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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9월 6일 [[청주전투]]에서 [[청주성]]을 수복한 [[조헌]]과 [[영규]]는 근왕<ref>근왕(勤王) : 싸움에서 군사가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일</ref>을 결의하고 북행길에 올랐다. 충청도 아산에 이르렀을 때, 충청도순찰사 [[윤국형|윤국형(尹國馨)]]의 권유로, 때마침 [[금산]]을 점거하고 이어 호남 지방을 침범하려는 왜군을 무찌르기 위하여 공주로 돌아왔다.<ref>김진봉,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7820 금산전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2년 11월 29일.</ref> 그러나 [[조헌]]이 전공을 세우는 것을 시기한 순찰사(巡察使) [[윤국형]]의 방해로 의병들이 뿔뿔이 흩어져 그 수가 700명으로 줄었다. [[조헌]]은 관군의 협조를 얻지 못한 채 단독으로 700의사(義士)와 함께 [[금산]]으로 진격하였고, [[영규]]의 승병과 합세하여 8월 18일 금산성 밖 10리 지점에 진을 쳤다. <ref>"[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30223 금산싸움]",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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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내의 왜군은 우리 군사의 후속 부대가 없는 것을 정탐하고는 복병을 내어 퇴로를 막은 다음, 모든 군사를 나누어 교대로 공격해왔다. [[조헌]]은 명령을 내려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 '의(義)'에 부끄럼이 없게 하라" 하고 힘껏 싸워 왜군의 세 차례 공격을 모두 물리쳤으나, 온종일의 싸움에 화살이 다 떨어져 더 싸울 수가 없었다. 왜군이 일제공격을 감행해 장막 안으로 돌입하니 의병은 육박전을 벌여 한 명의 도망자도 없이 모두 순절했고, [[영규]]의 승군도 모두 전사하였다.<ref>김진봉,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7820 금산전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2년 11월 29일.</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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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병과 승병들은 왜군의 세 차례 공격을 물리쳤으며, 화살이 다한 뒤에도 끝까지 도망치지 않고 육박전으로 맞서다가 조헌과 영규를 비롯한 전원이 순절하였다. 이때 순절한 700의사의 유골을 수습하여 합장한 것이 칠백의총(七百義塚)이다. 이 싸움에서 왜군도 큰 타격을 입어 무주와 옥천에 집결해 있던 병력과 함께 퇴각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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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싸움에서 왜군도 죽은 자가 많아 3일간 그 시체를 거두어 불태우고, 무주와 옥천에 집결해 있던 왜병과 함께 퇴각해버렸다. 이로써 호남·호서 지방이 안전하게 되었으며 나라를 회복하는 하나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 한편, 이 싸움에서 왜군도 죽은 자가 많아 3일간 그 시체를 거두어 불태우고, 무주와 옥천에 집결해 있던 왜병과 함께 퇴각해버렸다. 이로써 호남·호서 지방이 안전하게 되었으며 나라를 회복하는 하나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 ||
이 해 9월 왜군이 물러간 뒤 조헌의 문인 박정량(朴廷亮)이 의사 700명의 유골을 모아 큰 무덤 한 곳에 합장하였다. 후세에 이를 ‘칠백의총(七百義塚)’이라 불렀다. 선비들이 매년 이에 시향을 받들어왔으며, 1971년 정부에서 이 지역을 성역화하였다. | 이 해 9월 왜군이 물러간 뒤 조헌의 문인 박정량(朴廷亮)이 의사 700명의 유골을 모아 큰 무덤 한 곳에 합장하였다. 후세에 이를 ‘칠백의총(七百義塚)’이라 불렀다. 선비들이 매년 이에 시향을 받들어왔으며, 1971년 정부에서 이 지역을 성역화하였다. |
2017년 10월 2일 (월) 01:45 판
@ 일러스트 추가 예정
2차 금산전투(錦山戰鬪) | |
대표명칭 | 2차 금산전투 |
---|---|
한자표기 | 錦山戰鬪 |
이칭 | 2차 금산싸움 |
유형 | 전투 |
시대 | 조선 |
날짜 | 1592년 9월 23일-24일 |
관련인물 | 조헌, 영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
관련장소 | 금산, 금산 칠백의총 기념관 |
관련유물유적 | 금산 종용사, 금산 칠백의총 |
목차
정의
임진왜란 때인 1592년(선조 25) 9월 23일부터 9월 24일까지 의병장 조헌이 지휘한 의병이 왜군과 금산에서 싸운 전투.
