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창-명량대첩 관련 기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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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작품에 그려진 전선(戰船)은 평선(平船)으로, 선체 안에 병사들이 발을 붙이고 싸울 수 있도록 적당한 높이에 갑판을 깔고, 배를 움직이기 위하여 여러 개의 노를 달아놓는 형태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ref>"선체 안에...형태" : </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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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실제 [[명량대첩]]때 크게 활약한 전선은 [[판옥선|판옥선(板屋船)]]으로, [[판옥선]]은 1555년([[조선 명종|명종]] 10)때 만들어져 [[임진왜란]] 때 해전에서 맹활약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에 이미 125명 이상의 군사를 수용한 그 크기는 종전에 기껏 80명을 정원으로 한 대맹선이나 일본 군선에 비할 바가 아니며, 그 구조도 튼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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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년에 울도(蔚島)와 명량도(明梁島)에 왜선(倭船)이 바다를 뒤덮어 올 때 안위(安衛)가 하나의 판옥선(板屋船)을 띄워 해전(海戰)에 임했지만 적들이 이 배를 깨뜨리지 못했는데, 아마도 적선이 작았기 때문에 쉽게 대적할 수 있었던 탓인가 합니다.
  
정유년에 울도(蔚島)와 명량도(明梁島)에 왜선(倭船)이 바다를 뒤덮어 올 때 안위(安衛)가 하나의 판옥선(板屋船)을 띄워 해전(海戰)에 임했지만 적들이 이 배를 깨뜨리지 못했는데, 아마도 적선이 작았기 때문에 쉽게 대적할 있었던 탓인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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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옥선]]은 선체 위에 상장(上粧)을 꾸려 2층으로 꾸민 옥선(屋船)으로, 갑판 중앙에 따로 지휘소인 2층 누각이 설치되어 있다. 상장을 높게 2층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적이 선상에 기어올라 침입하지 못하였고, 포를 높게 설치하여 유리한 자리에서 적에게 포격을 가할 수 있는 이점도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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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해당 작품에서 [[이순신]]은 누각이 아니라 갑판 앞에서 전쟁을 지휘하고 있으며, 포 역시 낮은 위치에 설치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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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8395 석등]",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품 속에 묘사된 전선(戰船)
 
  
『명량대첩』 (김기창)의 전투는 장관이나 배의 동력에 관해선 불분명하다. 모두 깃발이 나부끼는데 노에 의존돼 있을 뿐 돛 (범)을 찾아볼 수도 없다.
 
===예복과 자결방식===
 
작품 속 [[민영환]]은 훈장과 견장을 단 서구식 예복을 입고 있고, 왼손 근처에 작은 칼이 놓여져 있다.<br/>
 
그러나 실제 그의 자결과 관련하여 여러가지 상반되는 의견들이 있는데, 당시 그의 최후를 목격했던 [[김우현]]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민영환]]은 한복차림으로 사망했고, 장도(粧刀)로 몸의 여러부분을 찔러 유혈이 낭자했다고 한다.<br/>
 
그의 사망 현장 목격자 중 한 명인 [[시종무관]] [[어담|어담(魚潭)]]은 그가 오른손에 손톱 깎기만한 작은 칼을 쥔 채로 사망하였고, 할복 자살을 시도하였다가 실패하여 목을 찔러 두 치 넓이의 구멍을 내었다고 회고하였고, [[민영환]]의 장남 [[민장식]]의 아들인 [[민병진]]도 그의 조부가 단도로 목숨을 끊었다고 밝혔다.
 
 
===자결장소===
 
작품에 묘사된 배경은 승려와 마당의 석등<ref>"현재까지의 유물조사에 의하면 석등은 주로 사찰·능묘, 그리고 그 유적지에 주로 남아 있으며, 궁궐이나 저택 등의 유적지에서는 발견된 적이 없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8395 석등]",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등을 고려하였을 때 [[조계사]] 뒤편에 있던 [[민영환]] 자택으로 추정되며 유해가 갈무리되지 않고 자결할 당시의 상태 그대로 그려져 있다.<br/>
 
그러나 [[민영환]]이 [[민영환 자결터|순국 자결한 장소]]는 의관 [[이완식]]의 집이라는 것이 국사편찬위원회의 고증을 거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시종무관]] [[어담|어담(魚潭)]]과 [[김우현]] 목사, [[민병진]]의 회고에 따르면, [[민영환 집터|민영환의 집]]에 [[민영환]]의 어머니와 가족이 있었기에 자결 장소를 청지기였던 [[이완식]]의 집으로 택했으며, 그의 유해가 [[이완식]]의 집에서 발견된 뒤 본저(本邸)로 옮겨졌기 때문에 자결한 당시 모습을 하인 한 사람과 청지기 식구만 목격했다고 한다.
 
  
 
=='''지식 관계망'''==
 
=='''지식 관계망'''==

2017년 9월 27일 (수) 22:42 판

김기창-명량대첩 관련 기사()
파일:민족기록화 일러 관련기사.jpg
김현승 일러스트레이터
대표명칭 김기창-명량대첩 관련 기사



정의

민족기록화 김기창-명량대첩 고증과 관련된 자료들을 모은 기사

내용

해당 작품에 그려진 전선(戰船)은 평선(平船)으로, 선체 안에 병사들이 발을 붙이고 싸울 수 있도록 적당한 높이에 갑판을 깔고, 배를 움직이기 위하여 여러 개의 노를 달아놓는 형태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1]
그러나 실제 명량대첩때 크게 활약한 전선은 판옥선(板屋船)으로, 판옥선은 1555년(명종 10)때 만들어져 임진왜란 때 해전에서 맹활약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에 이미 125명 이상의 군사를 수용한 그 크기는 종전에 기껏 80명을 정원으로 한 대맹선이나 일본 군선에 비할 바가 아니며, 그 구조도 튼튼하였다.

정유년에 울도(蔚島)와 명량도(明梁島)에 왜선(倭船)이 바다를 뒤덮어 올 때 안위(安衛)가 하나의 판옥선(板屋船)을 띄워 해전(海戰)에 임했지만 적들이 이 배를 깨뜨리지 못했는데, 아마도 적선이 작았기 때문에 쉽게 대적할 수 있었던 탓인가 합니다.

판옥선은 선체 위에 상장(上粧)을 꾸려 2층으로 꾸민 옥선(屋船)으로, 갑판 중앙에 따로 지휘소인 2층 누각이 설치되어 있다. 상장을 높게 2층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적이 선상에 기어올라 침입하지 못하였고, 포를 높게 설치하여 유리한 자리에서 적에게 포격을 가할 수 있는 이점도 있다.
그러나 해당 작품에서 이순신은 누각이 아니라 갑판 앞에서 전쟁을 지휘하고 있으며, 포 역시 낮은 위치에 설치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석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김기창-명량대첩 관련 기사 김기창-명량대첩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각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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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선체 안에...형태" :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단행본
  2. 기사