 · 행랑채가 "튼 ㅁ"자를 이루면서 앉아있고 그 뒷편 오른쪽에 우복 정경세 선생을 모신 불천위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사랑채는 앞쪽에 네벌대 석축을 쌓고 뒤로 조금 물린 곳에 다시 네벌대 기단을 축조하여 앉혔기 때문에 이색적으로 높다. 사랑채에서 대문채 너머 뛰어난 경관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어 『산수헌』이라 했다. <ref>한국학자료센터 온라인 참조 '[http://archive.kostma.net/Family/T2/html/sub4_1.aspx?fid=B061a&clsA=01 우복종택]', <html><online style="color:purple">상주 우산 진주정씨 산수원<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 | + | --> | |
===진주정씨와 우복가문=== | ===진주정씨와 우복가문=== | ||
우복종택은 조선 영조가 우복 정경세(1563~1633)선생의 덕을 기려 하사한 땅에 5세손 정주원이 1750년대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는 가옥이다. 진주정씨는 강씨, 하씨와 더불어 [[진양 3성(晉陽3姓)]]의 하나로 불린 진주의 토반, 거족이었다. 이들은 골시대 이래로 진주의 토착세력으로서 강력한 재지적 기반을 구축하는 과거와 관직을 통해 문호를 신장시켜 왔으며 강씨, 하씨 등 진주일대 대성들과의 혼맥을 바탕으로 사회적 기반을 확충해 나갔다. <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尙州 晉州鄭氏 愚伏宗宅 山水軒 所藏 典籍類의 내용과 성격」,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268-9쪽. </ref> | 우복종택은 조선 영조가 우복 정경세(1563~1633)선생의 덕을 기려 하사한 땅에 5세손 정주원이 1750년대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는 가옥이다. 진주정씨는 강씨, 하씨와 더불어 [[진양 3성(晉陽3姓)]]의 하나로 불린 진주의 토반, 거족이었다. 이들은 골시대 이래로 진주의 토착세력으로서 강력한 재지적 기반을 구축하는 과거와 관직을 통해 문호를 신장시켜 왔으며 강씨, 하씨 등 진주일대 대성들과의 혼맥을 바탕으로 사회적 기반을 확충해 나갔다. <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尙州 晉州鄭氏 愚伏宗宅 山水軒 所藏 典籍類의 내용과 성격」,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268-9쪽. </ref> |
2017년 10월 3일 (화) 22:02 판
진주정씨 우복종택() | |
[[file:|270px|thumb|center|]] | |
대표명칭 | 진주정씨 우복종택 |
---|---|
유형 | 주택(한옥) |
|
정의
진주정씨 우복가문의 종택이다.
정의
진주정씨 우복가문의 종택이다.
내용
진주정씨와 우복가문
우복종택은 조선 영조가 우복 정경세(1563~1633)선생의 덕을 기려 하사한 땅에 5세손 정주원이 1750년대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는 가옥이다. 진주정씨는 강씨, 하씨와 더불어 진양 3성(晉陽3姓)의 하나로 불린 진주의 토반, 거족이었다. 이들은 골시대 이래로 진주의 토착세력으로서 강력한 재지적 기반을 구축하는 과거와 관직을 통해 문호를 신장시켜 왔으며 강씨, 하씨 등 진주일대 대성들과의 혼맥을 바탕으로 사회적 기반을 확충해 나갔다. [1]
우복 종택 소장 고서와 고문서
정재봉은 선대의 문적을 유지, 보존하는 데 성혈을 다하는 한편 한국학 연구를 촉진하는 차원에서 일체의 가문 소장 전적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대여하였다.[2] 종택에서 소장하고 있던 문서들은 1948년에 발생한 큰 화재로 인해 대부분의 전적을 이 때 소실하게 되었으며 현대로서는 화재시에 어느 정도의 전적이 소실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복 종택에는 결코 적지 않은 양의 전적이 남아 있으며 종택에 소장된 고문서와 고서는 조선 후기 향촌사회사, 유학사는 물론 고문헌학, 서지학 연구에 있어 커다란 보탬이 될 것으로 보인다. [3]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진주정씨 우복종택 | 진주정씨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진주정시 우복종택 | 정경세 | A는 B에서 이름을 땄다 | |
정의생 | 상주 | A는 B에 입향하였다 | 1300년대 |
정택 | 정의생 | A는 B의 어버이이다 | |
정택 | 진주정씨 우복종택 | A는 B를 건립하였다 | |
정의생 | 정의생의 처 | A는 B의 남편이다 | |
김득제 | 정의생의 처 | A는 B의 어버이이다 | |
정번 | 정의생 | A는 B의 후손이다 | |
정번 | 진주정씨 우복종택 | A는 B를 이건하였다 | 1500년 전후 |
정경세 | 정번 | A는 B의 후손이다 | |
정주원 | 정경세 | A는 B의 후손이다 | |
정주원 | 진주정씨 우복종택 | A는 B를 이건하였다 | 1750년 전후 |
시간 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300년대 | 정택과 정의생을 필두로 한 진주정씨 우복종가가 상주로 입향하였다. |
1500년 전후 | 정번이 율리로 종택을 이건하였다 |
1750년 전후 | 정주원이 종가를 우산으로 이건하였다. |
1946년 | 종택에 발생한 큰 화재로 인해 문건의 절반 이상이 소실되었다 |
공간 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6.475327 | 128.061774 | 경상북도 상주시 의서면에 틀:PAGENAGE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