내용
배경
9월 6일 청주전투에서 청주성을 수복한 조헌과 영규는 근왕[1]을 결의하고 북행길에 올랐다. 충청도 아산에 이르렀을 때, 충청도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의 권유로, 때마침 금산을 점거하고 이어 호남 지방을 침범하려는 왜군을 무찌르기 위하여 공주로 돌아왔다.[2] 그러나 조헌이 전공을 세우는 것을 시기한 순찰사(巡察使) 윤국형의 방해로 의병들이 뿔뿔이 흩어져 그 수가 700명으로 줄었다. 조헌은 관군의 협조를 얻지 못한 채 단독으로 700의사(義士)와 함께 금산으로 진격하였고, 영규의 승병과 합세하여 8월 18일 금산성 밖 10리 지점에 진을 쳤다. [3]
경과
성내의 왜군은 우리 군사의 후속 부대가 없는 것을 정탐하고는 복병을 내어 퇴로를 막은 다음, 모든 군사를 나누어 교대로 공격해왔다. 조헌은 명령을 내려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 '의(義)'에 부끄럼이 없게 하라" 하고 힘껏 싸워 왜군의 세 차례 공격을 모두 물리쳤으나, 온종일의 싸움에 화살이 다 떨어져 더 싸울 수가 없었다. 왜군이 일제공격을 감행해 장막 안으로 돌입하니 의병은 육박전을 벌여 한 명의 도망자도 없이 모두 순절했고, 영규의 승군도 모두 전사하였다.[4]
의병과 승병들은 왜군의 세 차례 공격을 물리쳤으며, 화살이 다한 뒤에도 끝까지 도망치지 않고 육박전으로 맞서다가 조헌과 영규를 비롯한 전원이 순절하였다. 이때 순절한 700의사의 유골을 수습하여 합장한 것이 칠백의총(七百義塚)이다. 이 싸움에서 왜군도 큰 타격을 입어 무주와 옥천에 집결해 있던 병력과 함께 퇴각하였다.
한편, 이 싸움에서 왜군도 죽은 자가 많아 3일간 그 시체를 거두어 불태우고, 무주와 옥천에 집결해 있던 왜병과 함께 퇴각해버렸다. 이로써 호남·호서 지방이 안전하게 되었으며 나라를 회복하는 하나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 해 9월 왜군이 물러간 뒤 조헌의 문인 박정량(朴廷亮)이 의사 700명의 유골을 모아 큰 무덤 한 곳에 합장하였다. 후세에 이를 ‘칠백의총(七百義塚)’이라 불렀다. 선비들이 매년 이에 시향을 받들어왔으며, 1971년 정부에서 이 지역을 성역화하였다.
8월 15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광주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킨 고경명(高敬命)은 7,0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한성을 향해 북상하였다. 그가 전주를 출발하여 여산에 이르렀을 때 왜군이 전라도로 침입해 들어올 것이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고경명은 당초 계획을 바꾸어 왜군을 물리친 후 북상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전라도 방어사 곽영은 금산 서쪽 진산에 진을 치고 있었다.[5]
한편,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지휘하는 왜군은 8월 15일 전주로 진출하려다가 이치전투(梨峙戰鬪)에서 권율(權慄, 1537~1599)이 이끈 조선군에게 크게 패하고 금산으로 철수하여 1만 5000여 명의 병력이 금산에 주둔하고 있었다. 고경명의 의병은 곽영의 관군과 함께 진산을 거쳐 8월 15일 금산에 도착하여 금산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왜군은 성 위에서 조총 사격으로 조선군의 접근을 저지하려고만 할 뿐 적극적인 대항을 하지 않았다. 이는 전날 이치전투에서 대패하여 병력 손실이 많아 미처 전열을 정비하지 못한 때문이었다.[6]
8월 16일
8월 16일 아침, 고경명은 금산성 서문을 공격 목표로 잡고 의병의 주력을 서문 공격에 투입하였다. 그때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조선군의 관군이 허약한 것을 보고 동문으로 출진하여 관군을 공격하였다.[7] 왜군의 선제공격을 받은 곽영과 관군은 후퇴하였고 덩달아 사기가 떨어진 의병군도 붕괴되고 말았다. 고경명은 끝까지 왜적과 맞서 싸우다가 아들 고인후 등과 함께 순절하였다.[8]
결과 및 의의
1차 금산전투는 관군과 의병의 연합작전 실패로 비록 금산성 탈환에는 실패하였지만, 왜군의 전주 진출을 저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9]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금산전투 | 1차 금산전투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금산전투 | 2차 금산전투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 금산전투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고경명 | 1차 금산전투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곽영 | 1차 금산전투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고인후 | 1차 금산전투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고경명 | 고인후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고경명 | 금산 종용사 | A는 B에 제향되었다 | A ekc:isEnshrinedIn B |
고인후 | 금산 종용사 | A는 B에 제향되었다 | A ekc:isEnshrinedIn B |
고경명 | 이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주석
- ↑ 근왕(勤王) : 싸움에서 군사가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일
- ↑ 김진봉, "금산전투",
『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2년 11월 29일. - ↑ "금산싸움",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 ↑ 김진봉, "금산전투",
『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2년 11월 29일. - ↑ 문안식, "금산성 전투",
『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금산전투(1차)", 한민족 전투원형,
『문화콘텐츠닷컴』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 ↑ "금산전투(1차)", 한민족 전투원형,
『문화콘텐츠닷컴』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 ↑ "금산싸움",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 ↑ 문안식, "금산성 전투",
『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웹 자원
유용한 정보
- 김진봉, "금산전투",
『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2년 11월 29일.
- 김진봉, "금산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