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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김지영,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95 갑술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ref>김지영,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95 갑술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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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29일 (금) 18:45 판
갑술환국(甲戌換局) | |
대표명칭 | 갑술환국 |
---|---|
한자표기 | 甲戌換局 |
이칭 | 갑술옥사, 감술경화 |
시대 | 조선 |
날짜 | 1694년 |
관련인물 | 인현왕후, 조선 숙종, 희빈 장씨 |
관련단체 | 금위영 |
관련유물유적 | 한산이씨 고행록 |
목차
정의
1794년(숙종 20) 폐출된 인현왕후(仁顯王后)가 복위되고 왕후가 되었던 세자의 생모 장씨를 다시 희빈(禧嬪)으로 강등시키는 조치와 함께 남인(南人)이 축출되고 소론(少論)과 노론(老論)이 다시 집권하게 된 정치적 사건이다. [1]
내용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
1688년 10월 남인과 연결되어 있는 역관 집안 출신의 소의 장씨가 왕자를 낳았다. 이듬해 숙종은 태어난 지 두 달된 왕자의 명호를 ‘원자(元子)’ 즉 차기에 왕위를 계승할 아이로 못박고자 했다. 이에 대해 서인 신료들은 왕비 인현왕후가 아직 젊고 왕자를 생산할 수 있다고 하며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결국 숙종이 이를 고집하여 왕자를 원자로 정했고, 장씨를 희빈으로 승격시켰다. [2]
갑술환국의 경과
남인과 숙원 최씨 독살 사건
1794년 3월 우의정 민암(閔黯)이 소론계 한중혁(韓重赫)이 돈을 모아 장희재나 동평군 항(東平君 杭) 등 실권자에게 접근하여 궁중의 틈을 엿보았고, 김춘택(金春澤) 등도 이에 연루되어 있다는 내용을 아뢰었다. 관련자들을 잡아들여 문초를 했으나 완강하게 부인하며 혐의를 인정하지 않던 때에 또 다른 고변서가 올라왔다. 그 내용은 장희재가 돈으로 사람을 매수하여 숙원(淑媛) 최씨를 독살하려 했고, 또 신천군수와 훈국별장 등이 반역을 도모하는데 민암 등 남인이 결탁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민암이 최초의 고변의 사주자라는 것이 밝혀진 후 숙종은 다시 남인들을 대거 축출하고 남구만을 영의정에 임명하였다. 남인계 영의정 권대운, 좌의정 목래선 등이 관작이 삭탈되었고 민암, 유명현(柳命賢) 등이 모두 유배형을 받았다. [3]
남인의 몰락과 서인의 정계 주도
갑술환국으로 남인 대부분이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 또는 파직당했다. 더욱이 일부 남인들이 영조대 무신란에 참여하면서 남인들의 정치적 입지는 거의 회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달았다. 영조대에 탕평 정국에서 남인 청류 오광운(吳光運)이 탕평책에 호응하며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고, 그 이후 채제공(蔡濟恭)이 정조대까지 남인들의 구심 역할을 하며 정계에서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반면 서인의 정치적 주도권은 더욱 확실해졌다. ]]송시열]]의 관직을 회복시키고 제사를 내리도록 했고, 기사환국 이후 문묘에서 출향되었던 이이와 성혼의 문묘 배향도 다시 실현되었다.[4]
인현왕후 민씨의 복위와 희빈 장씨의 폐위
조선 숙종은 폐위되었던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왕비 장씨는 다시 옛 작호로 강등시켰다. 다만 세자의 생모로서의 지위는 유지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희빈 장씨는 1701년 인현왕후가 죽었을 때 저주를 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사약을 받았다.[5]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경신환국 | 김석주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1680년 |
금위영 | 김석주 | A는 B에 의해 설립되었다 | |
허새 | 복평군 추대 사건 | A는 B를 주도하였다 | 1682년 |
송시열 | 윤증 | A는 B의 스승이다 | |
인현왕후 | 조선 숙종 | A는 B의 아내이다 | |
희빈 장씨 | 조선 숙종 | A는 B의 아내이다 | |
조선 숙종 | 갑술환국 | A는 B를 주도하였다 | 1694년 |
인현왕후 | 갑술환국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희빈 장씨 | 갑술환국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조선 경종 | 희빈 장씨 | A는 어머니 B가 있다 | |
송시열 | 기사환국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조선 숙종 | 기사환국 | A는 B를 주도하였다 | 1789년 |
인현왕후 | 기사환국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희빈 장씨 | 기사환국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권대운 | 기사환국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목내선 | 기사환국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장희재 | 기사환국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희빈 장씨 | 장희재 | A는 B의 형제이다 | |
권대운 | 남인 | A는 B에 소속된다 | |
목내선 | 남인 | A는 B에 소속된다 | |
장희재 | 남인 | A는 B에 소속된다 | |
송시열 | 노론 | A는 B에 소속된다 | |
윤증 | 소론 | A는 B에 소속된다 | |
장희재 | 갑술환국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민암 | 갑술환국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숙원 최씨 | 갑술환국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숙원 최씨 | 조선 숙종 | A는 B의 아내이다 | |
조선 영조 | 숙원 최씨 | A는 어머니 B가 있다 | |
남구만 | 갑술환국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1794년 |
유명현 | 갑술환국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유명현 | 남인 | A는 B에 소속된다 | |
권대운 | 남인 | A는 B에 소속된다 | |
목래선 | 남인 | A는 B에 소속된다 | |
권대운 | 갑술환국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목래선 | 갑술환국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채제공 | 남인 | A는 B에 소속된다 | |
오광운 | 남인 | A는 B에 소속된다 | |
갑술환국 | 한산이씨 고행록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주석
- ↑ 김지영, "갑술환국",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김지영, "갑술환국",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김지영, "갑술환국",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김지영, "갑술환국",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김지영, "갑술환국",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 단행본
- 지두환, 『숙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9.
- 이건창, 『당의통략 : 조선시대 당쟁(黨爭)의 기록』, 자유문고, 2015.
- 논문
- 김현아, 「肅宗代 己巳·甲戌換局期 南人의 執權과 沒落」, 전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9.
- 이상식, 「朝鮮後期 肅宗의 政局運營과 王權 硏究」,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5.
- 오경택, 「17세기 政局動向과 南人系 宋尙周의 정치활동」, 『한국학논총』,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